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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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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전태일] 왜 다들 “네네” 하라는 거죠?

사회적기업 여성 노동자 서민주씨의 하루
등록 2020-10-13 11:56 수정 2020-10-23 14:06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일요일은 쉬게 하라!” “노동자들을 혹사하지 말라!”

1970년 11월13일 서울 청계천 평화시장 앞, 22살 청년은 불타는 몸으로 절규했다.

“모든 노동자에게 근로기준법을 적용하도록 법 11조를 개정하라.” “모든 노동자에게 노조 할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노동조합법 2조를 개정하라.” “모든 노동자가 죽지 않고 일할 권리를 보장하는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하라.”

50년이 지난 2020년 가을, 민주노총과 진보정당, 시민사회단체는 22살 청년의 이름을 다시 부르짖는다. ‘전태일 3법’을 만들자고 국회를 압박한다. 왜, 다시 전태일일까. “50년 전 전태일 노동자가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라고 외쳤지만 일터는 달라지지 않았”(김미숙 김용균재단 이사장)기 때문이다.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는 전태일의 마지막 절규에 한국 사회는 여전히 시원스레 답하지 못한다.

노회찬재단은 올해 ‘투명 노동자’에 주목하는 ‘6411프로젝트’(제1323호 참조)를 진행 중이다. ‘6411’의 연장선으로 노회찬재단은 ‘2020년 전태일들’의 목소리를 듣는 프로젝트를 9월 한 달 동안 진행했다. 김소민 자유기고가와 이철 작가가 일터·나이·성별은 각각 달라도 전태일과 ‘닮은 얼굴’을 한 8명을 전국 곳곳에서 만났다. 노동의 가치를 제대로 인정하지 않는 사회에서 흔들리는 노동자들의 모습을 르포와 일기 등의 형식으로 기록했다. <한겨레21>은 전태일 50주기를 한 달 앞둔 10월 매주 이들의 기록을 전한다._편집자주

*‘2020 전태일의 일기’ 도움 주신 분들

강언주(부산 에너지정의행동) 권순대(경희대학교) 박미경(전태일재단) 박상희(원전 노동자) 박정훈(라이더유니온) 솔가(뮤지션유니온) 안연정(청년허브) 오승은(공공운수노조) 오진아(소셜디자이너Doing) 이자스민(전 국회의원) 이정기(봉제인노조) 홍진아(빌라션사인)

35살 서민주(가명)씨는 사회적기업 입사 9년차 팀장으로 지역문화 콘텐츠를 기획하고 있다. 반려견과 살고 결혼할 생각은 없다.

아침 7시에 눈은 뜨기, 30분간 침대에서 뒹굴뒹굴하며 스트레칭하기, 개 아침 산책 시키기…. 좀더 생산적인 인간이 돼볼까 해서 요즘 유행하는 ‘루틴(습관) 만들기’를 하고 있다. 엑셀파일로 체크리스트를 만들었다. 휴일이 끼면 와르르 무너지는 계획이지만 말이다.

왜 맞추라고만 할까

오전 9시에 출근해 팀원 네 명과 그날 해야 할 일을 놓고 회의한다. 1990년대생 팀원들한테 일의 맥락을 납득시키는 게 중요하다. 그 친구들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지시는 안 통한다. 점심시간까지 주로 발주처와 ‘소통’한다. 단체대화방 메시지마다 상처받는다. 대응하지 않을 정도로 내공이 쌓였다. “바꿀까요?” 답이 없다. 폰트 크기 따위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트집 잡을 때도 있다. 이 일을 함께 하는 모든 사람들의 전문성을 무시하고 잘난 척하고 싶은 거다. 자기가 갑질한다는 것도 아마 모를 거다.

3년 전엔 사표를 냈다. 클라이언트(고객)가 디자인 색깔을 바꾸란다. 자기 맘에 안 든다는 게 이유다. “무슨 색깔로 할까요?” “일일이 말해줘야 해요?” 반말을 들은 팀원도 있었다. 대응하기 어렵다. 사회적기업에서 일하고 싶었던 까닭은 지역에 도움이 되는 문화 콘텐츠를 만들고 싶어서였는데, 발주처 담당자의 취향을 떠받드는 일을 하는 것 같았다. 대표는 사표를 수리하지 않고 여섯 달 휴직 기간을 줬다.

“네, 네 하면 넘어갈 것을….” 어릴 때부터 엄마는 이렇게 말하곤 했다. 나는 내가 그렇게 살면 행복할 수 없다는 걸 안다. 왜 맞추라고만 할까? 오래 고민했다. 다들 자기 의견을 존중받아본 적이 없어서 그게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거 같았다. 모두 취미를 갖는다면? 모두 자기 관점을 갖는다면? 취미생활, 독서 관련 콘텐츠 회사를 창업해볼까도 고민했다. 그러다 공동의 경험이 필요하다는 결론에 닿았다. 우리 지역 축제를 공동 기획해보는 것처럼 자기 의사가 존중받는 집단적 체험이 중요했다. 거기 보탬이 되고 싶었다. 대기업이나 공무원 공채 시험은 보지도 않는 나한테 아빠는 화냈다. 다른 사회적기업은 어떨까? 휴직 기간에 같은 분야 회사들에서 아르바이트를 해봤다.

사표를 내기 전, 우리 회사의 문제 대부분은 대표가 50대 ‘아재’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대표가 젊으면 생각이 더 열려 있을 거란 선입견이 있었다. 아르바이트했던 곳의 31살 대표는 진짜 ‘꼰대’였다. “나 없으면 누가 너네한테 월급 주니.” 회식 때는 “요즘 이런 말 하다 잘못하면 큰일 나지”라고 웃으며 음담패설을 늘어놨다. 다른 회사 대표는 40대 여자였다. 자기도 대표면서 50~60대 남자 대표들 앞에서는 애처럼 행동했다. 살갑게 잘 맞춰주는 역할에 충실했다. 권위는 직원들 앞에서 세웠다. 그런 걸 배우고 싶진 않았다. 직원들의 기획을 존중하고 성장할 기회를 주는 곳이 드물었다. 복직했다.

성희롱에 함께 화낸 대표

적어도 지금까지 일해온 곳은 달랐다. 대표와 회사에 대한 기본적인 신뢰가 있다. 입사 3개월이 됐을 때 한 뒤풀이 자리에서 유명 예술가가 성희롱했다. 내가 미쳤냐고 했더니 그가 그랬다. “너 일하기 싫어?” “사표 쓰면 그만이야!” 대차게 대거리했지만 사업이 망가져 내가 책임져야 할까봐 무서웠다. 대표에게 보고했더니 노발대발했다. “그런 새끼가 다 있냐, 그냥 넘어가면 안 된다.” 그 반응에 안심이 됐다. 회사가 날 보호해줄 수 있겠다고 느꼈다. 직원 20여 명인 우리 회사는 적어도 성차별적 발언에 눈치 안 보고 문제제기를 할 수 있는 분위기다. 직원의 기획을 존중해주고 대표 취향에 맞출 필요 없이 논리로 설득할 수 있다는 점도 좋다. 그래서 오늘도 ‘갑질’ 전화 정도는 참는다. 올해 초 이런저런 일을 해보겠다고 연봉 인상을 요구했다. 연봉이 올랐는데 그만큼 성과를 내야 한다는 부담도 커졌다. 한 달에 월세 50만원, 학자금대출 등 고정비용이 120만원 든다. 나 혼자 감당해야 한다. 불안하다. 결혼해 삶의 부담을 나누는 친구들을 보면 부럽기도 하다.

“네, 네 하는 여자 만나고 싶어.” 헤어질 때 옛 남자친구는 말했다. 다정다감한 사람이었는데 몇 년 뒤 선배한테서 그가 ‘일베’(일간베스트저장소) 회원이었다는 얘길 들었다. 결혼이란 게 이상했다. 끝까지 사랑할 자신이 없으니 결혼이란 제도로 묶어야 할 필요가 있는 거 아닌가? 성역할도 이해할 수 없었다. 왜 아버지 숟가락, 밥그릇은 특별히 따로 정해져 있나? 결혼에 대한 마음을 접은 건 진보정당 지지자였던 한 남자와 헤어지면서다. 내 친구가 외국인이랑 사귄다고 했더니 그가 무심결에 말했다. “한국 여자랑 사귀는 외국인들은 참 상도덕이 없어.” 한국 남자의 ‘영역’을 침범한다는 말이었다. 충격받았다. 매사 그토록 올바른 그에게서도 깊이 똬리 튼 여성혐오를 봤다.

점심은 도시락을 싸온다. 생활협동조합에서 산 산채가 반찬이다. 한 달에 일주일은 비건(채식) 실험을 한다. 일하는 여성들의 모임 ‘빌라선샤인’에서 하는 비건 소모임이다. 여덟 명이 돌아가며 채식을 한다. 레시피도 공유하고 매끼 먹은 것을 인증한다. 빌라선샤인에서 1년 동안 활동하며 자주 만나 친해진 사람들과 일요일 저녁 ‘줌’(화상회의 앱)으로 만나 한 주를 되돌아본다. 회사에서 힘들었던 일, 옛 애인들의 짜증 났던 행태… 못할 이야기가 없다. 조직문화나 경력관리 같은 일에 도움이 되는 정보도 빌라선샤인에서 나눴다. 작은 회사에 다녀 일을 주먹구구식으로 배우나 하는 콤플렉스가 있었는데, 듣다보니 회사가 크든 작든 다들 일은 주먹구구로 배우고 있었다. 기싸움이 이 여자들만의 모임엔 없다. 존재 자체로 존중받는 기분이 든다.

이 일을 계속하는 게 의미 있을까

저녁 7시에 퇴근하면 개를 데리고 산책한다. ‘안정적인 삶은 이런 거야’라고 정해져 있으면 나는 평생 불안할 수밖에 없다. 결혼하지 않고 임금노동을 하지 않고도 ‘안정적’으로 살 수 있을까? 그런 불안이 일 때면 생각한다. ‘곧 그런 세상이 올 거야. 그런 세상이 올 수밖에 없어.’ 정서적 지지를 받는 관계와 삶을 지탱하는 물리적 공간이 있으면 ‘안정’ 아닐까? 책을 좀 읽다 밤 10시 잠자리에 든다.

때로 뒤척인다. 꾸준히 지역문화 콘텐츠를 만들어왔는데, 그래서 세상이 더 나아졌나? 9년 전을 생각하면 변하긴 했는데 뜬구름처럼 손에 잡히지 않는다. 이 일을 계속하는 게 의미 있을까? 계속할 수 있을까? 그러다 잠이 든다.

김소민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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