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단체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는 2015년부터 매해 장애인 인권에 디딤돌·걸림돌이 된 판결을 선정해 발표해왔다. 재판을 통한 장애인의 권리 구제가 얼마나 진전되고, 또 후퇴하는지 거시적 관점에서 파악하기 위한 ‘사법 모니터링’이다.
판결 선정 작업에 4개월 가까이 걸렸다. 2019년 7월~2020년 6월 장애를 언급한 판결 120여 개를 수집해 선별했다(1차 선정). 장애·인권·법률 전문가로 구성된 선정위원 8명이 두 차례 회의를 거쳐 다시 옥석을 가려냈다(2차 선정). 그렇게 디딤돌(5건), 걸림돌(4건), 주목할 만한 판결(5건) 등 모두 14개의 판결이 추려졌다. 주목할 만한 판결은 디딤돌이나 걸림돌로 구분하기 어렵지만 장애인 인권과 관련해 많은 고민을 하게 한 판결이다.
<한겨레21>은 이 사업에 동행했다. 2021년 장애인의 날(4월20일)을 맞아 장애인 인권 증진에 기여하거나 역행한, 또는 생각할 거리를 남긴 판결을 소개하고 이주언·정규석·최정규·최갑인·표경민 변호사가 작성한 선정 이유를 정리해 전달한다. 흩어져, 묻히거나, 잊힌 판결을 따라가다보면 장애인권의 현주소가 보일 것이다.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는 5월 ‘2021 장애인 인권, 디딤돌·걸림돌 판결 선정 보고회’를 연다. _편집자주
투렛증후군이 있는 ㄱ씨는 일상생활에서 어려움이 많았다. 앉아서 일하거나 타인과 대화하기 어려웠고, 폐쇄 공간에선 그 증상이 심해져 차 타고 장시간 이동하는 것조차 힘들었다. ㄱ씨는 경기도 양평군에 장애인복지법에 따른 장애인으로 등록해달라고 신청했지만 장애인복지법 시행령이 정하는 15가지 장애 유형에 투렛증후군이 해당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장애인 등록을 거부당했다. 2019년 10월 대법원 3부(주심 조희대)는 양평군의 상고를 기각하고 ㄱ씨 손을 들어준 원심을 확정했다.
ㄱ씨 상태를 살펴본 법원은 ㄱ씨가 장애인복지법에서 규정하는 장애인이 맞다고 봤다. 장애인복지법(제2조 1항)에 따르면, 장애인은 신체적·정신적 장애로 오랫동안 일상생활이나 사회생활에서 상당한 제약을 받는 자를 말한다. 모법 취지상 장애인이 분명한데도, 시행령에 규정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장애인 등록에서 배제하는 건 법 취지에 정면으로 어긋난다. 법원은 양평군이 시행령에서 투렛증후군과 가장 유사한 장애 유형을 찾고 유추 적용해 모법의 취지를 최대한 살려야 한다고 지적했다.
특정 장애가 시행령에 명시적으로 규정돼 있지 않더라도 장애인복지법상 장애에 해당한다면 장애인 등록을 거부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는 점에서 의미 있다. “법조문에 갇히지 않고 당사자가 겪는 사회 참여의 어려움까지 법원이 폭넓게 살폈다. 장애 유형에 해당되지 않는다고 소외받은 이들에게 한 줄기 빛과 같은 판결이다.”(김강원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사무국장)
ㄴ씨는 신체검사 1급 판정을 받고 2006년 육군에 입대했지만 군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어지러움, 환청, 피해망상을 겪었다. 군의관은 ‘경도의 우울, 불안으로 4주 이상 관찰과 약물치료가 필요하다’는 소견서를 냈지만 별다른 치료는 이뤄지지 않았다. ㄴ씨는 전역 뒤 7개월이 지나 조현병 진단을 받았고 치료를 반복하다 2016년 결국 숨졌다. ㄴ씨의 아버지는 국가유공자 등록을 신청했지만, 충북남부보훈지청은 ㄴ씨가 국가유공자도 보훈대상자도 아니라고 판단했다. 2019년 9월 대전고법 청주재판부 행정1부(재판장 지영난)는 원심을 뒤집고 ㄴ씨가 보훈대상자에 해당한다고 판결했다.
재판 과정에서 ㄴ씨 진료 기록을 감정한 의사는 조현병과 군복무의 연관성을 발견하지 못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법원은 별다른 정신질환이 없었던 사람이 병영생활에 적응하지 못해 정신질환이 악화하고 조현병이 발생했다면, 조현병과 군복무의 상당한 인과관계가 인정돼야 한다는 기존 대법원 판례에 충실했다. 감정의 의견을 무작정 수용하기보다는, 입대 전에 양호했던 건강 상태, 정신질환자가 없는 가족력, 군복무 외의 스트레스 요인이 없었던 점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했다. 그 결과 조현병과 군복무의 인과관계가 있다고 봤다. “같은 사건에서 패소하는 게 1천여 건이라면, 승소하는 건 한두 건뿐이다. 대법원 판례를 충실히 따랐다는 것 자체로 의미 있다.”(최갑인 경기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변호사)
ㄷ씨는 2010년부터 장애연금을 수령했다. 그러던 중 산업재해를 당해 오른쪽 다리가 7㎝ 짧아지고 다리 관절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게 됐다. 산재보상보험법상 장해급여를 근로복지공단에 신청했지만, 산재보상보험법 시행령(제53조 4항)에 따라 산재로 같은 부위를 또 다쳤을 때 장애인복지법과 산재보상보험법의 수급권이 중복되지 않도록 그 수급권을 제한해야 한다며 ㄷ씨에게 장해급여를 지급할 수 없다고 결정했다. 그러나 대구고법 행정1부(재판장 김찬돈)는 2019년 10월 원심에 이어 ㄷ씨 손을 들어줬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일하다가 산재를 당했는데 비장애인은 장해급여를 받고 장애인은 산재 이전에 장해가 있었으니 장해급여를 받을 수 없다면? 법원은 이를 “불합리한 차별”이라고 명명했다.
산재보상보험법과 장애인복지법은 입법 취지, 보상 목적, 장애등급 판정 기준, 보상 금액이 모두 다르다. 그러므로 산재보상보험법 시행령(제53조 4항) “이미 장해가 있던 사람이 업무상 부상 또는 질병으로 같은 부위에 장해 정도가 심해진 경우”에서 그 장해는 기존에 있던 장애가 아니라, 이전 산재로 발생한 장해로 해석해야 한다. 근로복지공단은 산재보상보험법을 잘못 해석, 적용했다. 법원은 ㄷ씨가 장애인복지법상 장애연금을 받고 있었을 뿐 산재보상보험법상 급여를 받지 않은 이상, 중복 지급이나 불합리한 과다 지급은 아니라고 바로잡았다.
(대구지법 2019구합22042)
지방공무원 ㄹ씨는 2018년 우울증과 환청을 겪다 자택에서 귀신을 떼어내야 한다는 환상에 사로잡혔다. 그는 가위로 머리카락을 자르려 하다 이를 말리던 어머니를 다치게 했다. 수사 과정에서 ㄹ씨가 일하는 지자체에 이 사실이 공유됐고, 지자체는 품위 유지 의무를 위반했다(지방공무원법 제55조)며 ㄹ씨를 해임했다. 이 사건을 넘겨받은 법원이 판결을 내리기도 전이었다. 2019년 11월 대구지법 행정1부(재판장 박만호)는 지자체 처분이 위법하니 취소하라고 판결했다.
해임은 공무원 신분을 박탈하는 중징계로, 그 재량권을 행사할 때 신중히 해야 한다. 그런데도 지자체는 ㄹ씨가 고의로 어머니를 다치게 했는지 밝혀지지 않았고, 가정법원 판단(불처분 결정)도 내려지지 않았는데 바로 해임 처분을 내렸다. 정신질환 자체를 해임 처분 사유로 삼은 셈이다. 지자체는 재판 과정에서 ‘ㄹ씨가 조현병을 앓고 있는데도 치료를 소홀히 해 정상적인 업무가 어렵다는 점을 징계에 고려했다’는 주장도 했다.
법원은 사건을 살펴봤을 때, ㄹ씨의 정신질환에 따라 우발적으로 발생한 사건이라 판단했다. 나아가 법원은 지자체의 해임 처분이 징계 재량권의 한계를 벗어났다고 했다. 정신질환은 징계 사유 어디에도 해당하지 않는다. 정신질환이 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 공무원 신분을 박탈할 수 없다.
다만 정신질환으로 정상적인 업무가 어렵다면 휴직 또는 직권면직의 사유가 될 여지는 있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바로 직권면직으로 직행하는 게 아니라, 장기요양을 받도록 휴직기간을 주고, 휴직기간이 끝나도 직무를 감당하기 어렵다고 판단돼야 비로소 직권면직이 가능하다고 법원은 밝혔다. “적법 절차를 거치지 않은 정신장애인의 직무 배제를 경계한 것이다.”(정규석 태평양 변호사)
정리 고한솔 기자 sol@hani.co.kr
*특집-장애인 인권 판결
청각장애인이 공무원 면접에 가서 받은 질문들
http://h21.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50245.html
장애를 장애로, 차별행위 멈춘 판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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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복무 중 난청, 소음 직접 입증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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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h21.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50248.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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