‘동아시아 반일무장전선’이라는 이름에서 사람들은 무엇을 떠올릴까? 아마도 누구나 자연스럽게 1945년 8월15일 이전인 일제시대에 중국인·조선인·오키나와인, 그리고 혹시 일본인(?) 등등의 동아시아 사람들이 일본 제국주의를 무력으로 무너뜨리려고 만든 급진적인 국제연대 조직을 떠올릴 것이다. 하지만 불가사의한 이름을 가진 이 조직이 활동한 것은 1945년 이전이 아니라 1970년대 초·중반이다. 또 이 조직에는 조선인·중국인은 없다. 모두 일본인이다. 그렇다면 당연히 의문이 생긴다. 일본 제국주의는 이미 1945년 8월15일에 무너졌는데, 1970년대에 왜 일본인들이 ‘자기부정’에 가까운 ‘반일’이라는 이름을 붙여 이런 조직을 만들어 활동했을까?
살아 있는 실체, 일본 제국주의
일본의 사회운동은 1960년대에 최정점을 찍었다. 그리고 1970년대에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그렇다면 이 조직은 일본 사회운동의 끝자락에 자리해 있는 셈이다. 운동의 끝자락답게 지금의 감각으로는, 아니 당시 일본 사회의 ‘평화로운’ 시대감각으로는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과격하고 급진적인 행동으로 일관돼 있다. 이른바 폭탄테러다. 하지만 이 조직을 특징짓는 것은 과격함만이 아니다. 이 조직의 문제의식이다. 1960년 안보투쟁 이후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운동조직이 등장하고 사라졌지만 이 조직만큼 일본 제국주의를 ‘살아 있는 실체’로 받아들인 조직은 없다. 일본 제국주의가 1945년 8월15일에 사라졌다는 세간의 문제의식을 이들은 거부한다.
이들의 행적은 매우 격렬하다. 예를 들어보자. 동아시아 반일무장전선이라는 이름을 사용하기 전이었던 1971년 12월11일, 시즈오카에 있는 ‘관음상 흥아관상(興亞觀音) 순국7사비’에 폭탄을 설치해 비석을 파괴한다. 흥아관상이란 말 그대로 아시아를 흥하게 했던 관음상을 말하는 것이고, 순국7사란 도쿄재판에서 전범으로 처형당한 7명을 말한다. 순국7사비는 전범의 유골 등을 모아 1959년에 건립된 비석이다.
이들은 1972년 4월6일, 노지지라는 절에 있는 납골당을 폭파한다. 이 납골당에는 일제강점 시대에 조선에 있던 이른바 ‘재조일본인’ 약 5천 명의 유골이 안치돼 있었다. 원래는 일제강점 시대에 서울에 있던 일본인 묘지를 1970년 당시 김현옥 서울시장이 서울 시민묘지 납골당에 옮겼는데, 한국 내 여론 악화로 일본에 반환돼 노지지에 안치된 것이다. 1971년 8월23일, 에는 경기도 벽제에 있던 서울시립공동묘지 소재의 ‘무명일본인위령합사대’에 독립유공자들이 몰려가 휘발유를 뿌려 화형식을 거행했다는 기사가 실려 있다.
또 이들은 1972년 10월23일에는 홋카이도 개척 100년 사업의 일환으로 홋카이도에 설치돼 있던 ‘풍설의 군상’이라는 조각상을 파괴한다. 홋카이도 선주민 아이누에 대한 일제의 침략에 항의하고 그 부당성을 알리기 위해서다. 이들은 홋카이도 설치를 ‘개척’이 아니라 ‘침략’으로 보았다. 10월23일은 아이누 민족의 지도자인 샤크샤인이 1669년 일본인에 의해 살해된 날이다. 1974년 8월15일에는 당시 천황 히로히토를 암살하려는 계획을 세웠으나 시한폭탄 설치 단계에서 미수로 그쳤다.
한국산업경제연구소 폭탄 공격
1974년 8월14일에는 미쓰비시중공업의 도쿄 본사 건물을 폭파했다. 이 폭탄테러로 통행인을 비롯해 8명이 사망하고 376명이 다쳤다. 이들은 범행 성명에서 폭탄테러를 ‘미쓰비시를 비롯한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기업, 침략자에 대한 공격’으로 규정했다. 폭탄으로 죽거나 부상당한 사람들은 ‘무고한 일반 시민’이 아니라, ‘일본 제국주의의 중추에 기생하고 식민주의에 참여해 식민지 인민의 피로 비대해진 식민자’라 했다. 1974년 10월14일에는 미쓰이물산 본관 시설 등을, 12월10일에는 다이세이건설 본사를 폭파한다. 12월10일은 1937년에 일본의 황군이 중국 난징 침공을 개시한 날이다. 난징 대학살이 시작된 날인 것이다. 다이세이건설의 전신은 오쿠라재벌이다. 오쿠라재벌은 일본 제국주의의 대외 팽창과 함께했던 대표적인 ‘죽음의 상인’이다. 이들은 범행 성명에서 다이세이건설이 1922년 수력발전소 건설에 동원된 조선인을 대량으로 학살한 ‘대표적인 식민주의 기업이며 제국주의자’라고 했다. 여기서 조선인 학살이란 니가타현 시나노가와의 수력발전소 건설 과정에서 일상적인 폭력으로 다수의 조선인 노동자가 사망한 사건을 말한다. 당시 동원된 토목노동자 1천 명 중 약 600명이 조선인이었는데, 아직도 몇 명이 학살당했는지는 모른다. 그저 수십 명이라는 기록이 있을 뿐이다.
1975년 2월28일에는 하자마건설을 폭파한다. 이들은 범행 성명에서 이 테러를 ‘기소다니 테멘코르 작전’이라 했다. 기소다니란 1944년부터 하자마건설이 강제 연행한 2천 명의 중국인을 동원해 건설한 나가노현에 있는 기소다니댐을 말한다. 이 중 240명이 가혹한 노동조건과 폭력으로 사망했다. 테멘코르는 말레이시아에 있는 테멘코르 발전소를 말한다. 일본 정부의 엔차관으로 이 발전소를 건설한 것이 일본의 하자마건설이었다. 그리고 이 발전소에 반대하는 말라야공산당이 발전소를 무장 공격하는 일이 일어나곤 했다. 하자마건설에 대한 폭탄테러는 말라야공산당의 테멘코르 발전소 무장 공격에 호응하는 의미도 있다.
같은 해 4월19일에는 도쿄의 한국산업경제연구소와 아마가사키의 오리엔탈메탈 회사를 폭탄 공격한다. 4월19일은 이승만 정권을 무너뜨린 한국의 4·19 혁명에 맞춘 날짜다. 이들은 한국산업경제연구소를 ‘일제 기업의 한국·대만·말라야 침략에 봉사하는 활동’ 거점으로 보았다. 한국산업경제연구소는 1966년 일본 생산성본부의 산하기관으로 설치된 시설로, 한국의 산업 및 노동 관계에 대한 정보 제공과 함께 한국 투자를 촉진하기 위한 방한 활동의 거점이었다. 오리엔탈메탈 회사 사장은 한국산업경제연구소가 주최하는 방한단의 단장이었다. 그리고 5월19일, 연쇄폭탄테러 사건의 범인으로 8명이 체포되었다. 체포 과정에서 사이토 노도카는 가지고 있던 청산가리를 마시고 자살한다. 이들은 1974년 문세광 사건에서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조직적인 연계는 없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재일 소설가 양석일씨가 쓴 소설 은 문세광과 동아시아 반일무장전선의 연계 가능성을 조심스럽게 타진하고 있다.
일본 노조 임금 인상 투쟁 반대
체포 뒤에도 잔여 구성원에 의한 항의는 계속되었고 모방 범죄도 뒤를 이었다. 6월25일에는 후나모토라는 청년이 오키나와에서 ‘아키히토 황태자(현 천황) 오키나와 방문 반대, 일제 및 미제의 조선 침략 반대’를 부르짖고 분신자살했다. 나이 29살이었다. 그는 1945년 패전 직후에 만주에서 경찰관을 지낸 아버지 식민자의 아들이었다. 7월19일에는 홋카이도 경찰본부가 폭파돼 4명이 부상을 입었다. 이 사건은 현재까지 미궁에 빠져 있다.
이들은 일본 노조의 임금 인상 투쟁도 반대한다. 노조의 임금 인상이 지나치면 인건비 상승에 부담을 느낀 일본 기업이 해외로 진출하기 때문이다. 일본 기업의 해외 진출이 일본의 산업 공동화를 가져오고 이것이 일본의 고용을 악화시킨다는 이유에서 노조의 임금 인상을 반대하는 것이 아니다. 일본 기업의 해외 진출이 현지 노동자의 착취로 이어진다는 문제의식이다.
이들의 행동과 문제의식은 매우 거칠고 단락적이고 유아적이고 관념적이다. 이 점이 너무 지나쳐서 이들에게서 완전무결한 순수함마저 느낀다. 하지만 20여 년 전에
접했던 이들의 ‘반일혁명전선’이라는 문건에서 받은 충격은 지금도 나에게 남아 있다. “우리들 일본인은 아이누·조선·중국을 침략한 제국주의 본국인이며 지금도 그 생활은 피식민지 인민의 생활을 희생으로 삼아 이루어지고 있다. 따라서 세계 혁명의 주체로 스스로를 만들어나가려면 우선 무엇보다도 일제 본국인인 우리 자신에 대해 대가를 지불하지 않으면 안 된다.”
‘자신들=일본인’을 일제 본국인으로 규정하고 자신들이 누리는 ‘평화와 번영’을 아이누·조선·중국의 희생 위에 쌓아올린 것으로 보며,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는 이들의 문제의식은 오스트레일리아가 선주민 애버리지니에 대한 수탈의 연장선상에 있다는 오스트레일리아국립대학 테사 스즈키 모리스 교수의 발언과도 상통한다. “나는 직접 토지를 빼앗지 않았을지 모르지만, 도둑질한 토지에 살고 있다. 나는 실제 학살에 가담하지 않았을지 모르지만, 학살의 기억을 말살하는 프로젝트에 관여하고 있다. 나는 ‘타자’를 구체적으로 박해하지 않았을지 모르지만, 정당한 보상 등이 이루어지지 않은 과거의 박해를 통해 수익을 올린 사회에서 살고 있다.”
문제의식을 부정하게 만든 행동
이들은 기업에, 그리고 자신에게 ‘일제 본국인’으로서의 책임을 물었고 대가를 지불하기를 요구했다. 기업은 폭파되었고 ‘무고한 시민’도 희생당했다. 그리고 자신들은 오랫동안 감옥에 갇혔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하지만 그것이 ‘대가를 지불’한 것이 될까? 이 사건에 관여했던 사람들이 최근 감옥에서 출소해 이곳저곳에 쓴 회상기를 접한다. “문제의식은 옳았으나 행동이 잘못되었다”는 회상이 대부분이다. 아마 솔직한 심정일 것이고 이 회상이 틀렸다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본인들의 속내와는 관계없이 이들의 회상처럼 문제의식과 행동이 분리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일본 제국주의의 ‘살아 있는 과거사’에서 벗어나고 싶어 했던 사람들에게 이들의 과격한 행동이 면죄부를 주었기 때문이다. 면죄부는 두 가지 경로였다. 하나는 ‘대가를 지불’하는 행동과 문제의식이 일본에 존재한다는 것을 확인함으로써, 또 하나는 ‘대가를 지불’하려는 문제의식은 결국 폭탄테러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확인함으로써. 즉 행동이 부정됨으로써 문제의식까지도 부정당한 것이다.
성공회대 일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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