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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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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전태일] 빗자루 잃고 울던 날부터 10년

주상복합건물 청소노동자 김순자씨, 10년간 버틴 사람은 딱 두 명
등록 2020-11-01 08:14 수정 2020-11-05 01:26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일요일은 쉬게 하라!” “노동자들을 혹사하지 말라!”

1970년 11월13일 서울 청계천 평화시장 앞, 22살 청년은 불타는 몸으로 절규했다.“모든 노동자에게 근로기준법을 적용하도록 법 11조를 개정하라.” “모든 노동자에게 노조 할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노동조합법 2조를 개정하라.” “모든 노동자가 죽지 않고 일할 권리를 보장하는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하라.”

50년이 지난 2020년 가을, 민주노총과 진보정당, 시민사회단체는 22살 청년의 이름을 다시 부르짖는다. ‘전태일 3법’을 만들자고 국회를 압박한다. 왜, 다시 전태일일까. “50년 전 전태일 노동자가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라고 외쳤지만 일터는 달라지지 않았”(김미숙 김용균재단 이사장)기 때문이다.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는 전태일의 마지막 절규에 한국 사회는 여전히 시원스레 답하지 못한다.

노회찬재단은 올해 ‘투명 노동자’에 주목하는 ‘6411프로젝트’(제1323호 참조)를 진행 중이다. ‘6411’의 연장선으로 노회찬재단은 ‘2020년 전태일들’의 목소리를 듣는 프로젝트를 9월 한 달 동안 진행했다. 김소민 자유기고가와 이철 작가가 일터·나이·성별은 각각 달라도 전태일과 ‘닮은 얼굴’을 한 8명을 전국 곳곳에서 만났다. 노동의 가치를 제대로 인정하지 않는 사회에서 흔들리는 노동자들의 모습을 르포와 일기 등의 형식으로 기록했다. <한겨레21>은 전태일 50주기를 한 달 앞둔 10월 매주 이들의 기록을 전한다._편집자주

*‘2020 전태일의 일기’ 도움 주신 분들강언주(부산 에너지정의행동) 권순대(경희대학교) 박미경(전태일재단) 박상희(원전 노동자) 박정훈(라이더유니온) 솔가(뮤지션유니온) 안연정(청년허브) 오승은(공공운수노조) 오진아(소셜디자이너Doing) 이자스민(전 국회의원) 이정기(봉제인노조) 홍진아(빌라션사인)

김순자(69·가명)씨는 11년째 서울에 있는 주상복합건물을 청소하는 노동자다.

오늘 변기에 똥이 없다. 물을 안 내리고 가는 사람들도 있는데 그때마다 속상하다. 나는 공용화장실 쓸 때 물을 두 번 내리기도 하는데… 사람마다 다 다르니까. 지난달엔 ‘똥 사건’이 있었다. 누군가 화장실 바닥에 똥을 싸놓고 발로 짓이겨놨다. 세 번이나 그랬다. 사건이 벌어졌을 시간대 복도 감시카메라를 돌려봤다. 범인이 누군지 알아냈지만 따지진 않았다. 주민이라 말하기도 그렇다. 지하 마트 쪽 화장실엔 토사물이 있을 때도 많다. 그래도 ‘똥 사건’은 세 번으로 끝나 다행이다.

하필이면 걸레 빠는 데가 남자 화장실에 있다. 내가 청소를 하건 말건 남자들은 별 상관 하지 않고 바지를 내린다. 55살 막내부터 72살 언니까지 여자 동료가 7명인데 이럴 때마다 민망해서 화장실 밖으로 나와 잠깐 기다렸다 들어간다. 오줌을 변기 밖으로 흘려놓는 사람들도 있는데, 일부러 그러겠나.

지하 6층 5평짜리 여성대기실

아침 8시부터 오후 4시까지 나는 지하 7층부터 지상 14층까지 청소한다. 15층부터 40층까지는 동료가 맡아서 하는데 6개월마다 구역을 바꾼다. 출근하면 지하 6층에 있는 여성대기실에서 유니폼으로 갈아입는다. 지하 주차장 한쪽에 만든 5평(약 16.5㎡) 정도 크기 공간이다. 한쪽 귀퉁이에 환풍기를 뚫었다. 자동차 매연 탓에 공기는 여전히 퀴퀴하지만 환풍기가 없는 것보다는 낫다. 주민이 쓰던 금성 냉장고를 줬다. 낡아서 냄새가 나지만 쓸 만하다. 역시 주민이 쓰다 버린 에어컨도 들여놔서 올여름은 시원하게 났다. 건물주가 바닥에 온열 패널을 깔아줘 겨울에 따뜻하다. 우리가 소속된 용역회사는 월급 나눠주고 명절에 비누세트 주는 거밖에 안 한다. 누가 인터넷에서 찾아봤는데 그 비누세트는 5천원짜리란다.

대기실에서 밥도 같이 먹을 수 있고 좋다. 이 건물이 완공된 2009년부터 여기서 일했는데 그땐 대기실이 없었다. 건물 안에 합판이며 시멘트 남은 거며 쓰레기투성이였다. 그걸 우리가 일일이 다 끄집어내 치웠다. 주상복합이라 창문이 없어 숨이 턱턱 막혔다. 먼지를 허옇게 뒤집어썼다. 집에서 싸온 밥을 꺼내 보면 얼음덩이가 돼 있었다. 처음엔 폐지를 팔아 커피 사서 우리끼리 마셨는데 주민자치회에서 알고 수익금을 가져갔다. 일이 힘드니 한두 달 만에 그만두는 사람이 많았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버틴 사람은 나 포함해 딱 두 명이다. 55살인 그 동료는 나를 “언니”라 부른다. 우린 서로 얼굴 한 번 붉힌 적이 없다.

청소일은 처음 시작한 사람이나 오래 한 사람이나 임금이 똑같은데, 지난해엔 10년 근속했다고 월급을 2만원 올려줬다. 월 150만원에서 4대 보험이랑 세금 떼고 나면 138만원을 받는다. 10년 근속 기념으로 홍콩에도 갔다. 회사에서 보내준 건 아니고 친구들이랑 계 타서 갔다. 2박3일이라 하루 쉬어야 했는데, 운이 좋았다. 1년에 3일 휴가 외에 결근하려면 자기 대신 일할 사람을 채워야 한다. 물어물어 구할 수 있었다. 내 월급에서 그 사람 일당으로 7만원을 줬다. 아프면? 잘리는 거지. 한 남자 동료는 맹장염 때문에 잘렸다. 나는 10년 동안 조퇴 한 번 한 적 없다. 몸살 나면 약으로 버티고 꾹 참다 일 끝나고 병원에 갔다. 때론 동료들이 나 쉬라고 내 구역까지 맡아서 해줬다. 그렇지 않았다면 지금까지 못 버텼을 거다. 뭐, 회사에서 아프라고 해서 내가 아픈 건 아니니까 못 쉬게 해도 화나진 않는다.

퇴근을 일찍 시켜주지

지하 7층부터 로비까지 닦고 나면 점심시간이다. 각자 밥하고 반찬을 싸와서 나눠 먹는다. 멸치볶음, 김치, 가지나물… 집에서 먹던 반찬들이지만 이렇게 펼쳐놓으면 뷔페 같다. 다들 아침을 안 먹어 허기가 졌다. 꿀맛이다. 다른 빌딩 사무실 청소하는 사람들은 회사원들 출근하기 전에 일을 마쳐야 하니 새벽 5시30분에 일하러 간단다. 거기에 비하면 아침 7시에 집을 나서도 되는 나는 편한 거다.

점심시간이 두 시간이다. 이 근처엔 갈 데가 시장밖에 없다. 거기라도 바람 쐬고 들어왔다. 재작년 최저임금이 오르고 점심시간이 늘었다. 솔직히 임금 많이 안 올려주려고 그런 거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드는데 따지진 않았다. 우리끼리 이럴 거면 차라리 집에 일찍 보내주지 구시렁거리기도 한다. 그래도 그때 월급이 6만원 올랐고 잘리지 않은 것만도 다행 아닌가.

최저임금이 오르고 그 여자는 잘렸다. 그이가 해고되고 내 일은 늘었지만 마음이 편하다. 그 여자는 주민들이 준 선물 같은 걸 내가 안 나눠 쓴다느니 하는 거짓 소문을 퍼뜨리곤 했다. 뒤에서 내 욕을 그렇게 했다. 하루는 “너 아니면 나, 둘 중 하나 잘린다”고 해서 내가 “나는 잘려도 상관없다”고 대꾸했는데 그 여자가 팀장이랑 친해서 걱정도 좀 됐다. 그 여자가 떠날 때 왜 그렇게 내 뒷담화를 하고 다녔냐고 물어봤다. 주민들도 보안요원들도 다 나를 감싸고돌아서 샘이 났다고 했다.

그 여자 빼곤 스트레스 받을 일은 별로 없었다. 여기서 오래 일해 주민들도 나를 알고 잘해준다. 오늘도 한 주민이 제주도에서 올라온 거라면서 술떡을 줬다. 나는 누구한테 나쁜 소리 해본 적 없고 ‘갑질’은 당해본 적도 없다.

빗자루 잃고 울던 날로부터 11년

오후 4시에 퇴근하면 밥 먹고 텔레비전을 본다. 요즘엔 TV조선 <미스터트롯>에 나오는 14살짜리 정동원이 예뻐 죽겠다. 대학생이 된 손주 생각이 난다. 외아들네는 광주광역시에 산다. 10년 넘게 나 혼자 살지만 적적하진 않다. 일요일은 휴무고 격주로 토요일에 쉬는데 친구들이랑 등산도 가고 바쁘다.

설계사무소를 하던 남편은 갑자기 저세상으로 갔다. 친척 초상집에서 안주를 먹다 체했는데 그길로 가버렸다. 아직도 사인을 모른다. 전남 고흥, 고향 동네 사람의 친척인 남편을 선으로 만나 24살에 결혼했다. 우리 집은 아버지가 원양어선을 타서 가난하지 않았는데 나는 중학교 1학년 마치고 학교를 못 다니게 됐다. 맏딸에 동생이 넷이었고 어머니가 아팠다. 병 수발하고 동생들 밥해줘야 했다. 딸들은 다 학교 안 보내고 내 친구들도 안 다니니 억울하진 않았다.

남편이 가고 아는 사람이 청소일 해보겠냐 해서 시작했는데 10년이 넘었다. 첫날 빗자루를 잃어버리고 당황해서 울었던 기억이 난다. 살면서 후회되는 일? 그런 거 없다. 좋고 나쁠 게 뭐가 있나. 직장 다니는 거 재밌고 보람 있다. 점심때 같이 밥도 비벼 먹고 시장도 다녀오고, 좋은 일 아닌가.

김소민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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