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양승태, 자신이 반대했던 논리 뒤에 숨다

사법 농단 재판에서 ‘공소장일본주의’ 등

피고인의 방어권 보장 꺼내 든 양 전 대법원장
등록 2019-05-04 03:24 수정 2020-05-02 19:29
2009년 2월18일 신영철 대법관 취임식 당시 이용훈 대법원장을 비롯한 대법관들이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양승태 당시 대법관은 박시환 대법관 등 ‘독수리 5형제’와 치열한 법리 논쟁을 벌였다. 사진 앞줄 왼쪽부터 박시환·김영란·김용담 대법관, 이용훈 대법원장, 신영철·양승태·김지형 대법관, 뒷줄 왼쪽부터 차한성·전수안·박일환·이홍훈·김능환·안대희·양창수 대법관. 연합뉴스

2009년 2월18일 신영철 대법관 취임식 당시 이용훈 대법원장을 비롯한 대법관들이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양승태 당시 대법관은 박시환 대법관 등 ‘독수리 5형제’와 치열한 법리 논쟁을 벌였다. 사진 앞줄 왼쪽부터 박시환·김영란·김용담 대법관, 이용훈 대법원장, 신영철·양승태·김지형 대법관, 뒷줄 왼쪽부터 차한성·전수안·박일환·이홍훈·김능환·안대희·양창수 대법관. 연합뉴스

양승태 전 대법원장은 대법관 시절(2005년 2월~2011년 2월) ‘독수리 5형제’와 대척점에 서 있었다. 사법부 보수 세력을 대표한 그는 강고한 ‘보수연합’을 이끌며 이홍훈·전수안·박시환·김영란·김지형 등 진보 성향 대법관들을 소수로 만들었다. 국가보안법과 집시(집회·시위)법 위반 사건 등에서 시민의 권리를 앞세운 ‘독수리 5형제’는 공권력을 우선시하는 양 전 대법원장 쪽과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다른 사건에서도 많이 부딪쳤다. 양 전 대법원장은 학생들에게 기독교 예배를 강요해 종교의 자유를 침해한 ‘대광고 종교 교육 사건’(일명 강의석 사건)에서 “스승에게 불손한 행동을 한 것은 퇴학당할 만하다”며 학교 편에 섰다. 당시 진보 대법관들은 “종교의 자유 침해에 저항한 강의석을 퇴학시킨 것은 부당하다”며 강씨 손을 들어줬다. 이는 진보 대법관들이 주도한 유일한 법정의견(다수의견)이었다. 삼성에버랜드 전환사채(CB) 헐값 발행 사건에서 양 전 대법원장은 이건희 회장에게 무죄를 선고한 다수의견보다 더 관대한 별개의견을 내기도 했다. 진보 대법관들은 이 회장을 처벌해야 한다는 소수의견을 냈다.

진보 대법관과 사사건건 부딪친 양승태

하지만 양 전 대법원장은 지금 ‘독수리 5형제’의 신세를 톡톡히 지고 있다. 사법 농단 재판의 피고인이 된 탓이다. 그의 변호인은 과거 진보 대법관들이 목소리를 높였던 ‘피고인의 방어권 보장’을 연일 주장하고 있다.

대표적인 게 ‘공소장일본주의’다. 공소장일본주의는 피고인을 기소할 때 공소사실만 적은 공소장을 제출해야 한다는 형사소송법의 기본 원칙이다. 재판부가 피고인의 유무죄를 판단하는 것은 법정에서 검사와 피고인의 공방을 지켜본 뒤 해야 한다. 이를 위해선 재판부가 공판 시작 전에 유무죄를 예단하지 말아야 한다. 그런데 검찰이 공소사실 외에 다른 내용을 추가한 공소장이나 수사기록 등을 함께 제출하면 그것을 본 재판부가 예단할 수 있다. 이렇게 되면 피고인은 재판에서 현저하게 불리해진다.

양 전 대법원장 쪽은 공판준비기일(공판 준비를 위한 재판으로 피고인은 출석 의무가 없다) 시작 전에 재판부(서울중앙지법 형사35부 재판장 박남천)에 의견서를 제출해 검찰의 ‘공소장일본주의 위반’을 지적했다. 재판부는 이를 일부 반영해 3월25일 첫 공판준비기일에서 “공소장에 공소사실과 직접 관계가 없거나 너무 장황하고 불필요하게 기재된 부분이 있다”며 검찰에 공소장 변경을 요구했다. 그러자 양 전 대법원장 쪽은 한발 더 나아가 4월22일 3차 공판준비기일에서 “공소장 변경이 아니라 아예 공소기각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이는 진보 성향 대법관들이 10년 전 문국현 창조한국당 대표의 선거법 위반 사건에서 밝혔던 소수의견과 맥을 같이한다. ‘검찰이 공소장일본주의를 위반했다면 당연히 공소기각 결정을 내려야 한다’는 의견이었다. 그런데 당시 양 전 대법원장은 이 소수의견을 반박하는 보충의견을 냈다. 자신이 10년 전 반박했던 의견에 지금은 매달릴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된 것이다.

이 사건은 2008년 18대 총선에서 이명박 정권의 실세로 꼽혔던 이재오 의원을 꺾고 당선된 문 대표가 1년 반 만에 의원직을 상실해 야당 탄압 논란을 일으킨 사건이다. 창조한국당은 당시 총선 출마를 원하는 비례대표 후보한테서 6억원을 빌리면서 연 1% 이율의 ‘당채’(당 사무처에서 발행한 채권)를 발행해줬다. 검찰은 1%가 시중금리보다 낮아 그 차이만큼 창조한국당이 이득을 얻었기 때문에 사실상 공천헌금이라며 문 대표를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로 기소했다.

문국현 유죄판결 기억 안 나시나요?

문 대표는 1·2심에서 모두 당선 무효형인 징역 8월이 선고되자 상고했고, 대법원은 전원합의체에서 이 사건을 심리했다. 변호인들은 검찰이 법원에 제출한 공소장에 공소사실 외에 창조한국당 당직자들이 주고받은 전자우편과, 비례대표 후보자와 문 대표의 통화 내용 등 온갖 잡다한 것을 덧붙인 것에 주목했다. 변호인들은 검찰이 공소장일본주의를 위반했기 때문에 공소기각 결정을 내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9 대 4로 문 대표의 상고를 기각했다. 다수의견은 “피고인이 1·2심에서 아무런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고, 법원 역시 범죄 사실의 실체를 파악하는 데 지장이 없다고 판단해서 공판이 진행되어 법관의 심증 형성이 이미 이뤄졌다면, 공소장일본주의를 어겼다는 이유로 공소를 기각할 수 없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전수안·박시환·김영란·김지형 대법관은 “공정성에 흠이 있는 상태로 재판이 시작되면 그 이후의 모든 재판 과정에 첫 단계의 불공정성이 영향을 미쳐 전체 재판 과정에 심각한 흠이 생기게 되기 때문에 공소기각 결정을 내려야 한다”고 반박했다.

그러자 양 전 대법원장은 소수의견을 반박하는 보충의견을 냈다. 그는 “사안이 복잡하거나 범행 수법이 교묘한 경우에는 범행에 이르는 과정이나 배경 등 전후의 정황에 관한 설명 없이 단순한 범죄 구성요건에 해당하는 행위만을 기재해서는 공소사실을 완성도 높게 특정할 수도 없다. (중략) 검사가 공소장에 필요한 범위에서 그와 같은 사실을 기재하고, 공판 과정에서 증거를 제출함으로써 이를 입증하고자 하는 것은 형사공판 절차의 자연스럽고 당연한 과정”이라고 밝혔다. 그는 소수의견을 낸 대법관들을 꾸짖기도 했다. “공소장일본주의를 소수의견과 같이 지나치게 형식적이고 경직되게 이해한다면 오히려 형사사법 절차를 비효율적, 비현실적으로 만들어 정의의 실현에 장애가 초래될 것이다”라고 일갈했다.

그의 의견은 지금 사법 농단 재판에서 검찰의 반박 논리로 활용된다. 검찰은 3월25일 첫 공판준비기일에서 이렇게 반박했다. “이 사건은 지난 6년 동안 양 전 대법원장을 정점으로 한 조직에서 반복적으로 저지른 복잡한 범죄를 다루고 있다. 직권남용 범죄의 특성을 보면 외견상 정당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그 과정을 장황하게 설명하지 않을 수 없다. 전후 사정과 범행 동기 등을 자세히 설명해야 공소 유지가 가능하다.” 검찰은 공소장에 적힌 내용을 모두 재판에서 입증하겠다고 벼르고 있다.

이처럼 과거의 소신과 정반대 주장을 한 탓에 양 전 대법원장 쪽이 외치는 ‘피고인의 방어권 보장’은 진정성을 의심받는다. 검찰은 그의 주장을 ‘시간 끌기 전략’으로 규정한다. 검찰 관계자는 “사법 농단 사건은 이미 대법원 진상조사단에서 한 차례 조사해 공개된 것이다. 큰 줄거리는 그때 다 공개됐는데, 검찰 수사기록을 보고 재판부가 더 갖게 될 예단이 뭐가 있다는 말인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박병대 전 대법관이 2018년 11월19일과 23일 검찰 수사를 받기 위해 출석하고 있다. 한겨레 신소영 기자

박병대 전 대법관이 2018년 11월19일과 23일 검찰 수사를 받기 위해 출석하고 있다. 한겨레 신소영 기자

사법 농단 피고인들, 미세하게 균열

사법 농단의 ‘윗선’에 대한 본격적인 재판을 앞두고 피고인들 사이에 미세한 균열도 감지된다. 4월30일 4차 공판준비기일에서 양 전 대법원장과 함께 기소된 박병대·고영한 전 대법관의 변호인들은 강제징용소송 등 재판 거래 의혹 문건을 작성한 법원행정처 심의관들을 먼저 증인신문하자고 주장했다. 이는 보고서가 누구의 지시에 따라 작성됐고, 누가 수정했는지, 어디까지 보고됐는지 등을 확인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박 전 대법관과 고 전 대법관은 차례로 법원행정처장을 지냈기 때문에 보고서 작성과 수정 시점에 따라 법적 책임이 달라질 수 있다. 법원행정처 고위 간부 출신의 한 변호사는 “강제징용소송의 경우 무려 5년간 재판이 지연됐는데, 이때 작성한 문건들은 작성을 지시한 간부와 보고만 받은 간부가 다를 수 있다. 이를 분명하게 구분하기 위해 문건 작성자들을 먼저 조사하자고 한 것 같다”고 말했다.

앞서 임종헌 전 차장의 4월23일 공판에 증인으로 출석한 이민걸 전 법원행정처 기획조정실장은 양 전 대법원장의 강제징용소송 개입 혐의를 부인했다. 그는 검찰 조사 때는 ‘2016년 9월 양 전 대법원장이 강제징용 재상고 사건 전원합의체 회부를 검토하는 것에 대해 말했고, 본인 임기 중에는 결론을 내리기 어렵다고 했다’고 진술한 바 있다. 그가 검찰 진술 내용을 부인한 것은 양 전 대법원장을 보호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반면 이 전 실장은 임 전 차장의 혐의에 대해서는 “(법원행정처가) 오만했다”와 “타성에 젖어 있었다”는 표현을 써가며 에둘러 인정했다. 이는 임 전 차장의 윗선으로 법적 책임이 확산되는 것을 막기 위한 의도로 보인다. 하지만 이 전략이 통할지는 미지수다. 이 전 실장이 검찰에서 한 진술은 객관적 증거로도 뒷받침되기 때문에 그의 진술 번복은 오히려 역효과를 낳을 수 있다. 대법원이 강제징용 재상고심에서 외교부의 의견서를 받으려고 노력했다는 사실 자체가 전원합의체 회부를 겨냥한 것이기 때문이다.

고영한 전 대법관이 2018년 11월19일과 23일 검찰 수사를 받기 위해 출석하고 있다. 한겨레 신소영 기자

고영한 전 대법관이 2018년 11월19일과 23일 검찰 수사를 받기 위해 출석하고 있다. 한겨레 신소영 기자

그들은 언제까지 한배를 탈까

특히 임 전 차장과 이 전 실장이 외교부 관료들을 만났을 때 배석한 외교부 직원이 작성한 문건에는 대법원이 전원합의체 회부를 추진한다는 내용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 내용은 당시 윤병세 외교부 장관에게 보고됐다고 한다. 사법 농단 피고인들은 한배를 탄 운명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서로 이해관계가 엇갈리는 관계다. 미세한 균열이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되는 것은 시간문제일지도 모른다.

이춘재 기자 cjlee@hani.co.kr
이 후원제를 시작합니다
이 기존 구독제를 넘어 후원제를 시작합니다. 은 1994년 창간 이래 25년 동안 성역 없는 이슈 파이팅, 독보적인 심층 보도로 퀄리티 저널리즘의 역사를 쌓아왔습니다. 현실이 아니라 진실에 영합하는 언론이 존속하기 위해서는 투명하면서 정의롭고 독립적인 수익이 필요합니다. 그게 바로 의 가치를 아는 여러분의 조건 없는 직접 후원입니다. 정의와 진실을 지지하는 방법, 의 미래에 투자해주세요.

*아래 '후원 하기' 링크를 누르시면 후원 방법과 절차를 알 수 있습니다.
후원 하기 http://naver.me/xKGU4rkW
문의 한겨레 출판마케팅부 02-710-0543




독자 퍼스트 언론, 정기구독으로 응원하기!


전화신청▶ 1566-9595 (월납 가능)
인터넷신청▶ http://bit.ly/1HZ0DmD
카톡 선물하기▶ http://bit.ly/1UELpok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