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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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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 보건소에서 ‘난임 주사’ 맞게 해주세요”

난임 부부들 서울시 정책 제안 플랫폼

‘민주주의 서울’에 청원글 올리며 제도 개선 목소리 높여
등록 2019-01-12 13:42 수정 2020-05-03 04:29
1월9일 서울의 한 카페에서 만난 난임 여성들이 난임 병원에서 처방받은 주사액과 주사기를 보여줬다. 류우종 기자

1월9일 서울의 한 카페에서 만난 난임 여성들이 난임 병원에서 처방받은 주사액과 주사기를 보여줬다. 류우종 기자

“난임 시술을 받는 사람에게 시간 맞춰 꼭 맞아야 하는 생명줄과도 같은 주사가 있어요. 엉덩이에 놓는 근육주사인데 혼자 놓기 힘들어요. 매일 정해진 시간에 이 주사를 맞으려고 이 병원 저 병원 찾아다니는 난임인이 많아요.”

1월9일 서울 강동구 성내동의 한 카페에서 과 만난 이진희(38·가명)씨는 난임 부부들의 고충을 토로했다. 인공수정이나 시험관 시술을 할 때 최대 4~8주 동안 날마다 같은 시간에 엉덩이나 배에 스스로 주사를 놓아야 한다. 배에 놓는 주사는 배란이 잘되게 돕는 과배란유도제고, 엉덩이에 놓는 주사는 수정란 착상을 돕는 호르몬 프로게스테론을 투여하는 것이다. 특히 엉덩이 주사는 근육주사여서 스스로 하기가 어렵다. 잘못 놓으면 하반신 마비가 오기도 한다.

이날 이씨와 함께 온 난임 카페 ‘불임은 없다 아가야 어서 오렴’ 회원들도 같은 목소리를 냈다. 장명숙(45·가명)씨는 2002년부터 난임 병원에 다니며 19년째 아이를 기다리고 있다. “길게는 8주간 매일 주사를 맞아야 해요. 그때마다 반차를 내고 병원에 가기 힘들어요. 한두 번도 아니고 상사 눈치가 보이죠. 그래서 전 주사 대신 질정(질 안에 삽입하는 정제)을 쓰고 있어요. 주사가 질정보다 (여성호르몬 투여) 효과가 높은데 어쩔 수 없이 질정을 쓰는 거예요.”

이 병원 저 병원 찾아다니는 ‘주사 난민’

민지희(31·가명)씨는 “난임 시술 때도 엉덩이 주사를 맞지만 임신하고 유산기가 있을 때도 맞는다”며 “지난해에 임신했는데 유산기가 있어 이 주사를 맞아야 했다”고 했다. 동네 병원에서 이 주사를 맞을 수가 없어서 집에서 1시간 걸리는 난임 병원에 다녀야 했다. 그러다 어렵게 가진 아이를 유산했다.

김미진(37·가명)씨는 난임 여성들이 겪는 이 문제를 알리고 싶었다. 지난해 1월 서울시의 시민 정책 제안 플랫폼 ‘민주주의 서울’에 ‘보건소에서 난임 주사를 맞게 해주세요’라는 제목의 청원글을 올렸다. “13년 전 친구가 난임 병원에 다니면서 엉덩이 주사를 맞아야 했어요. 당시 간호조무사로 일하고 있어 제가 그 친구 집에 가서 주사를 놓아줬어요.” 이후 김씨가 결혼하고 난임은 그의 문제가 됐다. “간호조무사 일을 해서 주사를 스스로 놓을 수 있지만 다른 난임 여성들은 혼자 주사를 놓을 수 없어 힘들어해요. 제가 출장을 가서 놓아주기도 했어요. 그들의 절박한 마음을 아니까요. 이 주사는 아기를 갖게도 하고 지키게도 해요. 그 주사를 제시간에 맞지 못할 때 드는 좌절감과 죄책감은 말로 다 할 수 없어요.”

김씨는 좀더 편하게 난임 주사를 맞을 수 있는 방법을 찾았다. 카페 회원들과 이야기하며 찾은 방법이 보건소에서 주사를 맞는 것이다. 보건소는 다양한 공공의료 서비스를 해주는 기관으로 비용이 저렴하고 의료진이 상주하고 있어서다. 난임 의료비 지원 신청 기관이며 난임 병원보다 접근성이 좋은 것도 또 하나의 이유다.

이씨는 자신을 ‘난임 주사’를 맞으려고 여러 병원을 찾아다니는 ‘주사 난민’ 같다고 말한다. “집이나 회사 근처의 병원 중에서도 안전성 문제 때문에 거절하는 곳도 있어요. 제가 다니는 난임 병원에서 준 주사의뢰서에 ‘부작용이 있을 시에는 저희 병원에서 책임진다’라는 문구가 있는데도 꺼려요. 그럴 땐 속상해서 길에서 울고 싶은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에요.”

자신이 다니는 난임 병원에 가서 주사를 맞는 게 좋지만 그럴 수 없는 상황이다. 난임 부부들이 병원을 선택하는 기준도 집과의 거리가 아니라 임신 성공률이 높은 병원인지 아닌지다. 난임 부부들 사이에서 손꼽히는 병원이 특정 몇 개구에 몰려 있다. 난임 병원 분포도도 고르지 않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의 2018년 병원 현황 통계를 보면 서울시에는 난임 전문 병원이 71곳 있다. 병원이 다양하게 분포된 게 아니라 25개구 중 5개구에 가장 많다. 가장 많은 곳은 강남구로 12곳이 있다. 그다음으로 송파구 5곳, 노원구 4곳, 강서구 4곳, 영등포구 4곳이 있다.

주사를 맞을 수 있는 일반 병원에 가서 난임을 향한 따가운 시선도 받는다. 이씨는 “간호사가 접수할 때 ‘시험관을 몇 번 했는지’ ‘언제부터 난임 병원에 다니는지’ 물어본다”며 “처음 간 병원에서 어쩔 수 없이 난임이라는 걸 말해야 하고 ‘젊어 보이는데 시험관 한대’라고 수군대는 소리까지 듣기도 했다”고 털어놓았다. 난임에 대한 사회적 낙인 때문에 ‘난임 커밍아웃’을 하기 힘들다. 임신이 안 돼 다시 그 병원에 주사를 맞으러 가서 또다시 상처를 받기도 했다. “의사나 간호사들이 ‘또 왔어요?’라고 말해요. 저도 또 가고 싶어서 가는 것도 아닌데요. 그럴 때 죄인처럼 위축돼요.”

“젊어 보이는데 시험관 한대” 수군대는 소리

주사행위료, 진료비 등 비용도 부담이 된다. 민씨는 난임 병원에서 써준 주사의뢰서를 들고 처방받은 주사액과 주사기, 알코올솜을 갖고 병원에 간다. “갈 때마다 의사 진료를 받아야 하는 병원도 있어 진료비를 내야 해요. 거기에 주사행위료까지 내야 하고요. 매일 맞아야 하기 때문에 그 비용도 무시 못해요. 주사행위료는 비급여라 병원마다 비용은 부르기 나름이에요.”

직장에 다녔던 김씨 역시 회사 근처 병원에서 주사를 맞을 수 있는 곳을 찾아다녔다. “회사 근처에 산부인과가 있어 비용을 문의했더니 1만원이라 하더군요. 저 같은 경우 11주까지 맞아야 해서 비용이 부담됐어요. 그러다 주사 비용이 2천원이라는 병원이 있어 그곳에 다녔어요. 시술 한 번 할 때마다 몇백만원씩 들어가니 주사 비용도 아껴야 하거든요.”

최씨는 아이를 낳고 싶은 마음에 위험을 무릅쓰고 주사를 맞고 있다. 2015년 유방암 0기 판정을 받고 암수술을 했기 때문이다. “엉덩이 주사가 호르몬제 주사라 유방암 재발 확률을 높일 수 있다고 하네요. 그래도 저에게는 아이를 갖는 게 더 절실해요. 꼭 아이를 낳고 싶어요.”

온라인에서도 김씨의 청원글에 공감하는 댓글이 여러 개 달렸다. 대부분 같은 아픔을 겪는 난임 부부들의 이야기다. “병원마다 주사행위료 금액이 천차만별이에요.” “우리 동네는 놔주는 병원을 찾기도 힘들어요.” “난임이란 상황도 힘든데, 동네 병원에 시험관 시술임을 밝히며 주사 놔달라고 부탁하는 것도 힘이 듭니다. 안 놔준다고 하면 비참하기까지 하고요.”

찬성 97%의 압도적인 지지
‘민주주의 서울’에서 진행된 “보건소에서도 난임 주사를 맞을 수 있다면 어떨까요?”에 관한 시민 투표 현황. ‘민주주의 서울’ 누리집 갈무리

‘민주주의 서울’에서 진행된 “보건소에서도 난임 주사를 맞을 수 있다면 어떨까요?”에 관한 시민 투표 현황. ‘민주주의 서울’ 누리집 갈무리

난임 부부들이 난임 주사를 맞기 위해 겪어온 고통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김씨는 “보건소에서 난임 주사 맞게 해달라는 간절한 호소는 10년 전에도 있었다. 국민권익위원회에 민원을 제기한 난임 부부들이 있었다고 들었다”고 이야기했다. 실제 국민권익위원회는 2008년 10월 시험관아기 시술 관련 주사를 보건소에서 맞을 수 있도록 관련 지침을 마련하라고 보건복지부에 권고했다. 당시 권익위는 “정부가 출산 장려를 위해 보건소를 통해 불임 부부에게 치료비를 지원하고 있으나 체외수정(시험관아기) 시술 주사제의 경우 보건소가 부작용을 우려해 주사제 접종을 거절하고 있다”며 “이 때문에 많은 난임 부부가 가정에서 직접 주사제를 접종하고 있다”고 밝혔다.

김씨의 제안을 계기로 ‘민주주의 서울’ 누리집에서는 ‘보건소에서도 난임 주사를 맞을 수 있다면 어떨까요?’라는 주제의 시민 투표가 진행되고 있다. 1월10일 오후 4시 기준으로 찬성 5086표, 반대 139표를 받아 97%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고 있다. 이 투표에 달리는 의견 댓글도 5404건에 이른다. ‘민주주의 서울’은 시민이 제안한 정책에 50명 이상이 공감하면 부서가 답변하고 500명이 공감하면 공론장이 열린다. 5천 명이 공론에 참여하면 박원순 서울시장이 답변하는 방식으로 운영된다.

서울시 사회혁신담당관 관계자는 “투표가 끝난 뒤 참여한 시민 5천여 명의 의견을 분석하고 자료를 만들 것”이라며 “2월 중에는 보건소에서 난임 주사를 맞는 제안에 답변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김씨의 제안이 시민 투표라는 공론화의 장에 나오기까지 어려움이 있었다. 서울시와 함께 ‘민주주의 서울’을 운영하는 소셜벤처 ‘빠띠’의 권오현 대표는 “보건소 난임 주사에 관한 청원에 50개 이상의 공감을 받았지만 주사에 따른 부작용이나 약제 안전성 등의 문제로 관련 부서에서 반려한 제안이었다”며 “하지만 ‘민주주의 서울’ 운영팀의 내부 기구인 공론의제선정단 회의에서 논의한 뒤 공론화 단계를 밟은 제안 발굴 사례”라고 설명했다. 이후 시민 제안을 올린 당사자들과 만나고, 지난해 11월 시민 제안 워크숍 ‘서울 제안가들: 난임 부부 편’을 열기도 했다. 이 행사에서 ‘양·한방 난임 지원을 확대해주세요’ ‘만 25살에 생애 첫 주기 검사를 필수로 해주세요’ ‘조금 더 현실성 있는 산전 검사가 필요해요’ 등 다양한 제안이 나왔다.

실행되기까지 넘어야 할 산

‘보건소에서 난임 주사 접종’ 제안이 실행되기까지 넘어야 할 산이 많다. 서울시 건강증진과 관계자는 “외부 처방된 주사제를 보건소에서 주사할 경우, 주사에 따른 부작용이나 주사 약제 안전성의 문제 발생시 의료분쟁의 소지가 있다”며 “일반 의료기관과의 이해관계도 조정이 필요한 사안이라 검토 중”이라고 밝혔다.

‘빠띠’의 권오현 대표는 “난임 부부들이 겪는 난임 주사에 관한 고충에 대해 일반 시민들은 잘 모른다”며 “온라인 공론장에서 당사자의 목소리로 이런 고충을 듣고 시민들이 의견을 나누는 과정이 큰 의미가 있다. 이게 일상을 바꾸는 힘이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허윤희 기자 yhher@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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