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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유산 “민주주의가 밥 먹여주냐”

10·26 이후 30년, 왜 아직도 진보는 박정희를 넘어서지 못하는가
등록 2009-10-22 07:21 수정 2020-05-02 19:25
경북 구미시 박정희 전 대통령 생가에 전시된 박 전 대통령·육영수씨 사진. 방문객들은 이 옆에서 사진을 찍으며 박정희를 추억한다.

경북 구미시 박정희 전 대통령 생가에 전시된 박 전 대통령·육영수씨 사진. 방문객들은 이 옆에서 사진을 찍으며 박정희를 추억한다.

“보고 싶어서 왔제. 역대 대통령 중에 젤로 존경하는 분이 박정희 대통령이여. 새마을정신이 근대화를 이뤘잖아.”

광주에서 태어나 그곳에 뿌리를 내리고 사는 이아무개(67)씨는 10월13일 부인 신아무개(63)씨와 함께 오전 10시30분에 집을 나섰다고 했다. 5시간 가까이 자가용을 운전하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고 경북 구미의 박정희 전 대통령 생가를 찾은 이유는 “보고 싶어서”였다. 옆에 선 신씨는 생가 들머리 ‘보릿고개 체험장’에서 1천원을 주고 산 보리개떡을 한입 베어문 뒤 “옛날 맛은 아니지, 그 맛은 아니여”라고 아쉬워했다. 그는 “(대구를 거쳐서 왔는데) 광주는 쪼끄만 도시인데, 대구 딱 들어오니까 대도시에 온 것 같더만. 아, 그래서 광주 사람들이 대구 사람들 싫어하는구나 싶었어”라면서도 “뭐라뭐라 해도 박정희 대통령이 5·16 이후에 근대화를 하고 먹고살게 해준 업적은 알아줘야 혀”라는 말을 잊지 않았다.

“그립습니다” “고맙습니다”

이번이 생가 방문 두 번째라는 빈태유(67·경북 경산)씨는 “좌파, 우파를 떠나서 배고픈 사람한테 밥을 주는 것만큼 고마운 일이 어딨어요? 이 어른이 바로 그런 분이라. 보릿고개를 해결해준 분 아이가”라며 추억에 잠겼다. 잠시 박 전 대통령과 부인 육영수씨의 추모관을 바라보던 그는 “지금 우리가 휴대전화, 자동차 만들어서 외국에 팔아 살 수 있는 건 이 어른이 국민을 위해 사심 없이 노력했기 때문이에요. 얼마든지 좋은 음식 먹어도 되는데 청와대에서도 통일벼 먹고, 검소하게 생활하고, 부정축재도 안 했잖아요”라며 안채로 발걸음을 옮겼다.

‘어려운 시절을 함께 이겨낸 동지를 추억함.’ 이날 박 전 대통령 생가에서 만난 이들의 정서는 한결같았다. 관리사무소 집계를 보면, 평일엔 보통 800~900명, 휴일엔 1400~1500명이 이곳을 찾는다. 생가는 추모관과 안채, 관리사무소 역할을 하는 사랑채를 포함해 754㎡(228평)로, 다 둘러보는 데 20분이면 충분하다. 주변엔 별다른 편의시설이나 즐길거리도 없고, 보리콩죽·보리개떡·보리막걸리 등을 파는 ‘보릿고개 체험장’도 지난 4월에야 생겼다. 그런데도 생가를 개방한 1995년 3만 명이 채 안 됐던 방문객은 꾸준히 늘어나 지난해엔 48만여 명이나 됐다. 올 8월까지 누적 방문객은 450만 명을 넘는다.

이들이 방명록에 가장 많이 남긴 말은 “그립습니다”와 “고맙습니다”였다. 대체 ‘박정희’가 무엇이기에 이렇게 많은 이들이 나들이 장소로 그리 마땅해 보이지 않는 이곳을 찾아 절절한 그리움과 고마움을 토해내는 걸까? 이 물음은 민주·진보 진영이 ‘민주주의’를 성취하려고 반세기 가까이 ‘박정희 독재’를 비판하고 이후 권위주의 정부에 맞서왔음에도, 박 전 대통령이 ‘존경하는 대통령 1위’ 자리를 내놓지 않는 이유와도 맞닿아 있다.

잠시 소설가 이인화씨가 박 전 대통령을 모델로 한 소설 에 쓴 ‘작가의 말’을 보자. “그는 가장 어려웠던 시대에 태어나 가장 고통스런 세월을 이겨내고 가난과 절망에 빠진 한 민족을 도저히 가능할 것 같지 않았던 번영으로 이끌었다. 죄와 배신과 불의와 타락에 몸을 적시며 결단코 이상을 향해 매진했던 그 고독과 우수의 마키아벨리즘을 이해하면서 나는 비로소 인간이라는 존재에 전혀 있을 것 같지 않았던 힘과 용기를 발견했던 것이다.” “독재는 좀 했지만, 경제를 발전시킨 업적에 비할 바가 아니다”라는 인식의 문학적 혹은 현학적 표현인 셈이다.

박정희 전 대통령 생가 방문객 추이

박정희 전 대통령 생가 방문객 추이

하루에 12시간 이상 일하면서도 저임금에 시달리는 공장 노동자, 농번기에 새마을운동 다리 놓기 사업에 노동력을 착취당한 촌부들이 착취의 당사자인 박 전 대통령에게 이런 ‘찬양’을 보내는 힘은 먼저 ‘공감’과 ‘동의’로 풀이될 수 있다. 생가에서 만난 한 50대 중반 남성의 말은 이랬다. “여기 달랑 초가집 한 채 말고 뭐가 있습니까. 내가 살던 집도 이랬어요. 우리 세대는 하루 세끼 다 못 먹고 다 어렵게 컸다고. 우리 아들이 카이스트를 나왔는데, 입학식 때 학부모 선서를 시킵디다. 거기 ‘조국의 발전과 명예를 위해서’라는 대목이 나와요. 이래 어렵게 살던 사람이 대통령이 되고, 국민들 잘살게 해주려고 카이스트를 만들고, 우리도 잘살 수 있다고….” 순식간에 눈과 코가 붉어진다.

따지고 보면 박 전 대통령은 궁핍한 산골마을에서 자수성가해 일국의 대통령 자리에까지 오른 ‘성공신화’의 첫 번째 모델이다. 그 성공신화가 아무리 비루하고 개인적인 신분 상승욕과 권력욕 덕분이라 해도, 끼니도 제때 챙겨먹을 수 없는 이들에게 자신과 같은 가난을 경험한 박 전 대통령의 “잘살아보세”라는 선창은 “우리도 한번 잘살아보세”라는 희망 혹은 욕망의 합창으로 번져나갈 수밖에 없었다. 5·16 쿠데타 직후 쓴 에서 “지도자는 대중과 운명을 같이하고 그들의 편에 서서 동고동락하는 동지로서의 의식을 가진 자”라고 한 그였다. 그에 걸맞게 박 전 대통령은 수시로 논두렁에 앉아 농부들과 막걸리를 나누며 ‘농민의 아들’임을 강조하면서 “하면 된다”고 역설했다.

대중독재 vs 군사독재

이런 현상을 임지현 한양대 교수(사학)는 국민의 자발적 동의를 얻은 ‘대중독재’라고 설명한다. 그는 저서 에서 “‘아래로부터의 독재’는 사회보장 정책이나 대규모 공공사업을 통한 실업의 축소, 실질임금의 증대 등 근대화와 산업화의 성공적인 진전이라는 물적 기반을 갖고 있었다. 노동 억압 정책에도 불구하고 ‘산업전사’로 동원되어 고도 성장이 제공한 일자리의 혜택을 받을 수 있었던 남한의 노동자들이 박정희의 개발독재에 보낸 일정한 지지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된다”고 썼다. 눈만 뜨면 “초가집도 없애고 마을 길도 넓히고” 숫자로나마 월급이 오르는 새로운 경험은, 술김에 “공화당은 공산당보다 못하다”고 말한 사람을 2년이나 옥살이시키는 ‘막걸리 반공법’과 긴급조치, 유신 등 숨통을 조이는 ‘독재 따위’에 눈감도록 하기에 충분했다는 이야기다.

경북 구미시청이 지난 9월 ‘새마을박람회’를 앞두고 예산 1300만원을 들여 제작한 박정희 전 대통령 홍보물. 5천 부가 발행된 ‘민족영웅 박정희 대통령 일대기’라는 제목의 이 홍보물은 박 전 대통령의 친일 행적을 정당화하고 남로당 활동이 불가피했음을 강조하는 한편 그의 리더십과 검소함을 미화하는 내용으로 가득하다. (※ 이미지를 클릭하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경북 구미시청이 지난 9월 ‘새마을박람회’를 앞두고 예산 1300만원을 들여 제작한 박정희 전 대통령 홍보물. 5천 부가 발행된 ‘민족영웅 박정희 대통령 일대기’라는 제목의 이 홍보물은 박 전 대통령의 친일 행적을 정당화하고 남로당 활동이 불가피했음을 강조하는 한편 그의 리더십과 검소함을 미화하는 내용으로 가득하다. (※ 이미지를 클릭하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조희연 성공회대 교수(시민사회복지대학원 NGO학과)는 이런 동의가 ‘자발적’인 것이 아니었다고 지적한다. 조 교수는 몇 차례 논문에서 “박정희 독재는 적극적 동의를 광범위하게 창출해 정권을 안정적으로 유지했다기보다, 정당성 부재 등으로 큰 정치적 위기 속에서 지배를 유지해야 했고, 반공주의·개발주의적 동원을 통해 정치적 위기를 만회했다”고 주장했다. 이는 박 전 대통령이 쓴 이란 책에서도 일부 확인된다. 그는 빈곤을 “공산주의가 침투해 들어올 수 있는 통로요 허점”이라며 “자유 이념하에 우리 자체의 번영과 부강이 선행”돼야만 공산주의를 이길 수 있다고 주장했다. 즉, 쿠데타로 집권한 박 전 대통령은 그 정당성을 인정받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했기에 1950년대에 횡행했던 반공주의에 누구나 욕망할 법한 경제개발이라는 논리를 접붙여 ‘동의’를 얻었다는 설명이 가능하다. 하지만 한일회담 반대투쟁, 1971년 부정선거 반대투쟁, 전태일 열사 분신 등 이에 반발하는 사건도 끊이지 않았던 탓에 박 전 대통령은 일상적인 ‘비상체제’를 가동한다. 집권한 18년 동안 계엄령이나 위수령, 긴급조치처럼 군대가 전면에 나서 폭압적인 통제와 감시를 하지 않은 해는 3분의 1에 불과하다.

“민주주의라는 빛 좋은 개살구는 기아와 절망에 시달리는 국민대중에게는 너무 무의미한 것이다. 경제개발계획을 어느 정도 성공적으로 달성할 수 있는가는 비단 한국뿐만 아니라 아시아에 있어서 진정한 민주주의의 성패와 장래를 결정하게 될 유일한 관건이 될 것이다.” 의 또 다른 대목이다. 민주주의보다 밥이 먼저라는 이런 논리는 군용 점퍼와 막걸리로 상징되는 박 전 대통령의 검소한 이미지로 더욱 강력한 힘을 발휘했다. ‘대통령도 저렇게 국민을 위해 검소한 생활을 한다. 지금은 다른 데 눈을 돌릴 때가 아니다’라는 인식을 심어준 것이다.

막걸리와 시바스 리갈 사이

게다가 고아원·양로원·나환자촌 등을 수시로 방문해 격려하고, 헌혈에도 팔을 걷어붙이는 육영수씨의 이미지는 산업역군들의 지친 마음을 어루만지고 기운을 북돋우는 ‘어머니’ 그 자체였다. 구미 생가 주변에선 한 달에 두 번씩 꼬박꼬박 추모관을 찾아가 육씨의 사진 앞에 국화 한 다발을 놓은 뒤 한참을 대성통곡하다 나온다는 한 60대 남성이 ‘유명인사’였다. 전시된 사진을 보면서도 열에 아홉은 “저분만 한 국모가 없다. 아무도 육 여사 못 따라간다”는 말을 빠트리지 않는다. 가족을 일으켜세우려 솔선수범하는 강력한 가부장과 자애로운 어머니로 조작된 상징은 그렇게 48년 동안 대한민국에 각인됐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수시로 농촌을 방문해 농민들과 막걸리를 마시며 근대화를 강조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수시로 농촌을 방문해 농민들과 막걸리를 마시며 근대화를 강조했다.

이런 경험과 기억 앞에서 박 전 대통령이 “긴 칼 차고 대장 되어 돌아오면 군수보다 너희들 선생님이 더 높다”며 문경보통학교 교사 자리를 떠나 만주 군관학교에 들어갔고, 한국 이름의 흔적이 남은 ‘다카키 마사오’에 이어 ‘오카모토 미노루’라는 완전한 일본식 이름으로 두 차례 창씨개명을 하면서 친일 부역을 한 사실은 힘을 잃었다. 국군에 입대한 뒤 남로당 활동을 2년이나 벌였지만, 여순 반란사건이 벌어지자 군내 남로당원 3천여 명의 명단을 군 수사기관에 넘겨 목숨을 보존했다는 배신의 역사도, 즐겨 마시던 술이 서민은 구경하기도 힘들던 양주 ‘시바스 리갈’이었다는 것도 그저 풍문이나 낭만일 뿐이었다.

무엇보다도 독재에 맞서 목숨을 내놓으면서까지 민주주의를 쟁취하려 노력했던 민주·진보 진영은 보릿고개가 1천원을 주고 체험하는 이벤트가 된 지금까지도 ‘민주주의가 밥 먹여주냐’는 그의 유산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김호기 연세대 교수(사회학)는 “박정희 시대를 거치면서 중산층은 집에 라디오·텔레비전이 들어오고 자가용을 갖게 되면서 삶의 질이 개선됐다고 할 수 있지만, 노동자나 도시빈민의 삶은 그때도 어려웠다”며 “그럼에도 서민이 박정희 체제에 향수를 갖는 건 지금 느끼는 삶의 곤궁함은 아무도 해결하지 못하지만, 박정희 체제는 해결해줬다고 ‘기억’하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특히 민주·진보 세력이 집권한 김대중·노무현 정부에서 양극화 현상이 심화되면서 이런 경향은 더욱 강해졌다.

하지만 이것이 보수 진영의 논리처럼 “민주 세력은 경제에 무능하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양극화 현상의 시발이 박정희 체제였음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보수 진영이 ‘잃어버린 10년’이라고 공격하는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 땐 각각 외환위기를 극복했고 4% 안팎의 경제성장률을 유지했다. 김 교수는 “사실은 ‘잃어버린 1년 반’이다. 이명박 정부 들어 실질소득은 오히려 줄었다. 그런데도 정치적인 공격을 막지 못하는 건 민주정부가 민생 문제를 기대만큼 흡족하게 해결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며 “민주·진보 세력도 밥 먹여준다. 그런데 형평성을 갖추고 청빈하게 먹여준다는 게 입증돼야 ‘우리 안의 박정희’를 지울 수 있다”고 말했다.

‘공공성’과 ‘공화주의’ 고민해야

이보다 더 본질적인 문제는 진보 진영이 민주화 이후에도 기존의 민주화 담론에 머무른 채 발전적 이슈를 내놓지 못했고, 집권한 민주 진영도 박정희 체제의 성장주의 프레임에 갇혔다는 데 있다. 이는 보수 진영이 정권을 잃은 뒤 성장주의를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사회 양극화, 빈곤 증대, 중산층 몰락, 고용 불안 등 전통적인 진보적 의제까지 외견상이나마 포섭하려 한 것과 대비된다. 경제 성장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보수 진영의 해법은 달라지지 않았지만, 과거엔 언급조차 하지 않던 문제들을 전면에 내세움으로써 ‘따뜻한 보수’라는 새옷을 입은 것이다.

박명림 연세대 지역학협동과정 교수는 민주·진보 진영이 박정희 체제를 뛰어넘으려면 ‘공공성’과 ‘공화주의’를 고민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민주정부 때 보수는 (박정희 시절 수준의) ‘성장’을 요구하며 정부를 비판했고, 진보는 왜 ‘분배’를 하지 않느냐고 비판했다. 박정희 때의 논쟁을 박정희 이후에도 계속한 게 진보의 패착이다. 1인당 국민소득이 2만달러에 이르는 지금은 박정희 시대와 다른 싸움을 해야 한다. 산업화와 민주화를 함께 이뤄낸 북유럽 선진국을 보자. 지금 우리나라와 같은 소득수준에서 국가의 공적 역할을 강조했기 때문에 선진국이 된 것이다.”

한 방문객이 10월13일 박 전 대통령 생가에 전시된 사진을 둘러보고 있다. 생가 방문객은 해마다 늘어 지난 8월까지 459만 명을 넘었다.

한 방문객이 10월13일 박 전 대통령 생가에 전시된 사진을 둘러보고 있다. 생가 방문객은 해마다 늘어 지난 8월까지 459만 명을 넘었다.

박 교수의 지적은 ‘분배가 성장의 발목을 잡는다’는 보수의 논리를 깨려면, ‘성장을 거부하는 분배’가 아니라 사회 구성원 모두의 ‘공익’이라는 틀로 접근해야 한다는 것이다. 가령 스웨덴은 1990년대 초반 경제위기를 겪으면서 복지 분야를 축소해 우리나라 보수 진영에서 ‘분배의 병폐’ 대표사례로 꼽힌다. 하지만 스웨덴은 국민소득이 1만달러가 되기 전부터 교육, 의료, 육아, 노후, 실업과 재취업 등을 ‘공공성의 영역’으로 인식하고 강력한 복지정책을 폈다. 공공성 강화는 모든 사회 구성원의 삶의 안정성을 높이기 위해 필수적이라는 인식이 그 바탕을 이뤘다. 이 때문에 복지를 축소한 뒤에도 스웨덴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사회복지 지출 비중은 줄곧 30%선을 유지했다. 이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은 물론, 상대적으로 복지 비중이 높은 유럽연합(EU) 국가들 중에서도 단연 1위다. 사회복지 지출이 GDP의 10%도 안 되는 우리나라와는 비교할 수가 없는 것이다. 스웨덴의 공공성 강화는 경제성장을 불렀다. 1988년 2만달러를 기록한 1인당 국민소득은 18년 뒤인 2006년 4만달러로 두배나 올랐다. 모두의 삶의 안정성을 높인 결과였다.

외환위기 이후 우리나라의 1인당 국민소득도 거의 해마다 증가했다. 하지만 교육, 의료, 복지, 주택 등 공공성이 생명인 분야마저 시장 만능주의의 지배를 받게 되면서 개인이 부담해야 할 비용 역시 폭증했다. 이명박 정권 들어 성장을 더욱 강조하고 있지만, 실질소득은 줄고 잠재성장률 전망도 하루가 멀다하고 춤을 춘다. 성장 담론이 오히려 성장을 가로막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민주·진보 진영이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폭넓게 연대함으로써 현실정치에서 대안을 모색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체험에 기반한 박정희 체제를 극복하는 길은 비판이 아니라 실물로서의 대안”(장석준 진보신당 정책실장)이기 때문이다. 하재훈 성공회대 민주주의연구소 연구교수는 “이명박 정부가 ‘서민 살리기’라는 이슈를 내놔도 민주·진보 진영은 단일한 의견을 모으지 못하고 있다. 민주노동당·진보신당 뿐만 아니라 노동계와 시민사회 등 제반 진보세력으로 외연을 넓히고 폭넓은 논의의 장을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런 맥락에서 최근 박원순 희망제작소 상임이사,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 등 민주·진보 진영 인사 120여 명이 내년 지방선거를 겨냥해 출범시킨 ‘희망과 대안’(가칭)은 눈길을 끈다. 정치연합과 좋은 후보 발굴·추천, 기존 정치권과의 논의 기구 구성 등을 천명한 만큼, 지지부진한 ‘반MB 연대’ ‘민들레 연대’ 등 야 4당의 연대 틀에 활로를 열어줄 가능성도 없지 않다.

학계의 ‘길 찾기 움직임’

학계에선 박정희 체제 극복을 위한 길 찾기 움직임도 인다. 10월19~20일 연세대에선 이 학교 동서문제연구원 동아시아협력센터와 오스트레일리아국립대 아시아·태평양대학 오스트레일리아·한국 리더십 포럼의 공동 주최로 ‘박정희와 그의 유산: 30년 후의 재검토’라는 학술회의가 열린다. 11월9일엔 박명림 교수, 이종석 전 통일부 장관, 정상호 명지대 국제한국학연구소 연구교수 등이 박정희 체제를 재평가하는 토론회를 연다. 둘 다 일방적 평가를 넘어 객관적으로 ‘왜 아직 박정희인가’를 논의하겠다는 취지인데, 10월 토론회는 진보·중도·보수 쪽이 함께 모이고, 11월 토론회는 지금까지도 성장 신화가 수용되는 원인을 밝히는 데 초점을 맞춘다.

“황파에 시달리는 삼천만 우리 동포/ 언제나 구름 개이고 태양이 빛나리/ 천추에 한이 되는 조국 질서 못 잡으면/ 내 민족 앞에 선혈 바쳐 충혈원혼 되겠노라.” 박정희가 쿠데타를 일으키려고 비행기를 타고 이동하던 중 구미 금오산 상공을 지나며 남긴 글이라고 한다. 하지만 ‘태양’을 빛나게 하는 힘은 한 사람의 ‘선혈’이 아니라 ‘삼천만 우리 동포’다. 박정희 체제를 오래된 기억에서 지울 수 있는 새로운 길찾기가 10·26 30년을 맞는 지금 민주·진보 진영에게 던져진 화두다.

구미=글 조혜정 기자 zesty@hani.co.kr·사진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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