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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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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인 시장이 떠난 자리, 관료 불도저가 나타났다

박원순 전 시장 사후 관료들 “관성에 따라 기계적으로 중요 정책 밀어붙여”
‘친환경’ 신곡보 개방은 예산 삭감, ‘개발주의’ 광화문광장은 공사 강행
등록 2020-11-22 12:15 수정 2020-11-26 01:44
‘광화문광장 재구조화 졸속 추진 중단을 촉구하는 시민사회단체’가 11월16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공사 중단을 요구하고 있다. 연합뉴스

‘광화문광장 재구조화 졸속 추진 중단을 촉구하는 시민사회단체’가 11월16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공사 중단을 요구하고 있다. 연합뉴스

박원순 전 서울시장이 생전에 역점을 두고 추진하던 서울시 사업들의 운명이 엇갈리고 있다. 선출직인 박 전 시장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면서 서울시 행정권을 장악한 관료들이 예산 편성 등으로 주요 사업의 미래를 결정하는 탓이다.

2011년부터 주요 사업으로 손꼽혔던 ‘신곡수중보 개방·철거를 통한 한강 복원’ 사업은 관련 예산이 거의 잡히지 않아 급제동이 걸렸다. 2021년 상반기로 계획된 신곡보의 1단계 개방(수위 70㎝ 낮춤)은 사실상 물 건너갔다는 분석이 나온다. 반면 박 전 시장이 전면 재검토를 선언했던 ‘광화문광장 재구조화’ 사업은 서울시가 11월16일 전격 착공했다. 2021년 4월 취임하는 새 시장에게 결정권을 넘기라는 시민단체들의 의견에도 서울시는 공사를 강행하고 있다.

신곡보 개방 예산 129억원→ 4억원

신곡보의 경우, 박 전 시장이 생전에 1단계 개방 방침을 결정했지만 현재는 사업 자체가 무산 위기에 놓였다. 애초 129억원으로 계획된 내년 예산이 기획조정실 예산담당관을 거치면서 대부분 삭감되고 준설 설계 예산 4억원만 잡혔기 때문이다. 129억원은 한강 수위가 내려가면 바닥에 닿을 위험이 있는 수상시설 밑 준설과 이전 설치 예산이다. 신곡보 개방을 위해선 반드시 반영돼야 하는 예산이다.

이렇게 예산이 삭감된 이유에 대해, 서울시 김재겸 물순환정책과장은 “신곡보 개방을 위한 조건으로 보 관리 규정 개정이 있었는데, 그게 이뤄지지 않았다. 또 코로나19 대응으로 내년 예산에 여유가 없어 신규 예산 편성이 쉽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러나 서울시 김태명 예산담당관은 “코로나19 대응이 우선순위이기는 하지만, 신곡보 사업에 대한 찬반 논란이 커서 잡히지 않은 것 같다”고 했다.

신곡보 개방 사업을 이끌어온 서울시 신곡수중보 정책위원회의 염형철 위원(사회적협동조합 한강 대표)은 “박 전 시장이 정해놓은 계획을 서울시가 뒤집었다. 공무원들이 시대에 뒤떨어진 개발주의에 사로잡혀 한강 복원 사업을 집행하지 않고 있다”고 비판했다. 신곡보의 소유 기관인 국토교통부 김보현 하천계획과장도 “관리 규정은 신곡보 관리 기관인 서울시가 개정해도 된다. 아직 서울시가 의사결정을 못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반대로 박 전 시장이 2019년 9월 전면 재검토, 2020년 5월 사업 중단 의사를 밝힌 ‘광화문광장 재구조화’ 사업은 박 전 시장 사후 일사천리로 추진되고 있다. 서울시는 한가위를 앞둔 지난 9월28일 기자설명회도 없이 ‘사업 추진’ 보도자료를 뿌렸다. 그러더니 시민단체와 시 의회의 반대 움직임이 본격화하자 11월16일 보도 예정표에도 없던 ‘공사 시작’ 기자설명회를 열고 그날부터 공사에 들어갔다. 정상택 서울시 광화문광장추진단장은 “그동안 모든 절차를 밟았고, 박 전 시장도 서울시 내부 회의에서 이 사업의 추진을 결정했다”고 주장했다.

5개월 뒤 결정해도 늦지 않지만

11월16일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걷고싶은도시만들기시민연대(도시연대), 서울시민연대, 서울시민재정네트워크, 행정개혁시민연합 등 9개 시민단체들은 기자회견을 열어 “서울시 사업계획엔 공론화 과정에서 제안된 시민단체의 의견이 거의 반영되지 않았다. 5개월 뒤 새 시장이 취임하니 그때 결정해도 늦지 않다. 서울시 스스로 금지한 겨울철 공사까지 강행해선 안 된다”고 주장했다. 시민단체 활동가들은 이날 공사가 벌어지던 광화문광장에서 공사 중단을 요구하며 시위도 벌였다. 이날부터 언론매체들의 기사가 쏟아졌다.

서울시의회 조상호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는 <문화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서울시에 이 사업을 중단하라고 촉구하고 내년에 반영된 관련 예산 삭감을 추진하겠다. 코로나19 사태로 서울시 재정이 어렵고 시장도 부재한 상황에서 시민사회 다수가 반대하는 사업을 일방적으로 추진해서는 안 된다”고 밝혔다.

11월17일 야당의 잠재적인 서울시장 후보들인 국민의힘 소속 오세훈 전 서울시장과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 등은 모두 광화문광장 공사 강행에 반대했다. 안 대표는 “대행 체제가 명분 없이 밀어붙인다면 책임을 반드시 물어야 한다. 차기 시장이 뽑히면 새 체제에서 결정하는 것이 맞다”고 주장했다. 진보정당인 정의당도 “서울시는 무리한 착공을 중단하고, 미래의 광장을 위한 대화에 먼저 나서라”고 요구했다. 여당 쪽은 이 문제를 별로 언급하지 않고 있다.

시민단체 활동가들은 서울시 관료들이 선출직 시장이 해야 할 일에까지 나선다고 비판했다. 김은희 도시연대 정책연구센터장은 “공무원들은 절차만 밟으면 문제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시민 의견 반영과 시민의 동의다. 그게 정책에 없다면 행정 독재, 행정 편의주의가 된다”고 말했다.

궐위 때 정책 연속성 유지할 방법은

전상봉 서울시민연대 대표는 “선출직 시장이 없는데도 관료들이 관성에 따라 기계적으로 중요 정책을 밀어붙인다. 광화문광장의 상징성을 이해하지 못한 채 보수적인 내용으로 추진하고 있다. 이렇게 사실상 관료들이 결정하고 집행하면 나중에 시민들이 책임을 묻기도 어렵다”고 비판했다.

정치-행정 분리라는 현대 민주주의 정치의 보편적 원칙에서 보면 직업공무원은 의사결정 주체가 돼서는 안 된다는 게 전문가들 지적이다. 지방자치단체장의 궐위 때 정책 연속성을 유지하고 선거 비용을 낭비하지 않으려면 새로운 제도를 검토할 필요가 있다는 제언도 나온다. 오재록 전주대 교수(행정학)는 “지방자치단체장의 궐위 때 그 권한과 책임을 그대로 승계할 수 있는 ‘러닝메이트 부단체장’ 같은 제도를 생각할 필요가 있다. 정책의 안정성과 일관성, 재보궐선거 비용 차원에서도 바람직하다. 단체장의 궐위 때 정무 부시장이 아니라 행정 부시장이 대행을 맡는 제도도 합리적이지 않다”고 말했다.

김규원 기자 ch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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