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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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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워없앨 수 없었던 허난설헌의 판타지

등록 2005-09-29 15:00 수정 2020-05-02 19:24

[김재희의 여인열전]

▣ 김재희/ <이프> 편집인 franzi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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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63년 임진왜란이 터지기 서른해 전에 세상에 나타난 초희라는 계집아이는, 자신의 운명을 세 가지로 압축해 이 넓은 세상에서 하필 조선 땅, 그것도 여자 몸으로 태어나 열네살에 시집가 낳은 아이 둘은 다 죽고, 하필이면 또 김성립이란 졸장부의 아내가 되었는지! 자신의 원통한 심정을 절절히 토로했다. 함께 신동 소릴 듣고 자란 지봉 이수광 같은 이는 같은 해 같은 땅에 태어났어도 고추 하나 달고 나온 덕에 당쟁이 치고받고 시절이 그토록 고약해도 묵묵히 양반 사회의 모순을 성찰하며 벼슬길에서 물러나 자기 정진하면 그만이었다. 때론 못난 왕을 보필해 의주까지 피난 가는 수난도 겪었지만 전쟁이 가라앉은 후에는 이웃나라 사신으로도 가고, 돌아와선 다시 새로운 세상을 꿈꾸면서 실학운동의 선구자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여성의 천부적 재능 따위는! 도리어 재앙이던 답답한 시대, 그녀는 숨 막히는 시댁에 갇혀 죽었다.

아버지 허엽은 최고 벼슬을 했던 유교 전통의 선비임에도 황진이와 더불어 화담 서경덕 밑에서 동문수학했던 도나 기에 도통한 남자라 오라비들 틈에서 뭐를 배우든 말든 ‘걍 냅두는’ 일명 ‘냅도(道)’를 잘 실천했고, 호방하고 명석한 오라비들은 ‘호부호제 못하는’ 서러운 서자 출신 탁월한 시인 친구를 불러 보물덩어리 누이의 재능이 빛나도록 개인 교습도 시켜주었다.

그게 화근이었다. 곧 스승을 능가하고 세월을 건너뛰는 규방 아씨 초희는, 무지막지하게 강요되는 인내와 순종, 구질구질한 현세 따위에서 가볍게 벗어나, 성과 속에도 구애됨이 없는 호호탕탕한 세계를 향한 우주적 상상력을 발휘하며 선녀와 신선이 노니는 판타지 세상을 거침없이 창조하고, 거기 머물러 살고자 했다. ‘난설헌’이란 청초한 이름으로 다시 태어난 시인의 그 행복한 세계와 스물세살에 써내려간 자신의 죽음을 예언한 외롭고도 구슬픈 내용까지 담아낸 200여편의 주옥같은 시는, 스물일곱의 나이로 요절하면서 모두 태워 없애달라는 유언에도 불구하고 치열하게 시대와 불화하는 한편으로 누나에 압도당했던 그녀의 막내동생 허균 덕에 뒤늦게 살아나 중국과 일본에서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했다.

300년 뒤 그녀의 혼을 닮은 여자들은 나혜석도 되고 전혜린도 되고 고정희도 되었으며 버지니아 울프도 되고 애거사 크리스티도 되고 심지어 조앤 롤링도 되어 돈벼락을 맞고 세상의 찬사를 받나 싶더니, 이젠 대부분의 계집애들이 같은 동네 출신인 현모양처 신사임당 할머니 말고 멜랑콜리하고 관능적인 허난설헌을 따라 점점 더 제멋대로 삶을 꾸릴 작당을 하고 있다. 존재의 평화 혹은 평등을 꿈꾸던 아름답고 매혹적인 여성 작가로 다시 태어나는 허난설헌과 그녀의 동생 허균의 분방하고 진취적인 혼을 기리는 사람들은 최근 이 오누이의 생가, 아름다운 강릉의 경포호반, 솔밭을 끼고 위치한 풍취 그윽한 고옥 주변에서 역사상 각별했던 두 사람을 흠모하는 축제를 가을마다 한 차례씩 벌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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