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이 청와대 내부 회의에서 세월호 참사 수습 대책 등을 거의 언급하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 심지어 박 대통령은 세월호 참사 100일째 되는 날 청와대 직원들에게 “휴가 많이 가라”고 지시하거나, 세월호 인양이 시작되는 날 최순실의 딸 정유라와 관련된 체육계 비리 척결을 강조하는 등 세월호 참사에 철저히 무관심한 태도를 보였다.
이 입수한 김영한 전 대통령비서실 민정수석의 업무수첩(2014년 6월14일~2015년 1월9일)에는 대통령의 지시 사항으로 보이는 ‘領’(령, 18회) 또는 ‘統’(통, 1회)이란 표기가 19차례 등장한다. 열흘에 한 번꼴이 채 안 된다. 이 가운데 직간접적으로 세월호 관련 언급을 한 건 5번에 그친다. 그나마 ‘유병언’ 등 간접적 언급을 제외하면 ‘세월호’란 말을 직접 한 것은 딱 2차례다. 6월30일 ‘領’에 ‘세월호 구상권-추적검거 문책/검거’라는 메모가 있고, 9월2일 ‘領’에 ‘세월호 사건-적폐가 인명 피해 초래’가 적혀 있다.
대통령의 금칙어 ‘세월호’김 전 수석이 업무수첩을 적은 기간은 ‘세월호 국정조사’ ‘세월호 수사 결과 발표’ ‘세월호 유가족 단식’ ‘세월호 특별법 국회 공방’ ‘세월호 수색 중단’ 등으로 이어진 때다. 김 전 수석의 업무 기간 전체가 세월호 국면이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이 기간에 대통령이 세월호 언급을 2차례만 했다는 건 세월호 참사에 대한 인식이 어떠했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업무수첩에서 박근혜 대통령의 말을 의미하는 ‘領’이나 ‘統’이란 글자 아래 세월호 관련 언급이 처음 등장한 것은 2014년 6월30일이다. 대통령 주재 수석비서관 회의를 메모하며 김 전 수석은 ‘統’ 아래 ‘세월호 구상권-추적점거 문책/검거’라고 적었다.
6월30일은 ‘세월호 진상규명을 위한 국정조사 특별위원회’(이하 세월호 국조특위)가 국회에서 활동을 시작한 날이다. 당시 기관 보고의 쟁점은 ‘범정부 사고대책본부의 무능함, 상황보고서 내용 수정, 세월호 증축·개조 과정 중 불법행위’ 등이었는데, 대통령은 이날 세월호에 대한 구상권 추적과 유병언 일가 검거 지시를 내린 것으로 보인다.
세월호 국조특위는 정부 쪽의 자료 미공개와 불성실한 태도로 파행을 겪었다. 7월7일 국회에 출석한 김기춘 비서실장은 대통령의 세월호 참사 당일 행적 등에 대해 ‘모르쇠’와 ‘청와대 책임 없다’로 일관했다. 이에 유가족들은 7월12일 국회에서 밤샘농성에 돌입했고, 14일에는 ‘세월호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는 단식농성을 시작했다.
유가족들의 첫 단식농성이 있던 날, 대통령 주재 수석비서관 회의가 열렸다. 이날 김 전 수석은 수첩에 ‘’(대통령 주재 수석비서관회의)라 적고 그 아래 ‘교육부 지방재정 효율화 TF, 교육감 좌파적 낭비 시정’ ‘체육계 비리 수사(문체부)’라고 적었다. 세월호 진상 규명이 총체적 파행으로 접어들던 때, 대통령은 훗날 정유라 감싸기로 확인된 체육계 비리 수사와 좌파 교육감 단속을 주문한 것이다.
대통령의 황당한 지시는 7월22일과 24일에도 이어졌다. 22일은 경찰이 40여 일 전에 발견한 주검이 유병언이었다는 게 확인된 날이다. 바로 전날 검찰은 ‘세월호 참사 수사 결과’를 발표하며 “(유병언) 추적의 꼬리는 놓치지 않고 있다”고 말했는데 하루 만에 완전히 부패한 백골 주검이 확인됐다.
이날 ‘領’이란 글자 아래에는 ‘즐겁게 일하는 것, 열정→성공, 사명 완수’ ‘성범죄자 신상정보 확인-잘한 일 홍보되도록’ ‘휴가철 범죄 유관 부처 협조-대처’ 등의 지시가 적혀 있다.
그로부터 이틀 뒤인 24일은 세월호 참사가 100일을 맞은 날로 유가족들이 청와대 행진을 시도해 경찰과 격렬하게 대치한 날이다. 조계종을 비롯한 4대 종단이 추모식을 거행한 날이기도 하다.
이날 수첩에 적힌 ‘領’은 ‘규제개혁 강조’ ‘휴가 많이 가라, [Live and learn]’추리소설 (오리엔트특급) 아가사 크리스티’라고 했다. 유병언 주검 확인-검찰 수사 발표-세월호 참사 100일로 이어진 시기에 대통령이 ‘Live and learn’이란 영어 숙어까지 사용해가며 청와대 직원들에게 휴가를 가라고 독려한 셈이다. Live and learn은 ‘살아가면서 배운다’는 뜻이다.
이후에도 세월호 참사를 둘러싼 사회적 공방과 논란은 계속됐다. 여야는 세월호 청문회 증인 출석을 놓고 파행(8월1일)을 빚었고, 일본 은 ‘대통령의 7시간’을 둘러싼 의혹을 제기(8월3일)했다. 수사권과 기소권이 빠진 세월호 특별법 합의를 두고 유가족들이 격렬하게 반발하며 기자회견을 열기도(8월10일)했다.
이런 상황에서 대통령은 ‘김영란법, 유병언법 몰수 추징, 법안’ ‘국민 심리 살펴서 정책 펴야, 성공. 수범 사례 전파, 자발 의지 정서 생기도록’(8월11일 ‘領’)이란 지시를 내렸다.
대통령이 과연 세월호 참사에 대한 인식이 있었는지 의심할 수밖에 없는 업무수첩 내용은 더 있다. 세월호 가족대책위가 청와대 앞에서 삼보일배를 한 9월2일 대통령은 ‘김영란법 조속 통과’를 당부한다.
유가족들이 세월호 특별법에 “수사권과 기소권을 포함하는 것은 사법체계를 흔드는 것”이라고 발언한 대통령을 규탄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던 9월16일에는 ‘김혜경 귀국시의 장점→은닉재산 추가 발굴 가능성’ ‘사이버 단속 강화 방안. 현재 동향’이 ‘領’ 아래 적혀 있다.
김완 기자 funnybone@hani.co.kr전화신청▶ 02-2013-1300 (월납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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