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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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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고인 양승태’는 법정에 없었다

재판 지연 전략으로 사법 농단 구속 넉 달 만에 첫 재판

뻣뻣한 모습으로 25분 동안 검찰 수사 격정적으로 비난
등록 2019-06-01 04:59 수정 2020-05-02 19:29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5월29일 ‘사법 농단 사건’ 첫 재판에 출석하기 위해 호송차에서 내려 법정으로 가고 있다. 한겨레 백소아 기자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5월29일 ‘사법 농단 사건’ 첫 재판에 출석하기 위해 호송차에서 내려 법정으로 가고 있다. 한겨레 백소아 기자

5월29일 서울중앙지법 417호 대법정에 ‘피고인 양승태’는 없었다. 사법 농단으로 구속된 지 넉 달여 만에 열린 이날 첫 재판에서 그는 여전히 대법원장의 외피를 쓰고 있었다. 그는 법정에 들어설 때 재판부(형사35부, 재판장 박남천)를 향해 목례를 하지 않았다. 시선을 정면에 둔 채 피고인석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보다 먼저 기소돼 재판이 한창 진행 중인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이 입정할 때마다 재판부를 향해 깍듯이 인사한 것과 대비됐다. 재판부에 대한 목례는 법원 재판을 존중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재판부 목례 않고 박병대·고영한 인사 받기도

양 전 대법원장이 입정할 때 피고인석에 앉아 있던 박병대·고영한 두 전직 법원행정처장(공범으로 불구속 기소됨)과 변호사들은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들은 양 전 대법원장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방청객들은 이 모습을 의아하게 지켜봤지만, 양 전 대법원장은 익숙한 태도로 인사를 받았다. 그에게서 피고인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그가 피고인석에 앉아 있는 것이 어색할 정도였다.

그의 ‘대법원장 코스프레’는 피고인 모두진술 때 절정에 이르렀다. 검찰의 공소사실 낭독이 끝난 뒤 그는 작심한 듯 입을 열었다. “검찰이 말한 공소사실의 모든 것은 근거가 없는 것이고 어떤 것은 정말 소설의 픽션(허구) 같은 이야기다.” 검사 12명이 앉아 있는 검사석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그는 ‘사자후’를 토해냈다. “검찰의 공소장은 법률가가 쓴 법률 문서라기보다 소설가가 미숙한 법률 자문을 받아서 한 편의 소설을 쓴 것이라고 생각될 정도다. 공소장 첫머리에는 흡사 피고인들이 엄청난 반역죄나 행한 듯 재판으로 온갖 거래 행위를 획책했다고 하고는 결론 부분에 이르면 재판 거래는 온데간데없고 심의관들에게 문건·보고서를 작성하게 한 게 직권남용이라고 끝을 낸다. 용두사미라는 말이 있지만, 용은커녕 뱀도 제대로 그리지 못했다.”

그의 발언에 검사들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하지만 그는 검사들의 반응에 아랑곳없이 날 선 비난을 이어갔다. “삼권분립을 기초로 하는 민주 절차를 채택하고 시행하는 나라에서 법원에 대해서 이토록 잔인한 수사를 한 사례가 대한민국 외에 어디에 더 있는지 묻고 싶다. 법원에 대해 이런 수사를 할 지경이라면 대한민국 국민 누구한테라도 이런 수사를 못하겠느냐. 비대해지는 검찰권 앞에 누구도 이제는 대적할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는 프랑스 역사가 앙드레 모루아의 명언을 인용하며 말을 마쳤다. “‘증오하는 권력에 대해서 공포심 때문에 복종하는 것만큼 비참한 나라가 없다’는 말이 있다. 나는 이번 재판이 우리의 앞날을 결정하는 재판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원고도 없이 무려 25분 동안 이어진 그의 격정적인 진술은 공범과 변호인들을 고무했는지 몰라도 방청객들의 호응을 얻는 데는 실패했다. 이날 방청석은 참여연대가 모집한 ‘사법 농단 재판 시민방청단’ 30여 명을 제외하고는 자리가 비어 있었다. 참여연대는 사법부 ‘블랙리스트’ 의혹이 불거진 2018년 1월 양 전 대법원장을 검찰에 고발한 바 있다. 양 전 대법원장의 진술이 이어지는 동안 시민방청단에서는 혀를 끌끌 차는 소리가 들렸다. 그의 당당한 모습에 노골적으로 반감을 드러낸 방청객도 있었다.

양 전 대법원장의 검찰 수사에 대한 비난은 법원에도 부담이 될 수밖에 없다. 검찰 수사 결과를 토대로 그의 구속영장을 발부하고, 보석을 기각한 곳은 다름 아닌 법원이기 때문이다. 검찰은 재판 다음날인 5월30일 바로 반격에 나섰다. 검찰 관계자는 “양 전 대법원장의 보석은 지금 재판을 지휘하는 재판부가 기각했다. 피고인의 범죄 혐의가 중대하다는 점을 검찰이 충분히 소명했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보석을 기각한 것이다. 재판부가 소명됐다고 인정한 수사 결과를 양승태 피고인이 ‘미숙한 법률 자문을 받아 쓴 소설’로 치부하는 건 검찰뿐 아니라 재판부를 모욕한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꼬집었다.

간첩 조작 사건 피해자들에겐 사과 안 해

검찰은 박병대 전 대법관의 주장도 조목조목 반박했다. 앞서 박 전 대법관은 5월29일 재판에서 양 전 대법원장에 이어 피고인 모두진술을 하면서 “법원행정처 심의관 등의 조서를 읽어보면 검찰에서 겁박을 당하고 훈계와 질타를 받았음을 행간에서 느낄 수 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검찰 관계자는 “임종헌 피고인의 재판에 증인으로 출석한 전·현직 법관들은 예외 없이 검찰에서 자유롭게 사실대로 증언했다고 말한다. 박 피고인이 말하는 그런 주장을 한 사람은 한 명도 없다”고 반박했다.

양 전 대법원장의 검찰 수사에 대한 비판은 그의 과거 판결에 비춰보면 더욱 공허해진다. 그는 1986년 제주지법 부장판사 시절 조작된 간첩 사건으로 기소된 오재선씨에게 징역 7년을 선고했다. 오씨는 2018년 8월 재심에서 무죄가 선고됐다. 오씨는 30여 년 전 공안 당국에 끌려가 모진 고문을 받으며 허위자백을 강요당했다. 공안 당국은 오씨가 조총련(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의 지령을 받아 간첩 활동을 했다는 내용으로 공소장을 꾸몄다. 오씨는 법정에서 고문받았다고 진술했으나, ‘재판장 양승태’는 조작된 공소사실을 모두 인정했다. 양 전 대법원장은 오씨 사건을 포함해 모두 6건의 간첩조작 사건에 관여했다. 재일동포 김동휘·이원이·장영식·조득훈 간첩조작 사건에서는 배석판사로, 오씨 사건과 강희철 간첩조작 사건에서는 재판장으로 관여했다. 이 6건은 모두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양 전 대법원장은 자신의 첫 재판에서 “검찰 신문을 받아보지 못한 사람은 잘 모르겠지만, 내가 처음으로 받아보니 정말 검사의 조서를 조심해서 읽어야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가 30여 년 전에 이를 깨달았다면 오씨를 비롯한 6명의 피해자는 나오지 않았을지 모른다. 양 전 대법원장은 2011년 대법원장 청문회 때 오씨에게 사과할 뜻이 있는지를 묻는 질문에 “사과해야 될 그런 기회가 오면 얼마든지 표명할 수 있다. 기본적으로 구체적인 권리구제는 재심 절차나 이런 것들을 통해 이루어질 것으로 생각된다”고 말한 바 있다. 하지만 이후에도 그는 오씨 등에게 사과하지 않았다.

검찰 수사에 대한 강도 높은 비난은 사법 농단 피고인들의 공통된 재판 전략이다. 검찰 수사의 허점을 공격하는 것은 검찰의 공소 유지를 어렵게 할 뿐만 아니라 재판부에 부담을 주는 효과도 있다. 재판 경력이 피고인들보다 한참 모자란 재판부로서는 피고인들의 공통된 주장에 귀 기울이지 않을 수 없다. 가장 먼저 기소된 임종헌 전 차장은 검찰 공소장을 “검찰발 미세먼지로 생긴 신기루”라고 비난했다.

사법 농단 피고인들 검찰 비난, 재판부에도 부담

유해용 전 대법원 수석재판연구관도 5월27일 첫 공판에서 검찰 수사를 강도 높게 비판했다. 그는 “검찰 수사는 총체적으로 위법했다. 판사들이 자기 일이 되고서야 기본적·절차적 권리를 따진다는 질책은 뼈아프게 받아들이지만, 이번 기회에 디딤돌이 될 판례 하나 남기는 것이 나의 운명이라고 생각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그의 혐의는 개인 비리 성격이 강해서 ‘디딤돌이 될 만한 판례’가 될지는 의문이다.

그는 2016년 2월부터 1년여 동안 대법원 수석재판연구관으로 일하면서 후배 재판연구관들이 작성한 보고서 등을 이동식 저장장치(USB)에 담은 뒤 2018년 초 법원을 퇴직할 때 갖고 나왔다. 검찰은 그가 이 자료를 사건 수임에 활용한 것으로 본다. 검찰 관계자는 “그가 가지고 나온 자료는 변호사업계에서 부르는 게 값일 만큼 귀한 자료다. 만약 검사가 검찰에서 수사 중인 자료를 모두 갖고 나왔다면 엄청나게 비난받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유 변호사는 법원이 압수수색영장을 검토하는 동안 이 자료를 모두 파기했다. 앞서 검찰은 유 변호사가 임종헌 전 차장에게 박근혜 전 대통령의 ‘비선’ 주치의인 김영재씨 부인 박채윤씨 소송 관련 정보를 건네준 단서를 잡고 압수수색하다 그의 컴퓨터에서 이 자료를 발견했다. 검찰은 유 변호사에게서 “자료들을 그대로 보존하겠다”는 서약서를 받고 새 압수수색영장을 발부받기 위해 현장에서 철수했다. 유 변호사는 이 틈을 타서 자료를 파기한 것이다. 그는 이 자료를 반납하라는 대법원의 요청에 “출력물은 파쇄했고, 컴퓨터 저장장치는 분해해서 버렸다”고 답변했다. 검찰은 증거인멸 혐의 등으로 유 변호사의 구속영장을 청구했으나 법원은 “죄가 되지 않는다”며 기각한 바 있다.

1차 구속 만기일은 8월10일

검찰은 양승태 전 대법원장도 임 전 차장과 마찬가지로 재판 지연 전략을 쓸 것으로 본다. 검찰 관계자는 “피고인 쪽의 노골적인 비협조로 6개월 안에 끝나야 하는 구속 사건 재판이 4개월 만에 처음 열렸다. 다른 일반인들 형사사건에서는 전례를 찾아볼 수 없는 일이다. 그럼에도 피고인 쪽은 4개월 전에 했던, ‘기록이 너무 많아서 아직 다 읽어보지 못했다’는 말만 되풀이하고 있다”고 말했다. 양 전 대법원장의 1차 구속 만기일은 8월10일이다. 지금 추세라면 그의 석방 가능성은 커 보인다. ‘불구속 재판’은 형사재판의 기본 원칙이다. 하지만 피고인이 누구냐에 따라 달리 적용된다면, 피고인 신분에 따라 구속과 불구속이 결정된다면, 그것은 원칙이 아니라 ‘특권’이라 불려야 한다.

이춘재 기자 cjl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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