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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복무 중 난청에 “20년 전 소음 피해, 직접 입증하라”

2019~2020년 장애인 인권에 악영향 미친 판결들
등록 2021-04-24 14:44 수정 2021-04-29 02:25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인권의 최후 보루.’ 법원은 이렇게 불린다. 사회에서 떠밀리고, 떠밀리다 법정으로 넘어온 장애인 인권 사건에서 법원은 제구실을 다했을까.
시민단체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는 2015년부터 매해 장애인 인권에 디딤돌·걸림돌이 된 판결을 선정해 발표해왔다. 재판을 통한 장애인의 권리 구제가 얼마나 진전되고, 또 후퇴하는지 거시적 관점에서 파악하기 위한 ‘사법 모니터링’이다.
판결 선정 작업에 4개월 가까이 걸렸다. 2019년 7월~2020년 6월 장애를 언급한 판결 120여 개를 수집해 선별했다(1차 선정). 장애·인권·법률 전문가로 구성된 선정위원 8명이 두 차례 회의를 거쳐 다시 옥석을 가려냈다(2차 선정). 그렇게 디딤돌(5건), 걸림돌(4건), 주목할 만한 판결(5건) 등 모두 14개의 판결이 추려졌다. 주목할 만한 판결은 디딤돌이나 걸림돌로 구분하기 어렵지만 장애인 인권과 관련해 많은 고민을 하게 한 판결이다.
<한겨레21>은 이 사업에 동행했다. 2021년 장애인의 날(4월20일)을 맞아 장애인 인권 증진에 기여하거나 역행한, 또는 생각할 거리를 남긴 판결을 소개하고 이주언·정규석·최정규·최갑인·표경민 변호사가 작성한 선정 이유를 정리해 전달한다. 흩어져, 묻히거나, 잊힌 판결을 따라가다보면 장애인권의 현주소가 보일 것이다.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는 5월 ‘2021 장애인 인권, 디딤돌·걸림돌 판결 선정 보고회’를 연다. _편집자주
걸림돌 ①
군복무 중 청력 나빠졌는데도(대전고법 2019누10557)

ㅁ씨는 청각장애인(3급)이다. 그는 2002년 해군에 입대해 함포사격 훈련을 받다 소음성 난청을 얻었다. 결국 양측 감각신경성 난청 진단을 받고 이듬해 의병 전역했다. 그는 충남동부보훈지청에 국가유공자로 등록해달라 신청했지만, 국가유공자도 보훈대상자도 해당되지 않는다며 신청이 반려됐다. 2020년 5월 대전고법 행정2부(재판장 신동헌)는 ㅁ씨가 보훈대상자에 해당한다고 본 원심을 취소했다. ㅁ씨가 입대 뒤 지속해서 큰 소음에 노출됐다는 점을 입증해야 하는데 이 점이 충분치 않다고 했다. 이 판결은 심리불속행으로 대법원에서 확정됐다.

법원이 ㅁ씨에게 지나치게 엄격한 입증책임을 요구한 것은 아닐까. ㅁ씨가 약 20년 전에 이뤄진 군복무 사실과 장애의 인과관계를 현시점에서 적극적·구체적으로 입증하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 입대 전 청력검사에서 이상이 발견되지 않았고 군복무 과정에서 직무수행 외에 특별한 사건이 없었다면, ㅁ씨의 군복무 중 직무수행과 청각장애 사이에 상당한 인과관계를 인정하는 수준으로, 입증책임 정도를 완화해야 했다.

그럼에도 법원은 다소 객관성이 떨어지는 근거로 군복무와 장애의 인과관계를 부인했다. ㅁ씨 피해는 2002년 발생했다. 그러나 법원은 ㅁ씨 군복무 시점에서 무려 17년이나 지난 2019년, 함포사격 훈련 받는 군인들에게 귀마개 등이 지급되고 있다는 점을 들어 ㅁ씨가 군복무를 할 때도 청력 보호 장비가 지급됐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적절한 판단인지 의문이다.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걸림돌 ②
점형블록, 손잡이는 건물 구조 아니다? (대전고법 2020누10089)

건물을 세우는 데도 여러 조건이 있다. 장애인등편의법(장애인·노인·임산부 등의 편의증진 보장에 관한 법률)에 따라, 건축의 출입구 바닥에 문턱을 두면 안 되고, 출입문 손잡이는 바닥에서 0.8~0.9m 높이에 달려야 하며, 주요 출입구에는 점형블록을 설치해야 한다. 대전에 세워진 한 건물은 이런 규정을 위반했고, 대전광역시 유성구청은 건설기술진흥법상 부실공사에 준하는 벌점을 건설사에 부과했다. 건설사는 행정소송을 냈다.

2020년 8월 대전고법 행정1부(재판장 문광섭)는 원심을 뒤집고 건설사 손을 들어줬다. 건설기술진흥법상 ‘기타 구조부’란 사이 기둥, 최하층 바닥, 차양, 옥외 계단 등으로 건축물의 일부를 말한다며, 출입문 손잡이, 점형블록은 여기에 해당하지 않고 건축물 구조의 일부를 이룬다고 보기 어렵다고 ‘해석’했다.

법원은 장애인차별구제 소송 사건에서 “현행법상 어쩔 수 없다”며 상대방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일 때가 많다. 장애인등편의법도 완전하지 않다. 적용 범위를 한정하고, 적용 시기도 건축연도에 따라 제한된다. 그러나 이 판결을 살펴봤을 때 과연 법‘만’ 문제이고, 법을 해석하는 법원은 잘하는지 의문이다.

법원은 판결문에서 건물이 반드시 갖춰야 할 시설인 ‘구조부’에 장애인등편의법상 문턱, 출입문, 손잡이, 점형블록은 포함되지 않는다고 봤다. 기능적 필요에 따라 설치해야 할 문턱, 출입문, 손잡이, 점형블록도 건물이 갖춰야 할 ‘구조’로 해석될 여지가 충분한데 말이다. 그럼에도 이 판결은 ‘물리적 구조’만 구조부라고 좁게 해석해, 행정청의 적극적인 행정을 가로막았다.

“미등록 장애인까지 포함하면 국민 5명 중 1명은 여러 장애를 안고 산다. 이 1명에게 반드시 필요한 낮은 문턱, 출입문 손잡이, 점형블록 등이 건물의 필수 구조가 아니라는 법원 판결은 장애인권의 걸림돌이라 할 만하다.”(최정규 원곡법률사무소 변호사)

걸림돌 ③
휠체어 못 타는데, 콜택시도 제한 (수원지법 성남지원 2019가합404160)

ㅂ씨는 뇌병변 3급 장애인으로, 누가 부축해주지 않으면 걸을 수 없고 경련과 어지러움 때문에 휠체어도 못 탄다. 그는 경기도 성남시에 장애인복지콜택시를 이용할 수 있게 해달라고 했지만, 성남시는 자격요건(휠체어 이용 등)에 해당하지 않는다며 요청을 거부했다. 2019년 장애등급제 폐지로 그는 장애인복지콜택시를 이용할 수 있게 됐지만, 과거 2년여간 성남시의 차별 행위에 대해 손해배상 소송을 냈다. 성남시가 휠체어를 탈 수 있는 장애인과 그렇지 못한 장애인을 차별했다고 주장했다.

2020년 2월 수원지법 성남지원 민사2부(재판장 이기선)는 ㅂ씨 청구를 기각했다. 법원은 관련 법(장애인차별금지 및 권리구제 등에 관한 법률)이 규정한 이동 수단에서의 차별금지는 장애인과 비장애인 사이의 차별을 의미하지, 장애인과 장애인 사이의 불평등을 의미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당시 장애인복지콜택시는 휠체어 이용 장애인에게 지원되는 교통수단이고 ㅂ씨와 유사한 장애가 있는 장애인도 똑같이 콜택시 이용을 제한했다는 점에 비춰 성남시 처분이 차별은 아니라는 취지다.

교통약자법과 성남시 조례에 따르면, ㅂ씨는 장애인복지콜택시 이용 대상자에 해당한다. 그럼에도 법원은 성남시가 조례와 별개로 정한 요건(휠체어 이용 여부)에 따라 콜택시 이용을 거부한 것이 성남시의 합리적 재량 범위 내에 있다고 판단했다.

“이동권은 장애인권의 주요 화두다. 그럼에도 지자체마다 통일된 기준이 없다. 교통수단 지원에 대한 장애인 간 균형 문제도 있다. 장애인 이동권을 위해 나아가야 할 길은 아직 먼데, 이 판결은 그 길에 걸림돌 하나를 놨다.”(표경민 법무법인 디라이트 변호사) 결국 항소심은 이 판결을 취소하고 성남시의 차별 행위를 인정했다.

걸림돌 ④
직접 농사 못 짓는 장애인, 세금 혜택에서 제외? (부산고법 2019누23234)

토지 소유자인 ㅅ씨(지체장애 5급)는 어머니와 동생이 ㅅ씨의 땅을 경작하는 방식으로 토지를 운영했다. 조세특례제한법(제69조 1항)에 따르면, 농지 소유자가 직접 경작한 토지를 양도하면 양도소득세를 감면받을 수 있다. ㅅ씨는 자신과 같은 장애인은 직접 논밭을 갈고 수확할 수 없어 이 규정의 혜택을 받을 수 없고, 이는 헌법 제11조 평등 원칙에 위배된다며 양도소득세 취소 소송을 냈다. 2019년 12월 2심 법원은 1심에 이어 ㅅ씨 청구를 기각했다.

1심을 살펴보면, 직접 경작하는 토지의 양도소득세를 감면하는 이유는 전근대적인 소작 제도를 청산하고 경자유전(농사짓는 자가 농지를 소유해야 한다) 원칙에 따라 농업과 농촌을 활성화하는 데 있다. 조세 법규를 법문대로 해석하는 법원의 태도도 이해할 부분이 있다.

그러나 이 사건처럼 경자유전 원칙을 장애인에게 일률적으로 적용해 조세 감면 혜택을 배제하는 건, 직접 경작이 불가능한 장애인 처지에선 이해하기 어렵다. 입법이 미비한 영역이다. 경자유전 원칙은 비장애인만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현재 비장애인만을 전제로 한 조세특례제한법에 아쉬움을 담아 걸림돌 판결로 선정했다.

정리 고한솔 기자 sol@hani.co.kr

*특집-장애인 인권 판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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