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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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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자가당착

김내훈씨의 “정치 혐오 부추긴 정치평론” 글에 대한 비판… 약자 배제 않는 한 정치적 의견은 최대한 용인돼야
등록 2024-05-03 12:23 수정 2024-05-09 09:37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련) 본부와 수원, 인천 등 지역 경실련 활동가들이 2024년 2월21일 서울 종로구 경실련 강당에서 거대 양당의 위성정당 방침 철회를 촉구하고 있다. 한겨레 김혜윤 기자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련) 본부와 수원, 인천 등 지역 경실련 활동가들이 2024년 2월21일 서울 종로구 경실련 강당에서 거대 양당의 위성정당 방침 철회를 촉구하고 있다. 한겨레 김혜윤 기자


이 글은 반론이 아니라 ‘세미나’다. 반론이라는 건 유의미한 쟁점이 있을 때나 가능한 것이다. 지금부터 언급할 글에는 그런 게 없다. 그럼에도 쓰는 이유는 잘만 활용하면 많은 이에게 교보재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문제의 글은 <한겨레21> 제1511호에 실린 칼럼니스트 김내훈씨의 글 ‘‘뇌피셜’ 정치평론은 무엇을 남겼나'이다. 

수년 동안 기자와 프로듀서를 준비하는 대학생들, 그리고 논리적인 글을 쓰고 싶은 시민을 대상으로 글쓰기 세미나를 한 적이 있다. 수업에서는 주요 매체에 실린 칼럼 중 잘 쓴 글 두 편, ‘반면교사’ 글 두 편을 소개했다. 여기서 ‘반면교사’는 엉망진창인 글이라기보다 문장 꼴은 갖추고 있어 얼핏 그럴듯하게 들리지만 어딘가에 치명적 문제가 있는 글이다.

‘민주당 압승=좋은 결과’라는 확신

유명한 칼럼으로 예를 들면 <조선일보> 한현우 기자의 칼럼 ‘간장 두 종지’가 있다. 필자가 회사 인근 중국집에 갔는데 간장을 각자 하나씩 주지 않고 두 명당 하나만 줬다고 역정을 내는 내용이다. 마지막 문장은 다음과 같다. “그 식당이 어딘지는 밝힐 수 없다. ‘중화’ ‘동영관’ ‘루이’는 아니다.” 그 칼럼에 대해 내 수업의 학생들은 “지면 사유화와 언론 갑질”이라고 평했다.

이번에 <한겨레21>에 실린 ‘‘뇌피셜’ 정치평론은 무엇을 남겼나’는 딱 ‘간장 두 종지’ 같은 ‘반면교사’다. 필자는 글에서 엄경영, 최병천, 박권일, 진중권 네 명을 맹비난한다. 김씨에 따르면 이 네 명은 “논객, 정치비평가를 참칭하는 사람들”로 “무근거한 억측”을 일삼고, “선명한 진보를 표방한답시고 유권자를 탓하고” “선거 자체의 가치마저 부정하며 정치 무관심과 정치 혐오를 부추긴” 자들이다.

처음 김씨 글을 읽고, 평생 모일 일 없을 네 사람이 같이 묶인 게 신기했다. 정치 성향이 그야말로 천차만별이기 때문이다. (누군가에겐 진중권씨와 박권일이 동류이겠으나 애초 서로 입장이 꽤 달랐을 뿐 아니라 윤석열 정권 들어선 더욱 그렇다.) 그러나 저들 네 명에겐 결정적인 공통점이 있다. 더불어민주당이 이긴 4·10 총선 결과에 대해 정반대로 예상하거나 평가 절하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바로 이 점이 김내훈씨에게 도저히 용납이 안 됐던 것일지 모른다. “좋은 결과”임이 분명한데, 이걸 저렇게 말한다고?

그렇다. 김내훈씨의 글 전체에 암묵적으로 깔린 대전제가 이것이다. 민주당 압승=‘좋은 결과’. 박권일의 칼럼에 대해 쓴 부분만 봐도 이런 생각이 명확히 드러난다. 김씨는 이렇게 말했다. “한국 사회에 거대한 퇴행을 몰고 오는 세력을 견제하고 축출하기 위해 그것을 잘해낼 것으로 보이는 정당에 투표하는 것이야말로 고도의 합리적 계산” “자기 진단이 옳았음을 고수하기 위해 백 보 전진이 아니면 모두 소용없다며 일 보 전진에 훼방만 놓는 자들의 말로는 정해져 있다.”

다른 정치평론을 비판하는 글의 모순

“말로가 정해져 있다”니, 이거야 원 무서워서 살겠는가. 아무튼 민주당 지지자와 그 위성정당 가담자들, 민주당에 우호적인 부동층에 민주당의 총선 압승은 당연히 ‘좋은 결과’가 맞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기껏해야 ‘부족적 진리’일 뿐 불변의 진리가 아니다. 대한민국에는 민주당에 적대적인 사람, 비판적인 사람, 무관심한 사람이 민주당 지지자보다 많음을 명심해야 한다. 게다가 민주당은 스스로 비판해온 위성정당이라는 협잡을 이번 총선에서 또다시 저질렀다. “일 보 전진”은커녕 정치에 대한 냉소와 절망을 불러온 ‘백 보 후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이념을 떠나 민주주의의 퇴행이라는 평가가 적지 않았다. 그럼에도 ‘민주당 압승은 좋은 결과’라는 주관적 확신을 아무런 논증 없이 전제해버리니, 그런 글에 좀처럼 논리라는 게 생기기 어렵다.

김씨는 또 이런 말도 했다. “박권일은 <한겨레>에 게재한 ‘‘300 대 0’의 의미’라는 글에서 진보당 등은 보수 기득권이 주도한 위성정당에 붙었기 때문에 진보라고 할 수 없다는 식으로 말한다. 그렇게 궁색한 이야기를 할 거면 차라리 처음부터 부르주아 선거제도에 참여하는 세력은 죄다 진보가 아니라고 말하는 게 맞는다고 생각한다.”

제도에 이미 존재하는 개혁성을 무력화하려는 시도에 반대하는 것은 진보정당의 최소 요건이다. 참고로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은 2024년 3월 위성정당인 국민의미래·더불어민주연합의 정당등록은 위헌이라며 헌법소원을 제기했다. 진보는 과정과 결과가 서로 닮아야 한다. 제도권 내에서의 개혁을 지향하는 진보정당은 말할 것도 없다. 아무리 진보적인 정책도 민주적 과정 위에서야 비로소 빛을 발하는 법이다. 김내훈씨는 ‘모 아니면 도’로 치닫는다. 말인즉, ‘위헌적 편법에 반대해야 진보라면 처음부터 부르주아 선거제도에 참여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쯤 되면 ‘좌익 소아병’을 능가하는 ‘민주당 중2병’ 아닌가.

앞서 <조선일보> ‘간장 두 종지’ 칼럼이 “지면 사유화와 갑질”이라면 김내훈씨 글은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 한마디로 ‘자해 논변’, 즉 자기 칼로 제 목을 친 주장이다. 무근거한 정치평론을 준열히 성토하긴 하는데, 놀랍게도 본인 글이 정확히 거기 해당한다. 주관적 단정, 인상비평만 늘어놓을 뿐 정작 근거와 논리가 희박하다.

정치적 의견은 최대한 용인돼야

문제는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관점에 따라선 이게 가장 심각한 지점이라 할 수 있다. 다음은 김씨 글의 마지막 문장이다. “이번 선거를 필두로 정치권의 본격적인 재편을 요구할 수 있듯 평론계에도 대대적 재편이 이뤄져야 할 것이다.” 김내훈씨는 대체 본인이 뭐라고 생각하는 걸까? 평론가들이 선출직 정치인인가? 제 마음에 들지 않는 얘기를 한다고 남의 지면을 빼앗아도 된다고 생각하는 걸까? ‘우리의 정답’에 부합하지 않으면 발언권을 제한해야 한다고 여기는 점에서 이는 파시스트적이고 홍위병적인 발상이다. 약자를 차별하고 배제하지 않는 한, 정치적 의견은 최대한 용인돼야 한다. 그게 민주 공화정의 기본 원칙이다. 김내훈씨는 이 준칙을 깊이 새기고 잘못을 반성하기 바란다.

박권일 독립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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