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1993년에야 위대해졌다

<조선일보> 30년간 관련 기사 93.6%가 1993년 2월 이후…
YS에 대비돼 신드롬 탄생, 잊혀질 때면 ‘존경하는 대통령’ 보도
등록 2009-10-22 02:38 수정 2020-05-02 19:25
서울 세종로에 있는 코리아나 호텔. <조선일보>는 박정희 정권 초기 박 전 대통령의 권유와 도움으로 코리아나 호텔을 세웠다. 방우영 <조선일보> 명예회장은 자신의 회고록 <나는 아침이 두려웠다>에서 “현금 한 푼 없이 서울에서 제일 높은 호텔을 지었다”고 기록했다. 사진 한겨레 자료

서울 세종로에 있는 코리아나 호텔. <조선일보>는 박정희 정권 초기 박 전 대통령의 권유와 도움으로 코리아나 호텔을 세웠다. 방우영 <조선일보> 명예회장은 자신의 회고록 <나는 아침이 두려웠다>에서 “현금 한 푼 없이 서울에서 제일 높은 호텔을 지었다”고 기록했다. 사진 한겨레 자료

“‘위대한 대통령’이 필요하다.”

2009년 10월10일 는 이렇게 말했다. 해당 기사는 10월1일 중국 베이징 톈안먼 광장에서 열린 중국 건국 60주년 행사의 취재 후기였다. 중국은 마오쩌둥, 덩샤오핑, 장쩌민, 후진타오 등 역대 주석이 적잖은 흠결을 갖고 있지만, 그들의 ‘과’보다 ‘공’을 내세워 국민 통합을 이뤄냈다는 내용을 담았다.

중국 건국 60주년과 박정희 기념관의 관계

기사의 의도는 뒷부분에 드러나 있다. “올해 건국 61년이 된 우리의 역대 대통령들은 이런 호화로운 대접은커녕 아직도 어두운 그늘 속에 내팽개쳐져 있다. 국부인 이승만 전 대통령은 그 ‘공’에 대한 객관적 평가를 받지 못한 채 ‘분단을 부른 장본인’ 취급을 받고 있다. 외국에서는 ‘한국 경제를 일으킨 위대한 지도자’로 평가받는 박정희 전 대통령은 정작 국내에서는 번듯한 기념관 하나 갖고 있지 못하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피살된 1979년 10월26일 이후 최근까지 는 다양한 형태의 박 전 대통령 관련 기사를 선보였다. 박 전 대통령은 에서 한국을 가난에서 구해낸 민족 중흥의 기수로 등장하기도 했고, 초강대국 미국 앞에서도 할 말은 하는 당당한 지도자로 묘사되기도 했다. 는 쿠데타로 집권한 군인 출신 대통령에게서 인간의 얼굴을 찾아내려는 노력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노동자의 고단한 일상을 목격한 뒤 눈물을 훔치는 자상한 국부의 모습, 때로는 바짓단을 고쳐 입고 구두굽을 갈아 신던 생활인의 면모도 에 비친 박 전 대통령 이미지였다.

지난 30년간 의 박정희 전 대통령 관련 보도의 역사는 곧 ‘박정희 신화’의 역사이기도 했다. 1979년 10월26일 이후 2009년 10월16일까지 가 박 전 대통령의 이름을 한 번이라도 언급한 기사는 모두 3454건이었다. 이 가운데 전체의 93.6%에 이르는 3231건이 김영삼 전 대통령이 취임한 1993년 2월 이후 보도됐다. 10·26 이후 13년간 그의 이름을 지면에 거의 올리지 않았던 가 문민정부 출범 이후 본격적으로 ‘박정희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 것이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이야기만 다룬 기사로 범위를 좁혀도 사정은 비슷했다(표 참조).

문민정부 이후 의 박 전 대통령 관련 보도가 폭증한 사실은 ‘박정희 신드롬’의 탄생을 설명하는 유용한 단서다. 문민정부 후반기 김영삼 전 대통령의 인기는 바닥이었다. 김 전 대통령의 인기가 내려갈수록, 대중은 잠시 잊혀졌던 ‘박통’(박정희 전 대통령)을 떠올렸다. 정해구 성공회대 교수(사회과학부)는 박정희 신드롬이 문민정부 시절 ‘무능한’ 현직 대통령과 대비되는 강력한 리더십의 ‘유능한’ 전직 대통령에 대한 기억의 형태로 등장했다고 지적했다. 그는 에서 “박정희 신드롬의 등장은 직접적으로는 김영삼 정부의 실정에서 비롯된 민주주의의 약화 또는 위기 속에서 이뤄졌고, 그 등장 이후 기득권층에 의해 의도적으로 지지되면서 우리 사회에 영향력을 확대했다”고 말했다.

1995년 ‘훌륭한 지도자’ 여론조사 본격 시작

대중의 평가가 극명하게 엇갈리는 두 명의 전·현직 대통령을 대비시키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여론조사였다. 가 역대 대통령 가운데 가장 훌륭한 지도자를 묻는 방식의 여론조사를 본격적으로 하기 시작한 것이 이때부터였다. 는 1995년 3월5일 ‘가장 훌륭한 정치 지도자는 누구입니까’를 묻는 여론조사를 시작으로, 박정희 전 대통령이 존경받는 지도자 1위로 꼽힌 여론조사 결과를 빠짐없이 소개했다. 가 직접 실시한 여론조사도 있었고, 1997년 5월26일 ‘변호사들 52% 지지로 박정희 압도적 1위’ 기사처럼 다른 기관의 여론조사 결과를 빌리기도 했다. 박 전 대통령에 대한 대중의 기억이 희미해질 때면 는 어김없이 그가 ‘존경받는 대통령 1위’라는 사실을 각인시켰다.

박정희 전 대통령 관련 각종 기획은 가 특히 공들인 작업이었다. 1994년 10월 조선일보사 출판국은 라는 책을 펴냈다. 박 전 대통령 재임 당시 비서실장을 지냈던 김정렴씨 등이 필자로 참여했다. 김씨 등은 박 전 대통령이 국민의 의식주를 해결함으로써 최소한 먹고살 수 있는 ‘인권’을 보장했고, 민주주의를 거부했다기보다 잠시 유보한 대통령이라고 강조했다.

< 조선일보 >에 등장한 박정희 전 대통령 관련 기사

< 조선일보 >에 등장한 박정희 전 대통령 관련 기사

1997년 10월부터는 당시 기자로 재직 중이던 조갑제 전 대표의 연재물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가 에 등장했다.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는 1999년까지 3년에 걸쳐 연재됐다. 연재 이후 책으로 나온 의 머리글에는 이런 내용이 나온다. “우리 사회는 다시 상무, 자주정신의 불씨를 꺼버리고 조선조의 문약성으로 회귀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이 복고풍이 견제되지 않으면 우리는 어떻게 될 것인가. 이승만·박정희·전두환 세 대통령의 영도하에서 1류 국가의 문턱까지 갔던 우리나라는 원래의 우리 수준, 즉 3류 국가로 전락할 것이다.”

가장 최근에는 2008년 ‘사진으로 본 건국 60년, 60대 사건’ 기획이 눈에 띈다. 가 꼽은 60대 사건 가운데 박 전 대통령과 관련이 있는 ‘사건’은 23개였다. 사건 중에는 1972년 10월 유신도 선정됐다. 박 전 대통령의 부정적 평가로 연결될 수 있는 사건이었다. 하지만 는 10월 유신에 대해 “이제 대통령은 어떠한 국가기구의 통제도 받지 않는 절대 권력을 지니게 된 반면 대의 민주주의의 정치 원리는 희미해졌다”며 비판적 태도를 취하는 듯하다가도 “이 새로운 체제에서 대통령 박정희는 꼭 하고 싶었던 일을 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새로운 성장산업’의 추진이었다”로 끝맺었다. 는 박 전 대통령 시기에 벌어진 사건 23개 대부분을 그에 대한 긍정적 평가로 연결지었다.

정해구 교수는 “언론·출판 매체들의 (박정희 영웅화) 시도는 박정희 신드롬 확산에 결정적 계기를 제공해주었다”며 “언론·출판 매체들의 이같은 태도에는 상업적 순발력과 결부된 보수주의가 강력하게 작용하고 있었다”고 진단했다.

논란 때마다 여론·독자면 활용

의 여론·독자면은 박 전 대통령에 대한 노골적 ‘찬양’이 빈번히 등장한다는 점에서 주목 대상이다. 특히 박 전 대통령이 논란의 대상으로 떠오를 때마다 는 여론·독자면을 통해 각계 여론을 활발하게 실었다.

국가보안법 폐지와 박 전 대통령의 친일 행적 조사 등이 사회적 논란이 됐던 2004년 여름, 는 박 전 대통령을 옹호하는 독자 의견과 칼럼을 연이어 내보냈다. 그때 에서 등장한 박 전 대통령은 주로 “아시아 각국에서 ‘훌륭한 지도자’로 평가받는 인물”로 소개됐다. 박정희 시대는 “적어도 그 시기를 겪으면서 이 나라 국민들은 보릿고개를 넘어 먹고살 만해졌고, 나도 열심히 노력하면 잘살 수 있고 성공한 사람이 될 거라는 확신”을 가질 수 있던 시기였기 때문에 “천하의 저항세력이 다 ‘유신’을 규탄해도 현 집권세력만은 입을 다물어야” 한다는 식의 주장이 지면에 등장했다.

민주언론시민연합 공동대표를 지낸 김동민 한양대 강사(신문방송학)는 “가 독자나 외부인의 의견을 빌려 자신들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했던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라며 “자신들의 정치적·이념적 목적에 맞게 취사선택하는 독자나 외부인의 의견은 이미 일반적 국민의 여론이라 할 수 없다”고 말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인간적 매력도 가 주목한 대목이었다. 1967년 베트남전쟁 때 박 전 대통령이 존슨 미국 대통령에게 친서를 보내 한국군이 김치를 먹게 해달라고 부탁했다는 일화는 의 주요 관심사였다. 는 박 전 대통령이 진해휴양소에서 배구를 하는 모습, 부인 육영수씨가 사망한 뒤 창밖에 날아오는 새 한 마리를 보고 “내 신세 같다”며 눈물을 닦았다는 소식도 빠뜨리지 않았다.

박 전 대통령이 독일에서 눈물을 흘렸다는 ‘대통령의 눈물’은 보도로 크게 부각됐다. 1964년 12월 독일에 파견된 간호사와 광부를 위로 방문한 자리에서 박 전 대통령이 눈물을 흘렸다는 에피소드였다.

<조선일보>는 1999년 9월16일 ‘대통령의 눈물’ 보도 이후 비슷한 내용을 10여 차례 되풀이해서 내보냈다. ‘대통령의 눈물’은 이후 ‘육사 교장의 편지’ 등으로 재가공됐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2008년 9월 1960년대 파독 광부와 간호사의 임금을 담보로 상업차관을 들여왔다는 이야기는 사실이 아니라고 발표했다(왼쪽). 1969년 10월16일치 <조선일보> 기사. 3선 개헌 국민투표가 실시되기 하루 전이던 이날 <조선일보>는 ‘각계 인사들이 본 성장 한국’ 기사를 내보냈다. 각계 인사의 의견은 똑같았다. 박 전 대통령의 3선 개헌을 지지한다는 것이었다. 사진 (왼쪽) 한겨레 자료

<조선일보>는 1999년 9월16일 ‘대통령의 눈물’ 보도 이후 비슷한 내용을 10여 차례 되풀이해서 내보냈다. ‘대통령의 눈물’은 이후 ‘육사 교장의 편지’ 등으로 재가공됐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2008년 9월 1960년대 파독 광부와 간호사의 임금을 담보로 상업차관을 들여왔다는 이야기는 사실이 아니라고 발표했다(왼쪽). 1969년 10월16일치 <조선일보> 기사. 3선 개헌 국민투표가 실시되기 하루 전이던 이날 <조선일보>는 ‘각계 인사들이 본 성장 한국’ 기사를 내보냈다. 각계 인사의 의견은 똑같았다. 박 전 대통령의 3선 개헌을 지지한다는 것이었다. 사진 (왼쪽) 한겨레 자료

‘대통령의 눈물’ 사실이 아니라는데도…

“결국 대통령은 연설을 마무리짓지 못했다. 본인도 울어버렸기 때문이다. 박정희는 광부들에게 파고다 담배 500갑을 선물로 나눠주고, 돌아갈 차에 올랐다. 차 속에서 흐르는 눈물을 감추려 애쓰는 박정희를 보고, 곁에 앉은 뤼브케 서독 대통령이 자기 호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박정희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2003년 9월3일치 는 1964년 독일에서 있었던 일을 생생히 묘사하고 있다. 일주일 뒤인 9월10일 똑같은 이야기가 기사로 다시 등장했다. 는 당시 한국 정부가 이들의 급여를 담보로 독일에서 상업차관을 들여왔기 때문에 경제개발5개년계획을 추진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대통령의 눈물’ 일화는 2006년 11월 이수길 박사의 증언을 통해 상당 부분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 이 박사는 간호사 독일 파견의 산파 역할을 했던 인물이다. 그는 2006년 11월 등과의 인터뷰에서 “독일 차관은 1961년 12월 재건 차관 명목으로 집행됐는데, 이건 장면 정권 때부터 추진된 것”이라며 “1964년 박정희 대통령이 서독에 왔을 때 환영 나온 광부와 간호사를 보고 눈물을 흘리자 뤼브케 당시 서독 대통령이 눈물을 닦아주며 도와주겠다고 약속했다는 일화도 사실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는 1999년 9월16일 ‘대통령의 눈물’부터 2008년 7월2일 ‘탄광에서 울어버린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같은 내용의 기사를 10여 차례 계속 내보냈다.

의 보도는 2004년 ‘육사 교장의 편지’ 등으로 재가공되기도 했다. 김충배 전 육사 교장이 가 소개한 ‘대통령의 눈물’ 일화를 편지 형식으로 만든 것이었다. 육사 교장의 편지는 조갑제 전 대표의 홈페이지 등을 통해 인터넷에서 큰 인기를 얻었다. 육사 교장의 편지가 인기를 얻고 있다는 소식은 다시 에 소개됐다. 여러 사람의 입을 거치면서 대통령의 눈물은 더욱 극적으로 채색됐다.

2008년 9월23일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1960년대 파독 광부와 간호사의 임금을 담보로 상업차관을 들여왔다는 이야기가 사실이 아니라고 발표했다. 간호사와 광부의 급여를 담보로 차관을 들여온 뒤 박 전 대통령이 미안함과 서러움에 못 이겨 눈물을 흘렸다는 이야기도 원인무효가 됐다. 하지만 2008년 12월 뉴라이트 계열 교과서포럼(공동대표 박효종)은 광복 이후 한국 현대사를 서술한 교과서 (기파랑 펴냄)에 ‘대통령의 눈물’ 일화를 소개했다.

오유석 성공회대 교수(민주주의연구소)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개인적 매력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점에서 의 일부 박 전 대통령 관련 보도는 역사라기보다 영웅주의의 기록에 가깝다”고 말했다.

지난 30년간의 보도가 등 다른 보수 언론과 비교할 때, 아주 특별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박 전 대통령을 향한 의 태도에 유독 눈길이 가는 것은 그 둘의 오랜 관계와 무관하지 않다.

와 박 전 대통령의 끈끈한 관계는 박정희 정권 초기에 이미 형성됐다. 방우영 명예회장의 회고다. “박정희 대통령이 뜻밖의 제안을 해왔다. 호텔을 지으면 어떻겠느냐는 것이었다. (중략) 1965년 어느 날 방일영 회장이 청와대 오찬에 초대받아 갔다가 박 대통령으로부터 직접 이런 제안을 받았다. 하지만 신문사 형편으로는 고층 호텔을 지을 여력이 없었다. 방 회장이 난색을 표하자 박 대통령은 ‘일본에서 들여오는 민간차관 중 일부를 할당해주겠다’며 호텔 건축을 강력히 권유했다. 그렇게 해서 정부의 지급보증으로 일본에서 400만달러 민간차관을 들여와 코리아나 호텔을 짓게 됐다.”()

박 전 대통령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방 명예회장의 표현대로 는 ‘현금 한 푼 없이’ 당시 서울에서 제일 높은 호텔을 소유할 수 있었다.

는 박 전 대통령의 3선 개헌과 유신 개헌을 찬양하는 것으로 보답했다. 3선 개헌 국민투표가 실시되기 하루 전인 1969년 10월16일치 는 ‘각계 인사들이 본 성장한국’ 기사를 내보냈다. 대학총장과 영화배우, 탤런트 등 11명의 의견을 모은 기사였다. 11명의 ‘각계 인사’ 의견이란 한결같이 개헌을 지지한다는 것이었다.

1972년 10월18일치 는 사설 ‘평화통일을 위한 신체제’에서 10월 유신을 가리켜 “앞으로의 보다 보람되고 영광스러운 삶을 얻기 위하여 진정 알맞은 조치임을 기쁘게 생각”한다고 밝혔다. 유신이 선포된 다음날이었다.

박 전 대통령과 맺은 관계는 의 사세 확장에 결정적 기여를 했다. 방우영 명예회장의 기억에 따르면, 박정희 정권 초기인 1962년 10만 부가 채 안 됐던 의 발행부수는 1970년대 초 30만 부 이상으로 올라가며 를 추월했다. 가 100만 부 돌파를 선언한 것은 1979년 3월5일이었다. 박정희 정권 말기였다.

1962년 10만 부, 1979년 100만 부 돌파

신홍범 전 조선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조선투위) 위원장은 “가 박정희 시대를 긍정적으로만 보는 것은 역사와 사회를 퇴행적으로 보는 그들의 보수적 관점 때문이기도 하지만 지난날 군사독재에 협력했던 역사적 죄과와도 무관하지 않다”며 “박정희 시대를 정당화하거나 미화해 그 체제 아래에서 자신이 저지른 과오를 원인무효로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조선투위는 1974년 12월부터 1975년 3월까지 의 유신체제 홍보에 항의하다 해직된 기자 32명이 구성한 단체다. 조선투위는 1975년 여름 서울지방법원에 부당해고 무효확인 청구소송을 내며 회사를 상대로 한 투쟁에 나섰다. 는 아직까지 이들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최성진 기자 csj@hani.co.kr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