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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료판사의 ‘받아쓰기 납품’

사법 농단 주역 임종헌 재판서 드러난 정무적·맹목적 사법행정 실태
등록 2019-04-13 02:13 수정 2020-05-02 19:29
2018년 11월1일 신임 법관들이 김명수 대법원장(가운데) 앞에서 “헌법과 법률에 의해 양심에 따라 독립해서 재판한다”고 선서하고 있다. 연합뉴스

2018년 11월1일 신임 법관들이 김명수 대법원장(가운데) 앞에서 “헌법과 법률에 의해 양심에 따라 독립해서 재판한다”고 선서하고 있다. 연합뉴스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피고인)의 4월2일 공판은 ‘흥행’이 예고됐다. 사법 농단 재판에 처음으로 현직 판사가 증인으로 나온데다, 그 증인이 피고인을 상관으로 ‘모셨던’ 전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동고동락했던 선후배 판사들이 법정에서 서로에게 불리한 증언을 해야 하는 상황은 언론의 입맛에 딱 맞는 기삿거리였다. 어설픈 법정 드라마보다 더 극적인 장면이 기대됐다. 하지만 ‘소문난 잔치엔 먹을 게 없다’고 했던가. 이날 밤 12시까지 진행된 공판에서 피고인과 증인은 서로 적당한 선을 지키며 낯 뜨거운 장면은 연출하지 않았다.

‘정무적 감각’이란 무엇인가

그렇다고 흥행에 완전히 실패한 것은 아니었다. ‘극적인 장면’은 없었지만 사법개혁 차원에서 중요한 진술은 많이 나왔다. 특히 증인인 정다주 의정부지법 부장판사의 진술로 ‘관료판사’(법원행정처 근무 경험이 많은 판사)의 실체가 공개된 것은 의미가 컸다. 일반 관료보다 더 정치적이고 더 맹목적인 ‘엘리트’ 판사들이 사법부를 어떻게 오염시켰는지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법원행정처 기획조정심의관을 지낸 정 판사가 후임자에게 보낸 ‘업무 인수인계’ 전자우편이 대표적이다. 검찰에 압수된 이 전자우편에는 법원행정처의 ‘신참’ 심의관에게 건네는 다음과 같은 조언이 있었다. “뉴스에 주의를 기울이고 정무적 감각을 키울 필요가 있음.” 검찰은 정 판사에게 ‘정무적 감각’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물었으나 별다른 설명을 듣지 못했다고 한다. 법원행정처 근무 경험이 있는 한 판사는 “행정처에서 요구하는 정무적 감각은 사법행정을 추진할 때 정치적 상황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능력”이라고 말했다. 사법 농단으로 기소된 고영한 전 법원행정처장은 2016년 2월22일 취임식에서 “여러분의 사고가 사법부에 한정될 경우 사법행정에서 발생하는 문제에 사후적으로 대처할 수밖에 없다”며 정무적 감각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정무 능력은 뛰어나지만 사유 능력은…

하지만 ‘정무적 감각을 키우라’는 말은 판사를 위한 조언으로 적합하지 않다. 정무적 감각이 법관 사회의 금과옥조인 ‘재판의 독립’과 충돌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재판의 독립은 주로 정치권력으로부터 독립을 의미한다. 정무적 감각이 뛰어나다는 말을 듣던 판사가 재판 오염 논란을 일으킨 사례는 적지 않다. 대표적인 게 신영철 전 대법관이다. 신 전 대법관은 법원 안에서 ‘정치 판사’라 할 정도로 뛰어난 정무적 감각을 자랑했다. 그는 이명박 정권에서 서울중앙지법원장을 지낼 때 ‘촛불 재판’을 특정 재판부에 집중 배당하고 형사단독판사들에게 촛불집회 재판을 빨리 처리하도록 압력을 준 사실이 드러났다. 이명박 정권은 이런 공로를 높이 평가해 그를 대법관에 임명했는데, 서울중앙지법을 비롯한 일선 판사들이 이에 반발해 그의 대법관직 사퇴를 요구하는 의견서를 내기도 했다.

정 판사는 행정처 심의관 가운데 정무적 감각이 뛰어난 판사로 잘 알려졌다. 증인신문에서 임 전 차장의 변호인도 “보고서 작성 능력, 정세 분석 능력 등이 뛰어나다는 평가를 들어서 (정무적 보고서를) 많이 작성했다는데, 맞나”라고 물어볼 정도였다. 그는 2013년 2월부터 2년간 행정처 기획조정심의관으로 근무하면서 ‘원세훈 전 국가정보원장 사건 관련 검토’ 등 사법 농단 사건에 등장하는 주요 문건을 작성했다. 2015년 서울중앙지법으로 옮긴 뒤에도 법관들의 익명 커뮤니티(‘이판사판야단법석’) 동향을 파악해 임 전 차장에게 보고했다. 정 판사는 그해 8월 양승태 전 대법원장과 박근혜 전 대통령의 면담을 앞두고는 ‘현안 관련 말씀 자료’ ‘정부 운영에 대한 사법부의 협력 사례’ 등의 문건 작성에도 관여했다.

하지만 그는 ‘사유하는 능력’은 부족한 듯했다. 자기가 하는 일이 옳은지 그른지를 판단하고 그에 따라 행동하는 능력이 떨어져 보였다. 정 판사는 증인신문에서 사법 농단 관련 문건은 모두 임 전 차장이 불러주는 대로 받아쓰기를 했다고 진술했다. “내가 하는 업무는 주어진 주제에 관해 직접 검토해서 타당한 결론을 도출하고 그 결과를 보고서 형태로 피고인(임 전 차장)에게 보고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피고인이 이 주제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구술해주면 그것을 문장이 되도록 문서 형태로 작성한 뒤 피고인에게 건네는, 일종의 납품을 하는 업무였다.” 그의 ‘납품’이라는 말에 법정 안이 술렁였다. 상관의 지시를 맹목적으로 따랐음을 강조하려고 선택한 듯했지만 씁쓸함을 남기는 말이었다.

“당시 했던 업무 하나하나가 후회스럽다”

정 판사의 맹목적인 ‘받아쓰기’ 사례는 계속 공개됐다. “증인은 어떤 이유로 문건에 ‘과거 왜곡의 광정(匡正·잘못된 것을 바로잡아 고침)’이라는 제목을 달았나?”(검사) “피고인이 제목을 그렇게 달아달라고 했다.” “왜 전교조 법외노조 통보 사건을 통진당 (위헌정당 해산 심판) 선고 이전에 결정해야 극적인 효과가 날 거라고 문건에 적었나?”(검사) “그것도 피고인이 구술해준 내용이다.” “행정처에서 일선 법원의 재판을 지연시키도록 주문이 가능하기 때문에 이런 표현을 쓴 게 아닌가. 일선 법원에 영향력을 행사할 가능성이 없다면 애초 이런 문건을 작성할 수 없는 게 아닌가?”(검사) “내가 알지 못하고 있고, 피고인이 구술한 것을 적은 것이기 때문에 말하기 어렵다.”

이때 재판장이 나섰다. “증인 의견을 듣겠다. (질문에) 말씀해보라.” 행정처에 근무하는 엘리트 판사가 상관이 불러준 대로 받아쓰기를 했다는 말이 믿기 어렵다는 듯 윤종섭 부장판사는 직접 정 판사에게 물었다. 윤 부장판사는 행정처 근무 경험이 전혀 없는, 18년 동안 재판 업무만 해온 판사였다. “(보고서 작성) 당시 증인은 재판에 영향을 줄 수도 있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었나?” “그 당시 그런 부분까지 깊이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그것이 가능했는지, 지금도 정확한 판단을 내리기 어렵다. 나도 혼란스럽다. 그래서 답변하기 어렵다.” 재판장은 정 판사의 얼굴을 한동안 뚫어져라 바라봤다.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이 2016년 10월18일 국회 국정감사에서 답변하고 있다. 그는 대표적인 ‘관료판사’였다. 연합뉴스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이 2016년 10월18일 국회 국정감사에서 답변하고 있다. 그는 대표적인 ‘관료판사’였다. 연합뉴스

형사처벌 위기 앞에 각자도생

정 판사는 왜 받아쓰기를 할 수밖에 없었는지 설명했다. “검사의 질문에 고민할 수밖에 없는 것은, 기본적으로 피고인이 구술한 것을 작업했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부끄럽지만, 당시 2년차 심의관에 불과했다. 업무 처리에 급급해서 내가 하는 일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못했다. 업무를 빨리 처리해야 한다는 타성에 젖어 있었던 것 같다. 부적절한 짓이라는 생각을 미처 못했다.” 그는 앞서 검찰에서 조사받을 때 “사법부에 위험한 내용의 보고서를 작성한 것이 부담스러웠다. 당시 했던 업무 하나하나가 후회스럽다”고 진술했다. 검사가 이 진술을 공개하자 그는 “위험하다고 말한 것은, 대외비로 다뤄져야 할 내용이 대외적으로 공표될 경우 위험하다는 의미다. 문건이 부연 설명 없이 공개되면 왜곡, 과장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지금은 후회의 강도가 약해진 듯 그의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상관의 지시를 맹목적으로 따랐던 부하를, 상관들은 보호해주지 않았다. 임 전 차장은 사법 농단 사건이 불거진 뒤 정 판사에게 전화를 걸어 “미안하다. 설마 심의관들까지 화가 미치겠느냐고 생각했는데, 윗분들이 책임져야 하는데, 지금은 그런 단계를 넘어선 것 같다”고 말했다. 검찰 수사를 ‘네가 알아서 방어하라’는 말이었다.

전통적으로 행정처 판사들은 ‘앞에서 끌어주고 뒤에서 밀어주는’ 끈끈한 조직력을 자랑했다. 노회찬 전 의원이 2017년 10월에 낸 자료를 보면, 고법부장 이상 고위 법관 179명 중 행정처나 대법원 재판연구관 출신이 140명(78.2%)에 이른다. 179명 가운데 37명(20.6%)은 행정처만을, 42명(23.5%)은 행정처와 재판연구관을 모두 거쳤다. 은 이용훈·양승태 대법원장 시절 행정처에서 근무한 판사 456명(연인원)을 전수조사했더니 고법부장 승진율이 100%로 나타났다고 보도했다. 행정처 출신이면 모두 고법부장으로 승진했다는 말이다. 하지만 관료판사들도 형사처벌의 위기 앞에서는 각자도생을 택했다. 정 판사뿐 아니라 다른 심의관들도 검찰에서 임 전 차장과 양승태 전 대법원장 등에게 불리한 진술을 했다. 정 판사보다 더한 내용의 진술을 한 심의관들도 있다고 검찰은 전했다.

정재민 판사가 자리 주선을 거절한 이유

“법관은 헌법과 법률에 의하여 그 양심에 따라 독립하여 심판한다.”(헌법 제103조) 행정처 판사들은 이 헌법 조항이 재판 업무에만 해당한다고 믿는 걸까. 사법행정 업무는 위법한 일도 상관의 지시가 있으면 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걸까. 4월9일 열린 임 전 차장의 8차 공판은 이런 생각이 잘못된 것임을 일깨웠다.

이날 증인으로 출석한 정재민 전 의정부지법 판사는 사법 농단의 핵심인 ‘강제징용 재판 거래’ 당시 외교부 파견 근무를 했다. 당시 외교부 고위 간부들은 일본 전범기업의 강제징용 배상 책임을 인정한 2012년 5월 대법원 판결(주심 김능환 대법관)에 강한 불만을 갖고 있었다.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에 따라 개인청구권이 소멸됐다는 게 당시 외교부의 기본 입장이었기 때문이다. 정 전 판사는 당시 외교부 간부들에게서 “‘대법원에 가서 외교부 입장을 설명할 수 있도록 자리를 주선해달라’는 부탁을 받았으나 이를 거절했다”고 증언했다. 그는 거절한 이유를 묻는 검사의 질문에 “법조인들은 법대 다닐 때 삼권분립의 의미를 배웠지 않나. 그래서 (외교부 간부들의 부탁을 들어주는 것은) 안 된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재판의 독립은 중요하고, 대법원은 더욱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다. 대법원에 있는 판사들이 외교부 사람들을 만나서는 안 된다.”

증인신문이 끝난 뒤 재판장이 밝은 표정으로 인사했다. “증인, 정말 수고하셨습니다.”

이춘재 기자 cjl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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