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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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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은과 트럼프의 ‘시간게임’

북–미 교착상태서 3차 정상회담 열리게 할 만한 문재인 대통령의 한국식 해법은
등록 2019-04-20 11:02 수정 2020-05-03 04:29
11일(현지시각)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한-미 정상회담에 앞서 발언하고 있다.

11일(현지시각)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한-미 정상회담에 앞서 발언하고 있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건곤일척 승부가 3회전으로 접어들었다. 2017년 세계 언론의 지면을 내내 장식했던 1회전은 전쟁도 불사할 수 있다는 ‘치킨게임’이었다. 반면 2회전은 문제 해결을 위해 ‘속도전’을 하자는 것이었다. 2018년 6월 싱가포르에서 열린 사상 최초의 북-미 정상회담에선 새로운 북-미 관계 수립, 한반도 평화체제 수립과 완전한 비핵화 실현, 그리고 미군 유해 송환에 합의하면서 이들 합의를 “신속하게 이행하기로” 한 것이다.

약점 잡았다고 자신만만한 트럼프

하지만 두 정상의 속도전 다짐은 곧 교착상태에 자리를 내주고 만다. 그리고 베트남 하노이 2차 북-미 정상회담 ‘노딜’(No deal·성과 없이 결렬) 이후 3회전의 양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그것은 바로 ‘시간게임’이다. 미국은 제재가 길어질수록 북한이 겪을 고통도 커질 것이라며 북한의 양보를 자신한다. 북한은 제재는 “자력갱생”으로 무력화할 수 있다며 “미국이 지금의 정치적 계산법을 고집한다면 문제 해결의 전망은 어두울 것이며 매우 위험할 것”이라고 경고한다. 이처럼 북-미 관계의 교착상태가 길어지면서 문재인 정부는 천재일우의 기회를 놓치지 않을까 노심초사하면서 심기일전을 다짐하고 있다.

“급할 것 없다”며 시간게임에서 승리를 자신하는 트럼프 행정부의 최대 무기는 대북제재다. 트럼프는 하노이 정상회담에서도 김정은이 제재 문제 해결을 얼마나 간절히 원하는지 확인한 터다. 이걸 김정은의 약점으로 여긴다. ‘제재 해제로 경제 발전을 원한다면, 내 요구를 수용하라’는 것이다. 이 기조는 하노이 회담 이후에도 계속되고 있다.

트럼프는 3월29일 “북한은 굉장히 고통받고 있다. 그들은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다”고 말했다.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 역시 4월2일에 “북한 비핵화에 정해진 시간표가 없다”면서도, “북한을 압박하는 대북제재가 그 시간표를 앞당길 것”이라고 주장했다. 트럼프는 4월12일 한-미 정상회담 모두 기자회견에서도 “올바른 합의”를 위해 제재를 유지하겠다는 입장을 거듭 밝혔다.

그러자 김정은은 트럼프에게 ‘헛다리 짚지 말라’는 경고를 잇달아 내놓았다. 그는 4월10일 노동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를 주재한 자리에서 “자력갱생”의 힘으로 “제재로 우리를 굴복시킬 수 있다고 혈안이 되어 오판하는 적대세력들에게 심각한 타격을 주어야 한다”고 주문했다. 사흘 뒤 최고인민회의 시정연설에선 더욱 구체적인 입장을 밝혔다. 먼저 미국이 경제제재를 앞세워 “선 무장해제, 후 제도전복 야망을 실현할 조건을 만들어보려고 무진 애쓰고 있다”고 비난했다. 그가 말한 “무장해제”란 트럼프가 하노이에서 김정은에게 건넨 ‘비핵화 정의’ 문서에 담긴 것으로, 북한에 핵뿐만 아니라 생화학무기와 탄도미사일도 모두 포기하라는 요구를 지칭한다. 김정은은 미국의 의도가 제재로 “무장해제”를 관철하고 “제도 전복”을 하려는 것이라고 본다.

그러면서 제재에 더는 연연하지 않겠다는 입장도 밝혔다. “제재 해제 문제 때문에 목이 말라 미국과의 수뇌회담에 집착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며, “제재 해제 문제 따위에는 이제 더는 집착하지 않을 것이며 우리 힘으로 부흥의 앞길을 열 것”이라고 강조했다. 제재에 절대로 굴복하지 않겠다는 다짐이자 자력갱생으로 돌파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이런 발언을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 세 가지로 분석해볼 수 있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4월10일 노동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4월10일 노동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김정은, ‘헛다리 짚지 말라’며 자력갱생 강조

첫째는 미국에 더는 약점을 잡히지 않겠다는 것이다. 1차 정상회담부터 2차 정상회담까지 김정은이 미국과의 협상에서 얻은 교훈은, 제재 완화와 해제를 요구할수록 미국은 이를 북한의 약점으로 이용하려 한다는 것이다. 약점을 잡았다고 여긴 미국은 요구 수준을 크게 높였다. 그러자 김정은은 제재에 굴복하느니 자력갱생으로 돌파하겠다며 미국의 “최대의 압박”에 ‘최대의 김빼기’를 시도하고 있다.

둘째는 ‘협상의 법칙’을 재구성하겠다는 것이다. 제재 해제 요구를 내려놓을 테니 미국은 다른 상응 조치를 준비하라는 뜻이다. 이를 두고 일각에선 종전 선언이나 연락사무소 개소 같은 조치를 요구할 것이라는 분석을 내놓지만, 이보다 훨씬 강한 것을 바랄 공산이 크다. 여기에는 영변 핵시설 폐기의 상응 조치로 에너지 지원 같은 경제적 보상 요구가 포함될 수도 있고, 이보다 확실한 것은 군사적 상응 조치 요구가 될 것이다. 군사적 상응 조치에는 모든 한-미 군사훈련 중단, 전략자산의 한반도 배치와 전개 완전 중단, 한반도를 작전 반경에 둔 괌과 하와이 등의 전략자산 제거 등이 있을 수 있다.

이는 셋째 해석과 연결된다. 북한은 영변 핵시설 폐기와 제재 완화를 맞바꾸는 협상을 여전히 선호할 공산이 크다는 것이다. 김정은은 “(미국이) 지난번처럼 좋은 기회를 다시 얻기는 분명 힘들 것”이라고 했는데, 이는 “제재 해제에 더 이상 집착하지 않겠다”는 발언이 미국에 양자택일을 요구하는 것이라는 해석을 가능케 한다. 제재 문제 해결에 적극적인 태도를 보이든지, 아니면 제재 완화 외의 상응 조치를 준비하든지 말이다. 그런데 미국이 영변 핵시설 폐기의 상응 조치로 경제적 보상과 안보 전략에 중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군사적 상응 조치에 동의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북한은 바로 이 점을 의식해 ‘협상 법칙’을 바꿀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하면서 협상 법칙을 유지하고 싶어 하는 것이다.

제재를 둘러싼 북한과 미국의 신경전이 치열하게 전개되면서 한반도 비핵화 평화의 앞날은 짙은 안갯속으로 빠져들고 있다. 설상가상으로 미국은 ‘너무나 커서 잡을 수 없는’(too big to grasp) ‘비핵화+슈퍼 알파’를 들고나왔다.

양자 게임을 다자 게임으로

하지만 희망의 근거들도 있다. 김정은과 트럼프 모두 친분을 과시하면서 3차 북-미 정상회담 의사를 피력하고 있다는 점이다. 김정은은 시정연설에서 “3차 조-미 수뇌회담을 하자고 한다면 우리로서도 한 번은 더 해볼 용의가 있다”고 밝혔고, 트럼프도 곧바로 “3차 정상회담이 좋을 것이라는 데 동의한다”는 트위터를 날렸다. 물론 조건은 있다. 김정은은 “미국이 올바른 자세를 가지고 우리와 공유할 수 있는 방법론을 찾는 조건”을 달면서, 미국의 용단을 “올해 말까지” 기다리겠다고 했다. 트럼프도 “나는 빨리 움직이고 싶지 않다. 서두를 필요가 없다”며 김정은과의 시간게임에서 밀리지 않겠다는 의사를 표현했다.

하노이 노딜의 원인 가운데 하나였던 트럼프의 정치적 곤경이 많이 해소된 것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마이클 코언의 의회 청문회 후폭풍은 로버트 뮬러 특별검사팀의 수사 결과 발표로 잠잠해졌다. 트럼프-러시아 대선 공모설이 ‘찻잔 속 태풍’으로 끝난 것이다. 이에 고무된 트럼프는 4월9일 트위터에 2020년 대선 캠페인 영상물을 올렸다. 여기에는 트럼프가 김정은과 악수하는 장면도 담겼다. 그만큼 김정은과의 정상회담을 최고의 외교 업적으로 내세우면서 2020년 대선 이전에 큰 성과를 만들어내겠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은 것이다.

불분명하지만 주목할 것은 또 있다. 하노이 노딜의 결정적 이유가 되었던 ‘비핵화+슈퍼 알파’에 대해 트럼프가 그의 참모진과는 다른 목소리를 내왔다는 것이다. 폼페이오와 존 볼턴 국가안보보좌관 등은 비핵화에는 핵뿐만 아니라 탄도미사일과 생화학무기 프로그램도 모두 폐기 대상에 포함돼야 한다는 것을 줄곧 밝혀왔다. 하지만 트럼프는 공개적으로 비핵화나 ‘빅딜’을 언급하면서 이런 식으로 말한 적은 없다. 그는 2월28일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 직후 기자회견에서 비핵화에 대해 “많은 사람이 이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지 못하지만, 나에겐 매우 분명하다. 핵무기를 제거해야 한다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4월12일 한-미 정상회담 때도 “빅딜은 우리가 (북한의) 핵무기를 제거해야 한다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러한 표면적 차이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 예단할 수는 없다. 비핵화의 정의에 대해 트럼프와 그의 참모진이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지, 트럼프가 부지불식간에 하는 얘기인지, 먼저 목표의 최대치를 제시하고 나중에 이를 낮춰 현실 가능한 목표를 이루려는 협상술의 하나인지를 말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미국 대통령의 발언을 적극 활용할 필요가 있다. 비핵화와 빅딜의 핵심은 핵무기와 핵물질, 그리고 관련 시설을 폐기하는 것임을 명확히 하면서 ‘한국식 해법’을 마련해야 한다는 것이다.

시간게임을 달리 표현하면 ‘내가 공을 넘겼으니 네가 칠 차례’라는 것이다. 그런데 워싱턴은 평양에 공이 있다 하고, 평양은 워싱턴에 공을 넘겼다고 한다. 이러다 게임이 재개될 수도 있지만 이대로 끝날 수도 있다. 앞날이 불투명하다면 양자 게임을 다자 게임으로 바꾸는 것이 유력한 대안이 될 수 있다. 한국이 게임의 주선자를 넘어 당사자로 참여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식 해법’을 만들어서 말이다.

핵무기·핵물질을 러시아·중국으로 이전?

한국식 해법의 요지는 북한이 선호해온 ‘단계적 해법’과 트럼프가 고수해온 ‘빅딜’을 창의적으로 조합하는 것이다. 빅딜은 북핵 폐기와 이에 대한 근본적인 상응 조치, 즉 제재 해제, 평화협정 체결과 군비 축소, 북-미 관계 정상화를 맞바꾸는 것으로 정의하고 이에 대한 합의를 목표로 삼아야 한다. 이러 합의가 이뤄졌을 때, 영변 핵시설 폐기와 상당한 수준의 제재 완화를 중심으로 1단계 이행 조치를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핵무기와 핵물질을 미국에 넘기라는 미국식 요구의 비현실성을 지적하면서 그 대안으로 러시아나 중국으로 이전해 폐기하는 방안을 강구해볼 수 있을 것이다.

정욱식 평화네트워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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