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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일본의 ‘한국 멸시’ 근원

태평양전쟁을 ‘아시아 민중 해방’으로 포장·선전한 일본
제국주의 끝난 뒤엔 자본주의로 아시아 시장 ‘경제 침투’

제1282호
등록 : 2019-10-09 13:21 수정 : 2019-10-09 1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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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도쿄만에 정박한 미국 함정 미주리호 갑판에서 열린 항복 조인식(1945년 9월2일). 항복 문서에 서명한 일본 외상 시게미쓰 마모루는 1932년 4월29일 중국 상하이 훙커우공원에서 열린 기념식에 상하이 주재 일본 총영사 신분으로 참석했다가 윤봉길 의사가 던진 폭탄에 다리를 다쳤다. 미국 National Archives Ⅱ 소장
일본은 ‘대동아전쟁’을 시작한 이유가 서양 제국으로부터 아시아 민중을 해방시키고 번영을 이루기 위해서였다고 선전했다. 일본을 점령한 미군은 대동아전쟁이라는 명칭을 즉각 금지하고 ‘태평양전쟁’이라 바꿔 불렀다. 하지만 이 전쟁의 성격이나 전투가 벌어진 지역, 참여 인원 측면에서 보면 이 전쟁은 대동아전쟁도 태평양전쟁도 아닌 ‘아시아·태평양전쟁’이었다.

일본인들은 전쟁에 패배했음에도 이를 ‘패전’이라 하지 않았다. 연합군 장군들이 도열한 미주리호 선상에서 이루어진 일왕과 일본 육해군의 항복은 수십 년간 지속한 일본 제국의 패망을 알리는 사건이었지만, 일본인은 단지 전쟁이 끝났다는 뜻의 ‘종전’이라고 했다. 졌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전쟁을 직시하지 못했던 일본 사회는 이제 ‘전쟁할 수 있는 정상국가’를 향해 줄달음치고 있다.

많은 제국주의 국가가 그랬던 것처럼, 일본 근대사는 전쟁의 시간으로 메워졌고, 일본국은 전쟁을 거치며 만들어졌다. 일본이 조선을 손아귀에 쥐려 일으킨 청일전쟁은 근대적 입헌국가를 표방한 메이지유신이 시작된 지 27년밖에 되지 않은 때였고, 이로부터 정확히 10년 뒤에는 러시아와 전쟁해 조선 지배권을 확실하게 거머쥐었다.

식민지 수탈로 이뤄진 제국의 발전

봉건적 막부 시대에 종지부를 찍고, 근대적 시스템을 도입한 지 불과 수십 년 만에 강대국들을 누를 수 있었던 것은 일본의 팽창 욕구였다. 한편으로는 러시아 세력 남하를 저지하려던 영국, 조선 지배권과 필리핀 지배를 서로 맞바꾼 미국의 공모도 일본이 러일전쟁에서 승리하는 요인 중 하나였다.

일본의 진보 역사학자들은 만주사변·중일전쟁·태평양전쟁이 따로 떨어진 사건이 아니라 침략전쟁이 계속 이어지는 시기로 보고 이를 ‘15년 전쟁’이라고 했지만, 사실 일본의 전쟁 역사는 청일전쟁부터 태평양전쟁 시기까지 일관된 흐름으로 진행됐다. 그것은 영토 확장의 역사이자 침략의 역사였다. 일본은 홋카이도와 오키나와를 자국 영토로 편입한 뒤, 대만과 조선을 점령해 식민지로 만들면서 제국의 힘을 키워나갔다. 그중에서도 조선이라는 식민지는 일제가 힘을 비축해 동아시아로 도약하는 중요한 발판이 되었다. 일본 근현대사는 ‘제국 발전사’이지만, 동시에 다른 아시아 국가를 침략하고 수많은 아시아 인민에게 고통과 죽음을 안겨준 유혈과 약탈의 역사이기도 했다. 두 가지는 일본 역사에서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


프랑스 철학자 프루동은 ‘소유란 도적질’이라고 했다. 이와 비슷한 어법으로, 제국의 ‘발전’은 식민지 ‘박탈’로만 이루어진다고 말할 수 있다. 자신들의 능력으로 신기술을 발명하고 열심히 노동했기에 제국 번영을 이룩했다는 논리는 식민지가 제국의 부에 어떤 기여를 했는지 애써 외면하는 제국의 신화에 불과하다. 똑똑하고 노력해서 제국이 성공했다는 이야기는 거짓말이다.

일본 도쿄대 역사학 교수 가토 요코는 전쟁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만주사변과 중일전쟁 전문 연구자인 가토는 한국에서 아베 신조의 역사 인식과 집단자위론을 반대하는 진보적 연구자라고 소개됐다. 하지만 가토는 제국이 발전하는 과정에서 식민지는 어떤 존재였는지, 식민지가 제국과 어떤 관계였는지는 거의 시야에 넣지 않는다. 그는 “청일전쟁은 청나라도 동아시아에서 리더십을 획득하기 위한 노력을 했기 때문에 일본의 침략이라고 일방적으로 말할 수 없다”고 한다. 러일전쟁에 대해서는 “일본이 러일전쟁으로 향하는 과정을 보면, 한반도가 다시금 일본의 안전 보장 문제로 떠올랐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최근 자료를 보면 “결국 전쟁을 피하려고 한 것은 오히려 일본이고, 전쟁에 적극적이었던 것은 러시아라고 할 수 있습니다”(<그럼에도 일본은 전쟁을 선택했다>)라고 말한다.

도쿄전범재판정에 도조 히데키가 가운데 앉아 있다. 도조 히데키는 아시아·태평양전쟁을 일으키는 데 핵심 역할을 했고, 패전 뒤 전범으로 기소됐다. 그는 미군에 체포되기 직전 자살을 시도했으나, 미수에 그쳐 사람들에게 비난받았다. 전범 재판은 흐지부지됐다. 미국 National Archives Ⅱ 소장

은밀히 반복되는 ‘정한론’

가토의 서술은 사실 100년 전에 정한론(征韓論)자들이 읊었던 대사를 반복한 것이다.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의 목적은 모두 한반도였다. 메이지유신 이래 정한론자들은 일본의 안전을 위해서는 한반도가 일본을 겨누는 비수가 되지 않게 하고 일본의 안전을 확보하려면 한반도를 손아귀에 넣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이고 다카모리가 조선을 정벌해야 한다는 ‘정한론’을 처음 주장한 것은 1873년이었다. 그는 조선이 일본을 욕보였기에 징벌해야 한다고 했다. 사무라이 계급을 대변한 사이고는 내란 발생 위기를 돌파하려고 화살을 밖으로 돌렸다. 그의 주장은 논란을 불러일으켜 반대파도 많았지만 점차 일본 지배층이 공유하는 상식이 되었다.

‘진보적’ 역사학자 가토의 시각은 제국 발전사에 한정됐다. 가토는 미국이나 다른 제국주의 국가들과 일본의 역사적 행위를 비교하면서 일본의 행위는 비난받을 이유가 없다는 논리를 구사한다. 예를 들어 2001년 9·11 테러 뒤의 미국과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킨 일본을 비교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일본은 동일한 관점으로 전쟁을 바라보았습니다. 상대가 나쁜 짓을 했으니까 무력을 행사하는 것은 당연하고, 그 무력 행사를 마치 경찰이 범인을 검거하는 것처럼 생각했습니다.”

50여 년 전과 비교하면, 현재 일본 진보 학계가 어떻게 변했는지 잘 드러난다. 이에나가 사부로가 1968년 <태평양전쟁>을 집필했을 때, 그의 문제의식은 가토의 질문과 똑같았다. 즉, 일본은 “왜 전쟁을 저지할 수 없었는가”였다. 왜 전쟁에 저항하지 못하고 굴복했는지에 대한 자문과 자답을 찾아가는 과정이었다.

그런데 가토는 일본 역사를 진전시킨 내부 요인과 그 과정을 살피기보다 외부의 다른 주체(국가)들과 비교한다. 결국 제국 간 전쟁은 똑같기에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것이다. 진주만 공격은 침공이 아니라, 미국의 경제제재와 압박에 맞선 자구책일 뿐이다. 일본은 제국주의 국가들과의 각축전에 끼어든 피동적 위치에 불과하기에 전쟁 책임에 도덕적 판단을 내릴 수 없게 된다.

가토의 논리와 극우파 논리는 분명 다르다. 그렇다고 가토가 전쟁 책임을 직시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책임은 다른 제국주의 국가에 떠넘겨지거나 누구의 책임도 아닌 것으로 흐리멍덩한 채 남아 있다. 전쟁이 인민에게 어떤 고통을 가져다주었는지, 그 의미는 무엇인지 묻지 않고, 제국의 생존 전략 차원에서 역사를 정리하는 방식이야말로 당시 군부 논리를 반복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일까. 식민지 억압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이역만리 서양 제국주의를 비난하던 모습이야말로 책임을 회피하는 이율배반적인 태도라고 할 수 있다. 일본이 유일하게 인정하는 책임은 서양 제국에 대한 책임이다. 일본은 미국에 대한 전쟁 책임은 인정하지만, 한국에 대한 전쟁 책임이 들어설 여지는 아예 없다.

전쟁은 ‘제국 생존 전략’

가토의 책에서 전쟁을 주도하고 이끈 일왕의 책임은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1945년 패전이 다가왔을 때, 일본 지배층이 염두에 둔 것은 국민이 아니었다. 항복할 경우 일왕의 지위가 어떻게 될지가 초미의 관심사였다. 전쟁 때 일본 국민은 ‘만세일계’를 외치며 일왕에게 충성했지만, 일왕은 처벌받지 않았다. ‘대동아전쟁’에서 일왕에게 충성을 다하고 생명을 희생한 전사자, 항복은 불명예라며 자결을 강요받았던 병사, 전장에서 비인간적 상황을 보고 이상 심리가 된 병사들은 모두 버려졌다. 주검이 어디에나 널브러진 상황을 겪고, 살인이 처벌받지 않는 전선에서 죽인다는 행위가 용감하다고 칭찬받는 시간을 보내며 자신도 믿을 수 없는 혼란을 겪은 수많은 병사가 전후 일본 사회에서 숨죽이며 살아갔다. 하지만 전쟁이 끝나고 20여 년이 지났을 때, 이미 전쟁은 과거사가 돼버렸고 고도 경제 성장만이 일본 사회의 목표가 되었다.

사실, 일본의 전쟁 책임을 회피하는 역사 서술은 가토에게만 해당하는 일이 아니고,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도 아니다. 극우 역사관은 1980년대부터 서서히 드러났고, 2000년대에 후소샤 등의 교과서 문제로 논쟁의 중심에 섰다. 우익 역사학은 식민지 지배를 공개적으로 옹호하는 한편, 메이지유신 이래 제국주의 시대를 공공연히 찬양하는 내셔널리즘(민족주의)으로 물들었다. 일본의 권위 있는 이와나미출판사가 일본 역사학의 연구 성과를 집대성해 2010년에 펴낸 근현대사 시리즈(전 10권)에는 가토도 집필자로 참여했는데, 이 시리즈는 일본 진보 학계가 어떻게 변화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대표적 정한론자인 사이고 다카모리가 대한제국 정벌을 논의하는 장면. 征韓論之図, 일본 국립국회도서관 소장

아시아 멸시론으로 식민지 정당화

일본은 중국을 침략하기 오래전부터 야만과 미개의 나라로 업신여겼다. 중국을 ‘지나’라 부르며 “지나는 비적(匪賊·히조쿠)의 사회”이고 “중국인은 근대국가를 수립할 능력이 결여되어 있다”고 주장했는데, 이는 제국주의 국가가 침략을 합리화하고 정당화할 때 흔히 쓰는 논리였다. 식민지로 점령할 나라가 국제법을 모른다거나 자치 능력이 없다거나 상대를 잘 속이고 신의가 없다거나 불결하다는 등의 논리를 내세워 미개·야만의 나라로 규정한 다음 그들을 발전시키고 문명화하기 위해 식민에 들어간다는 논리였다. 소학교 시절부터 중국인을 ‘짱꼴라’ ‘되놈’ ‘돼지 꼬랑지 새끼 이하’로 여기는 교육을 받았던 일본 제국 군인들은 중국인을 자기 나라를 다스릴 수 없는 열등한 민족이라 여겼고, 이런 모멸과 멸시가 바탕이 되어 난징 학살 같은 대규모 살상을 감행할 수 있었다.

조선에 대한 멸시는 중국보다 먼저 시작됐다. ‘일본의 양심’이라는 역사학자 이에나가 사부로는 중국 침략이 감행된 이유에 대해, “오랜 세월에 걸친 일본인의 대중국 의식, 일본 국가의 대중국 정책을 이해하지 않으면 이해할 수 없다”며 “그 왜곡의 원형은 조선에 대한 의식·정책의 왜곡으로서 앞서 형성되어 있다는 사실에 우선 주목해야 할 것이다”라고 썼다.

1만엔짜리 일본 지폐에 얼굴이 찍힌 후쿠자와 유키치는 개화를 주장하고 부국강병론과 자유주의적 가치관을 설파한 근대적 계몽사상가로 존경받는 인물이지만, 조선 인식은 극히 편향된 멸시였다.

후쿠자와는 “조선은 나라가 아니다”라며 “조선 인민은 소와 말, 돼지와 개다” “조선인의 완고 무식함은 남양의 미개인에게도 뒤지지 않는다” “조선인 상류는 부패한 유학자의 소굴이고, 하류는 노예의 군집이다”라고 막말을 늘어놓았다. 이런 망발은 조선인이 진짜 그렇다기보다는, “지금 일본도를 지킴에 있어 가장 가까운 방어선을 구축해야 할 땅은 필히 조선 지방”이라는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한 담론적 포석이었고, 자기를 먼저 속이는 기만적 논리였으며, 상대방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논리였다.

일본이나 선진국이 상대국에 개혁을 강요할 때 상대국이 미개하거나 야만적인 국가라면 강요가 정당화되기 때문에 제국주의 국가는 상대국의 미개와 야만의 정도를 과도하게 강조해 자신의 침략을 정당화한다. 야만과 미개 상태에 있는 인민을 발전시키려면 문명화된 나라가 들어가 이들을 교육하고 발전과 자립을 도모해야 하며,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군대를 파병해 점령하거나 식민지로 만들어야 한다는 후쿠자와의 논리가 만들어졌다. 그는 다른 이웃 국가를 식민지로 만드는 것은 본국의 영토적·경제적 이익을 취하려는 행위가 아니라, 오히려 식민지를 도와주는 혜택이라고 인식했다. 후쿠자와가 설파했던 문명론, 아시아 멸시, 식민지 지배라는 삼각 체제는 제국의 책임을 회피하는 최면 논리였다. 이 논리는 아직 많은 일본인을 사로잡고 있다.

극우세력의 역사관이 식민지 지배에 대해 혜택이라는 오도된 인식을 설파했다면, 진보적 지식인의 인식 안에 식민지는 부재했다. 전후 시기 전쟁 책임을 추궁하며 일본 학계에서 ‘천황’으로 불렸던 마루야마 마사오에게도 아시아 민중에 대한 시각은 완전히 없었고 아시아에 대한 전쟁 책임이라는 의식이나 조선과 대만에 대한 시선도 냉담했다.

한때 학계에서 동아시아론이 활발해지면서 주목받았던 중국 문학 연구자 다케우치 요시미는 중국 인민에게 온정적 태도를 취했지만, 식민지 조선에 대해서는 무지했고 관심을 두지 않았다. 다케우치는 “이쪽에서는 아무것도 모른다. 실제로 침략하는 쪽은 침략당하는 쪽에 대해서 알지 못한다”고 말했는데, 진짜 그랬다.

조선 없이 동아시아의 평화와 미래를 생각할 수 없지만, 조선은 동아시아에서 수십 년간 보이지 않는 투명한 존재였다. 일본 지식인들이 조선을 보지 못하고 의식하지 못한다는 것은, 단지 식민지 조선을 염두에 두지 않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조선을 보지 못하는 것은 결국 일본과 일본의 역사를 보지 못한다는 것이다.

자본주의선 ‘후진-중진-선진’ 배타적 인종관

아시아·태평양전쟁기에는 기만적인 아시아 민족의 해방과 독립을 내세워 전쟁을 일으켰던 일본은 전후에 독립을 이룬 동남아 국가들을 상품 판매 시장으로 여기고 다시 침투했다. 평화로운 경제전쟁이었다.

제국주의 시대에 횡행하던 야만-미개-문명 단계론은 이제 사라졌고, 영토적 제국주의가 활개치던 시대는 지나갔다. 그러나 자본주의가 세계적 범위로 확대돼 후진-중진-선진 경제발전 단계론으로 모양을 바꾸었다. 경제성장을 지고의 목표로 여기는 가치관은 빈곤하다는 이유로 제3세계 후진국을 배척하고 멸시하고 하류 계층을 무시하는 배타적 인종관과 계급 인식을 생산한다. 일본 제국의 역사는 단지 일본을 비난하는 것을 넘어, 현재 우리가 처한 현실을 바라보게 해준다. 한국은 식민지에서 시작해 경제대국으로 성장한 유일한 나라일 것이다. 제국을 비판하는 것뿐만 아니라, 한국이 경험한 식민지 고통과 좌절을 잊지 않고 식민지 합리화 논리가 다른 모습으로 우리 앞에 나타나지 않는지 항상 조심스럽게 성찰해야 한다.

김득중 한국사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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