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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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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지향’ 기만을 벗고 ‘책임’으로

<책임에 대하여> 저자 서경식, 다카하시 데쓰야 대담
등록 2019-08-19 02:09 수정 2020-05-02 19:29
한승동 전 <한겨레> 기자, 재일동포 서경식 일본 도쿄경제대 교수, 다카하시 데쓰야 일본 도쿄대 교수(왼쪽부터). 김진수 기자

한승동 전 <한겨레> 기자, 재일동포 서경식 일본 도쿄경제대 교수, 다카하시 데쓰야 일본 도쿄대 교수(왼쪽부터). 김진수 기자

“우리는 같은 잘못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그것이 위법행위였다는 판단을 내려야 합니다. 미래지향적 결과를 만들기 위해서는 먼저 과거를 판단하는 행위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일본의 진보적 지식인 다카하시 데쓰야 도쿄대 교수와 재일동포 서경식 도쿄경제대 현대법학부 교수가 아베 신조 정권의 한국에 대한 최근의 전례 없이 공세적인 행보와 그 정치·사회·역사적 배경 등을 짚었다. 최근 번역 출간된 대담집 (돌베개 펴냄)의 공동 저자로 출간 행사 참석차 서울에 온 이들의 대화는 전도된 과거사 인식, 일본 전후 민주주의의 허상, 일본 리버럴(진보)세력 몰락 등을 천착한 책 내용의 연장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에 스무 번 넘게 왔다는 다카하시 교수는 일본의 과거사 책임과 그 청산에 관한 가장 본질적인 문제제기를 하는 용기 있는 지식인이다. 도쿄대학에서 30여 년간 가르쳐왔고, 지금은 대학원총합문화연구과·교양학부 교수로 있다. 철학·서양철학·근대서양철학을 전공하고, 주로 철학·윤리·현대사상을 가르친다. 대학원에선 초역(超域·영역을 넘음)문화과학을 맡아 전통적인 과목을 넘나드는 시도를 하고 있다. 국가가 해결할 수 없는 인간과 안전에 관한 문제, 예컨대 식민주의, 오키나와 미군기지, 원자력발전 문제(원전 사고) 등도 다룬다.

도쿄경제대에서 인권학을 가르치면서 일본 사회의 차별과 과거사 문제에 단호하게 맞서온 서 교수는 몇 년 전부터 예술학(근·현대 미술) 강의를 병행하며 새로운 성취를 쌓아가고 있다. 대학교 도서관 관장직까지 맡아 다른 일을 제대로 못한다면서도 (반비 펴냄)을 이번에 출간했다.

대담은 8월12일 번역자인 한승동 전 기자의 사회로 서울 도심 두 사람의 숙소 근처에서 진행됐다.

견제 없는 아베의 새로운 구호 ‘배타주의’

한승동(이하 한) 문재인 정부 등장 이후 2015년의 ‘12·28 위안부 합의’ 파기와 강제징용 피해자 손해배상 소송 대법원 판결로 긴장이 높아지긴 했지만, 아베 정부가 수출규제 등 강수를 실제 두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아베 정부가 왜 그런 강수를 두었을까요?

다카하시 데쓰야(이하 다카하시) 아베 정부는 패닉(공황) 상태에 빠지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한국 대법원 판결로) 자신의 급소나 아픈 곳을 찔린 듯한 느낌에 사로잡히지 않았을까요.

한국은 1965년 한일협정이 일본 식민지배 책임을 묻지 않았고 (불평등한) 경제적 힘의 관계 속에 합의된 것으로 봅니다. 또 1910년 한일합병조약은 체결 당시부터 무효였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일본은 한일합병조약은 합법적으로 체결했지만, 1965년 한일기본조약으로 ‘이미 무효’임을 확인했다고 주장합니다. 강제합병 책임도 인정하지 않는 거죠.

과거사 문제와 관련한 역대 일본 정권의 대응을 보면, 1993년 호소카와 모리히로 정권에서 ‘식민지 지배’라는 용어가 처음 나왔고, 전후 50년(1995년) ‘무라야마 담화’에서는 식민지배와 침략으로 동아시아 사람들에게 고통과 손해를 끼쳤다는 내용을 명시합니다. 또 고이즈미 준이치로 정권 때도 사죄했습니다. 그렇지만 아베 정권은 식민지배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한국 대법원의 강제징용 피해자 재판 최종 판결이 나오자 아베는 충격을 받았고 그 판결을 무시하고 싶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미디어는 아베 정권의 견해를 비판적 검토도 없이 국민에게 그대로 발신했습니다.

아베 정권은 한국 대법원의 판결이 한일협정에 위배되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정치적 이유로 그렇게 주장하는 것인지, 아니면 한일협정으로 다 해결돼 일본에 정말 책임이 없다고 믿고 그러는 것인지, 어느 쪽인가요?

다카하시 어느 쪽인지 딱히 진위를 밝히기는 어렵지만, 일본 정부의 합의 과정, 정치적 대화 과정을 보면 피해자들 개인에게 배상청구권이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고 생각하긴 어렵다고 봅니다. 일본 정부의 기능이 열화(劣化·나빠짐)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서경식(이하 서) 아베 정권이 왜 저런 강수를 뒀을까, 단기적으로는, 아베 정권은 지난 6년 동안 선거 때마다 이슈를 만들어 이용해왔습니다. 대내적으로는 도쿄올림픽, 후쿠시마 부흥 같은 구호를 외쳤고, 대외적으로는 북핵·미사일, 다양한 외교 활동 등이 있습니다. 그런 퍼포먼스로 지지를 얻어왔는데, 그것이 집권 6년간 극우적인 구호로 바뀌었습니다. 일본 국민에게 지난 20년 이상 해온 교육, 그리고 미디어의 잘못된 보도 태도로 국민 대다수가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에 무지하고 동아시아를 멸시하는 상태가 오래됐기 때문에 지난 참의원선거 때처럼 배타주의를 외치는 것이 효과가 있다는 걸 아베 정권이 잘 알 겁니다.

장기적으로 보면, 과거에는 보수파 내 견제 세력이 있었는데, ‘아베의 쿠데타’가 성공해서 내부에 견제 세력이 없습니다. 국제적으로는 고립되면서도 보수 정권 안에서는 완전한 지배권을 확립했죠. 이런 전체주의적 정치 풍토는 정권 유지에 효과적입니다.

아베는 기시 노부스케의 외손자로 국수주의적 전통을 이어받았습니다. 처음에는 선거제도 등의 장벽 때문에 자민당 내부에서도 확고한 다수파가 되지 못했는데, 지난 6년 동안 관련 법 개정 등을 거쳐 이제 자신의 본래 이념 목적을 완성하는 단계가 됐다고 보는 것 같습니다. 그 결과 한-일 문제가 아베 정권의 표적으로 선정됐다고 생각합니다. 전에 중국인들이 제기한 비슷한 소송도 있었으니, 한국에서도 강제징용 피해자 손해배상 청구 문제가 불거질 것으로 예상했을 겁니다. 따라서 아베의 강수는 패닉 상태 때문이라기보다는, 권력을 다지기 위해 의도적으로 한국을 겨냥해 저지른 게 아닌가 싶습니다.

<책임에 대하여> 저자 서경식 일본 도쿄경제대 교수(왼쪽)와 다카하시 데쓰야 도쿄대 교수가 8월12일 서울 종로구 한 호텔 근처에서 한승동 전 <한겨레> 기자(가운데)의 사회로 대담을 했다. 김진수 기자

<책임에 대하여> 저자 서경식 일본 도쿄경제대 교수(왼쪽)와 다카하시 데쓰야 도쿄대 교수가 8월12일 서울 종로구 한 호텔 근처에서 한승동 전 <한겨레> 기자(가운데)의 사회로 대담을 했다. 김진수 기자

책 <책임에 대하여>(돌베개 펴냄) 표지.

책 <책임에 대하여>(돌베개 펴냄) 표지.

냉전 무너지면서 전체주의 입장으로

이번 ‘아베의 전쟁’은 이미 1990년대에 시작한 게 아닌가 싶습니다. 1991년 김학순 할머니가 일본군 ‘위안부’ 공개 증언을 한 뒤, 1993년 고노 담화(일본이 ‘위안부’ 강제동원 인정하고 사죄함), 1995년 무라야마 담화(일본이 전쟁범죄 인정하고 사죄함, 식민지배 사죄함)가 나오지 않습니까. 아베 총리는 1993년 중의원 선거에 처음 당선됩니다. 그 무렵부터 1990년대 중·후반에 아베 역사관의 지주라 할 ‘자유주의 사관’, 새 역사 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새역모), 일본회의(일본 최대 규모 극우단체) 국회의원 간담회 등 우익단체와 이데올로그가 대거 등장합니다. 우익의 대반격 속에 아베가 전면에 나서기 시작했지만, 그런 맥락에서 ‘아베의 전쟁’은 이미 그때 시작된 것이 아닌지요.

다카하시 충분히 그렇게 볼 수 있습니다. 덧붙이자면 1990년대 초반에 아베는 ‘일본의 전도와 역사교육을 생각하는 젊은 국회의원모임’이라는 우파단체의 사무국장을 맡습니다. 그리고 전후 50년(1995년) 과거사에 반성하는 국회 결의 때 반대했고, 교과서에 ‘위안부’ 문제를 싣는 것도 반대합니다. 북의 일본인 납치 문제도 큰 계기가 되었을 것이고, 기시의 외손자로 보수파·자민당에서 기대를 받아온 것도 사실입니다. 아베는 2012년 말 2기 정권 출범 이후부터는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강경한 스타일로 바뀝니다.

정치적 의도가 분명한, 이웃나라와의 관계를 크게 손상시킬 수도 있는 아베의 행보에 아시아 유수의 민주주의국가라고 자타가 얘기해온 일본 국민 대다수가 찬성했습니다. 어떻게 별다른 이견이나 논쟁도 없이 쉬 통과될 수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먼저 다카하시 선생 말씀을 좀 보충하자면, 1990년대 일본의 변화는 동서 냉전체제 붕괴라는 관점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일본 진보세력을 대변했던 노조와 사회당은 동서 냉전체제 붕괴 뒤 무너졌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자민당에 진보세력과 우호적인 교류 또는 공조 입장까지 포함해 여러 조류가 있었어요. 아베는 그 1990년대에 가장 강경한 우파 노선의 선두로 나섰습니다. 하지만 보수파 내부에서 그 지배권을 확고히 다진 것은 최근 일입니다. 19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극우·국수주의자들은 그렇게 큰 지지를 얻지 못했지만 그 뒤 극우적 입장을 밀고 나갔죠. 결국 그런 그룹이 지금 주류가 되고, 젊은 세대는 지금과 달랐던 과거에 대해 아는 바가 없게 됐습니다. 리버럴파가 제대로 대항하지 못했습니다. 언론매체나 교육의 문제도 있지만 원래 있었던 본성, 식민지배에 대한 심성을 제대로 극복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1945년에 일본제국 과거사를 청산하지 못한 가운데 미국식 민주주의가 도입됐는데, 동서 냉전체제가 무너질 때 그 민주주의 유산마저 지키지 못하고 원래 전체주의적 입장으로 돌아갔습니다.

가 천착한 것이 리버럴의 좌절과 몰락인데, 사회주의권 몰락이 거기에 영향을 줬겠죠.

그렇지요. 일본에도 사회당·민주당·노동조합 등 리버럴세력이 있었는데 신자유주의의 공격과 이데올로기적 패배, 두 요소에 무너져 몰락합니다.

비판세력 약화와 무비판적 미디어

다카하시 선생은 아베 정권의 최근 행보가 왜 일본에서 별다른 이의 제기나 논쟁도 없이 일사천리로 진행될 수 있었다고 보시나요?

다카하시 그다지 오래전 일이 아니지만, 각료와 국회의원이 역사수정주의적 발언을 했다가 비판받고 사임한 적도 있습니다. 1960년대부터 70년대까지 국회에서도 혁신세력이 3분의 1 정도 차지했고 사회적으로도 노동·학생운동이 있었어요. 그러나 그들이 승리하진 못했죠. 그래도 민주주의로 나아가려는 분위기가 분명 있었지요. 아베 정권 이후에는 관료들이 정치적 스캔들을 일으키고 망언과 실언을 아무리 반복해도 물러나지 않고 정권이 계속 유지되는데, 그게 문제라고 봅니다. 왜 그러냐는 질문으로 돌아가면, 비판세력이 냉전 붕괴와 함께 무너지고 약해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미디어와 저널리즘이 우파 의견에 따르고 흡수되는 쪽으로 진행됐습니다. 매체의 보도 성향에 따라 국민 다수의 생각이 영향받습니다. 물론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의 얘기일 수 있어서, 일반 여론 때문에 그런 식으로 보도가 전개될 수도 있습니다만. 어쨌든 일본의 리버럴세력, 비판세력이 약해졌기 때문에 미디어도 무비판적으로 변하고 상황을 악화한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일본 쪽에서 보면, 원인이야 어찌됐든 수십 년간 별 진전도 없어 보이는 이야기를 되풀이하는 것이 답답하고 지칠 것도 같아요. 과거 얘기 그만하고 미래로 나아가자, 너무 따지는 한국 쪽이 원망스럽다…, 미국도 과거 일로 그만 싸우고 미래로 가라고 종용하고 말이지요.

미래지향이라는 구호는 수상쩍고 기만적일 수 있습니다. 공유할 수 있는 미래상이라면 공유하겠지만, 그들이 말하는 미래로 가기 위해서라도 먼저 청산하고 해결해야 할 문제가 남았는데, 그 문제를 해결하지 않기 위해 미래지향이라는 말을 해선 안 됩니다. 미래지향이라는 말을 하려면 제대로 죽지도 못한 채 망령처럼 떠도는 피해자들이 있다는 사실을 먼저 알아야 합니다.

나는 한국 청년들이 일본군 ‘위안부’, 강제징용 피해자 문제에 계속 높은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이 놀랍습니다. 그들이 반복해서 외치는 것은, 젊은 그들이 과거에 구속당해서라기보다는 그만큼 과거가 제대로 청산되지 않았다는 증거로 봐야겠지요.

한일협정을 체결하기 하루 전인 1965년 6월21일, 이동원 외무부 장관(왼쪽)과 시나 에쓰사부로 외상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한겨레 자료

한일협정을 체결하기 하루 전인 1965년 6월21일, 이동원 외무부 장관(왼쪽)과 시나 에쓰사부로 외상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한겨레 자료

불안한 1등 국민이라는 의식

과거사 문제를 잘 알지 못하는 일본의 일반인들은 과거 청산 문제를 지겨워할 것도 같은데, 실제 그런 여론이 있습니까?

다카하시 그런 생각을 하는 일본인이 많은 게 사실입니다. 댓글이나 인터넷만 봐도 그런 반응이 넘쳐나고, 대학교에서도 그걸 느끼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 분위기가 사회에 만연해 있습니다.

아베 정권 지지율이 높은 것도 그 때문인가요?

다카하시 그럴지도 모르지요.

다카하시 선생은 그런 문제제기에 어떻게 대답하실 건가요?

다카하시 문제가 현상으로 드러난다면 그것을 ‘판단’해야 한다는 것이 내 생각입니다. 미래지향적으로 가자는 주장에 의문을 던진 게 한국 대법원의 판결이라고 봅니다. 판결문 내용에서 기억에 남는 것은, 일본 기업의 위법행위로 피해자가 수난과 고통을 받아왔다는 부분인데요, 판결은 무엇이 미래지향적인지, 그들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근본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그것에 대해 이미 옛날 일이다, 이젠 미래지향적으로 나아가자는 대답은 판단을 회피하는 것이고 결과적으로 위법행위를 허용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같은 잘못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그것이 위법행위였다는 판단을 내려야 합니다. 미래지향적 결과를 만들려면 먼저 과거를 판단하는 행위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한국과 일본의 관계뿐만 아니라 오키나와도 마찬가진데, 한-일 역사 문제에 대한 반발보다 정치적 무지에서 오는 괴리감이 심각하다는 게 더 문제입니다. 그것은 일본 젊은 사람들의 낮은 투표율에서도 드러납니다. 정치 전반에 대한 패배감, 무관심을 키우려 하고 그런 경향을 좋아하는 것이 아베 정권입니다. 그런 세월을 10년, 20년이나 지나왔어요.

일본 사람들이 시민으로서 성장을 포기하고 신민 지위에 자족하는 대신 일본제국 신민에게 주어진 특권, 우월감, 경제적 1등 국민으로서 지위에 안주한 것이 일본의 근본 문제가 아닌가 하는 얘기가 있습니다. 패전 뒤 미국의 점령통치 이후에도 그 기조가 유지되면서 전후 민주주의에다 경제적으로도 다른 아시아 국가들보다 높은 소득을 누렸기 때문에 전후체제에 순종한 게 아닌가, 미국 또한 일본의 상대적 우월감을 부추기며 특별 대우를 해주면서 일본을 종속국으로 묶어두는 샌프란시스코 체제를 유지해온 게 아닌가 합니다.

다카하시 일본인 스스로 일본이 아시아 1등 국가고 자신이 1등 국민이라는 의식이 있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죠.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그런 제국주의적 사고는 없어져야 마땅했을 텐데요. 간단히 말씀드리면, 미국은 소련·중국 공산세력에 대항하기 위해 일본 천왕제를 이용해 자기 세력을 일본 안에 키워가면서 일본의 경제성장을 지원했습니다. 한국전쟁 특수를 계기로 일본은 경제적으로 부흥하게 됩니다. 그것이 (전후)체제 확립으로 이어집니다. 그런 역사적 맥락에서 1970~80년대에 ‘저팬 애즈 넘버원’(‘일본이 최고’라는 뜻으로, 에즈라 보걸의 베스트셀러 책 이름이기도 하다)이라는 구호가 사람들에게 자연스럽고 자랑스러운 것이 됩니다.

이처럼 종전 뒤 단절돼야 했던 것들이 없어지지 않고 이어져왔지요. 그런데 지금은 과거와 달리 세계 안에서 일본의 경제적 지위가 확실히 내려가고 있습니다. 1등 국민이라는 자부와 모순적인 경제적 악화 속에 이런 상황이 불안하고 짜증나는 거지요. 한편으로 자신의 예전 이미지에 집착하면서 ‘혐한’ ‘혐중’ 같은 혐오 행위를 하는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일본인들이 시야가 좁고 내향적이기 때문에 바깥으로 나오면 알기 쉬운 일도 자신들의 울타리 안에서 그들끼리 서로 위로받는 상황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다카하시 선생이 말했듯이 지배층은 1등 국민이었던 과거의 영광에 집착하고, 젊은 세대는 경제적 근거가 무너져도 1등 시민이라는 생각에 빠져 있습니다. 태생적으로 우월하다는 종족주의의 입장을 고수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혐한·혐중 헤이트스피치(혐오발언)로 이어집니다. 주장에 대한 근거가 비합리적인 확신이기 때문에 과거 우파들 문제보다 해결이 훨씬 더 어려울 겁니다.

소수 의견도 논의하는 자리 필요해

2010년 영화 상영회를 일본 우익들이 방해했을 때, 주최 쪽을 비롯한 시민운동 세력이 문제의 본질인 위안부 문제가 아니라 표현의 자유 침해라는 데만 초점을 맞춰 항의한 것에 두 분 모두 비판하셨습니다. 8월 초 일본 나고야에서 열린 ‘아이치 트리엔날레 2019’가 비슷한 이유로 전시를 중단했는데, 거기에 대한 현지 반응은 상영 방해 때와는 좀 달라졌나요?

아뇨, 이번엔 그 공격 정도가 과거에는 상상도 못할 정도로 거셌습니다. 나고야 시장과 오사카 지사 등이 앞장서서 노골적이고 공개적으로 공격했습니다.

한 한국도 크게 다를 바 없어 보이지만, 정치인들에게 별 기대를 할 수 없는 상황에서 한-일 시민 차원의 연대운동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오키나와에서도 아베 정부가 후텐마 미군기지를 헤노코로 이전을 강행해 갈등이 격화되고 있습니다만.

다카하시 시민 교류가 바로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고 보진 않지만 정치적 대립이 심할 때도 민간 교류는 계속돼야 합니다. 또 한 가지, 오키나와 문제를 포함해서 정부나 다수파(머조리티)와는 다른 의견도 솔직히 논의할 수 있는 자리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미디어가 논의 내용을 널리 공개적으로 알리는 것도 중요합니다. 위안부, 강제징용, 조약 등 어떤 것이라도 사회 내부에 그 본질적 문제가 무엇인지 정확히 알려져야 합니다. 일본에서는 사실 자체가 제대로 알려지지 않고, 우파의 슬로건이 일본 국민에게 내면화한 것이 문제입니다. 이번 아이치 트리엔날레의 경우도 전시에 반대했던 가와무라 다카시 나고야 시장이 위안부 문제를 얼마나 역사적으로 정확히 알고 있는지 의문이 듭니다. 역사적 사실에 대한 기본 지식을 미디어가 정확히, 제대로 알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번 사태가 나에겐 새로운 것도 아닙니다. 한일협정 뒤 이어진 일본의 역사적 맥락을 보면 당연한 귀결이라 생각합니다. 일본 쪽이 한국 쪽에 과거 약속을 지켜라, 미래지향적으로 가자고 주장하는 것은 여전히 청산되지 않은 문제를 외면하고 넘어가자는 것이고, 최근 이런 강경한 흐름에 대항하기가 위태롭습니다. 하지만 고통스러운 과정을 회피하지 말고 민주시민으로 발언하면서 반드시 해결해야 합니다.

대담 진행 한승동 언론인·전 기자

녹취 장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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