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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원이 윤석열을 두려워하는 이유

‘론스타’ 수사팀 주역으로 법원과 일전 불사했던 ‘강골’
등록 2018-11-24 07:39 수정 2020-05-02 19:29
박병대 전 법원행정처장(대법관)이 11월19일 검찰 조사에 앞서 서울중앙지검 청사 포토라인에서 기자들의 질문을 받고 있다. 한겨레 신소영 기자

박병대 전 법원행정처장(대법관)이 11월19일 검찰 조사에 앞서 서울중앙지검 청사 포토라인에서 기자들의 질문을 받고 있다. 한겨레 신소영 기자

11월14일 구속 기소된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의 공소장을 읽고 난 뒤 얼굴이 화끈거렸다. 당시 법원행정처와 같은 건물에 있는 대법원 기자실로 매일 출근하다시피 했는데도 ‘사법 농단’의 낌새를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사법부 수뇌부의 내밀한 행동을 출입기자가 다 알 수는 없는 노릇이라고 스스로 위로했다. 출입처에서 벌어지는 일 가운데 10분의 1만 알고 있어도 훌륭한 기자라는 우스갯소리도 있지 않은가. 하지만 임 전 차장의 공소장에는 ‘재판 개입’과 ‘판사 사찰’의 기미를 알아챌 수 있었던 단서가 곳곳에 나와 있었다. ‘그때 조금만 더 부지런했다면…’ 하는 후회가 밀려왔다. 243쪽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의 공소장이 대법원 출입기자 시절의 무능과 게으름을 새삼 확인시켜준 셈이다.

청와대-사법부 ‘검은 거래’ 동기 충분
11월19일 열린 전국법관대표회의에 참석한 판사들이 사법 농단 연루 판사 탄핵 안건을 논의하고 있다.  공동취재사진

11월19일 열린 전국법관대표회의에 참석한 판사들이 사법 농단 연루 판사 탄핵 안건을 논의하고 있다. 공동취재사진

대표적인 게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손해배상 청구소송이다. 이 소송이 2013년 8월 대법원에 재상고된 뒤 별다른 이유 없이 재판이 열리지 않았을 때 법원행정처에 그 이유를 집요하게 캐물었어야 했다. 그랬다면 박근혜 정권과 사법부 수뇌부가 재판을 지연시키기 위해 어떤 수작을 벌이는지 눈치챘을 수도 있었다. 앞서 2012년 5월 대법원 1부가 피해자 개인의 배상청구권을 인정하는 취지로 판결(원심 파기환송)했기 때문에 재상고되더라도 심리불속행(상고 대상이 아니라고 판단되는 사건을 본안 심리 없이 상고 기각하는 것)으로 기각될 가능성이 컸다. 더욱이 이 소송에서 일본 전쟁범죄 기업을 변론하던 김앤장이 일본 극우세력의 주장과 똑같은 내용의 준비서면을 제출한 사실이 드러나 여론의 지탄을 받는 등 크게 이슈가 되기도 했다.

검찰은 당시 사법부 수뇌부가 강제징용 사건 재판을 지연시키려고 애쓴 이유를 다음과 같이 공소장에 적었다. “박근혜 정부는 대통령의 선친인 박정희 전 대통령이 1965년 ‘한일청구권 협정’을 주도한 당사자라는 점 등을 의식하여 위 파기환송 판결(2012년 5월 대법원 1부 판결)의 절차적 문제점이나 외교적, 국제법적 문제점 등을 지적하며 그 결론이 번복되어야 한다는 것으로 정부 입장을 변경하였다. 이에 피고인(임 전 차장)과 양승태, 차한성, 박병대 등 사법부 수뇌부는 사법부의 각종 정책 추진 등에 있어 청와대와 정부의 협조를 얻어내 사법부의 이익을 도모할 목적으로 위와 같은 정부의 요청 사항을 강제징용 재상고 사건 재판 등에 적극 반영하기로 계획했다.”

검찰의 설명대로 박근혜 정부는 태생적으로 강제징용 재판과 ‘물과 기름’ 같은 관계일 수밖에 없었다. 이는 과거사에 조금만 관심을 기울이면 누구나 알 수 있는 것이다. 또 대법원은 당시 상고법원 도입에 전력투구하고 있었다. 청와대와 사법부 수뇌부가 ‘검은 거래’를 할 수 있는 동기가 충분히 있었던 셈이다. 대법원 출입기자라면 이런 사정쯤은 훤히 꿰뚫고 있어야 했는데, 오만과 나태함으로 출입기자의 본분을 다하지 못했다.

당시 대법원 출입기자의 얼굴을 화끈거리게 만드는 내용은 또 있다. 임 전 차장의 공소장에는 ‘기레기’(‘기자’와 ‘쓰레기’의 합성어)도 등장한다. “피고인(임종헌)은 2016. 3.18.경 박한철 당시 헌법재판소장이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초청 토론회에서 대법원장이 헌법재판관 3인을 지명하는 것에 대하여 반감을 표시하는 등의 발언을 하자 헌법재판소의 위상과 권위를 깎아내리고 헌법재판소장의 도덕성 등에 흠집을 내려는 의도로 기사를 대신 작성하여 기자에게 제공함으로써 박한철 헌법재판소장의 위 발언을 비난하는 내용의 기사가 게재되도록 계획하였다.”

임 전 차장, 후배 소신 꺾는 지시
‘양승태 사법부’의 집중 견제를 받았던 박한철 헌법재판소장이 2017년 1월31일 퇴임식에서 직원과 악수하고 있다. 한겨레 박종식 기자

‘양승태 사법부’의 집중 견제를 받았던 박한철 헌법재판소장이 2017년 1월31일 퇴임식에서 직원과 악수하고 있다. 한겨레 박종식 기자

실제로 2016년 3월25일 은 ‘박한철 헌재소장, 거침없는 발언에 법조계 술렁’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내보냈다. 이 기사는 박 헌재소장이 대법원장의 헌재 재판관 지명권 행사를 민주적 정당성이 부족하다고 비판한 것을 겨냥했다. 하지만 이는 학계에서 오래전부터 고쳐야 할 문제로 지적해왔던 것이다. 선출되지 않은 권력인 사법부가 정치적 파장이 큰 사건을 재판하는 헌법재판관을 지명하는 것은 민의를 반영해야 하는 민주주의 원칙에 전혀 맞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이 기사는 정당성과 공정성이 결여된 엉터리 기사였다. 당시 법조 출입기자들 중에는 ‘기사 게재에 불순한 의도가 있다’고 의심하는 이가 많았다. 가뜩이나 박한철 헌재소장은 사상 첫 검찰 출신 소장이라는 이유로 법원 쪽의 곱지 않은 시선을 받고 있었다.

검찰은 임 전 차장을 비롯한 관련자들을 조사한 결과 다음과 같은 사실이 드러났다고 썼다. “피고인(임 전 차장)은 2016. 3.20.경 법원행정처 차장실에서 사법정책실 심의관 문○○에게 ‘모 언론인이 3.18. 있었던 토론회에서 헌법재판소장의 발언이 보도된 것을 보고 화를 내면서 기사를 써야겠다고 한다. 토론회 내용에 대해 쓴 보고서를 가지고 헌법재판소장의 발언을 비난하는 취지의 기사 초안을 한번 작성해보라’고 지시하였고, 이에 문○○가 ‘기사 자료를 주는 것은 괜찮을 것 같은데 기사 초안을 작성해주는 것은 좀 그렇습니다’라고 대답하자 화를 내며 큰소리로 ‘일단 써보세요’라고 재차 지시하였다.” 공소장에 등장하는 문 판사는 임 전 차장이 평소 기자들 앞에서 ‘일만 잘하는 게 아니라 소신과 주관이 뚜렷해서 내가 아끼는 후배’라고 치켜세웠던 인물이다. 임 전 차장은 무슨 생각으로 그런 후배의 소신을 꺾는 지시를 내렸을까.

결국 문 판사는 박 헌재소장을 비판하는 내용의 기사 초안을 작성한 뒤 윗선에 보고했다. 문 판사는 기사의 근거를 뒷받침하기 위해 가상의 인물을 내세워 인터뷰를 조작하기도 했다. 은 임 전 차장을 통해 기사 초안을 넘겨받은 뒤 “순서와 표현 일부만 고치고 다소 축약한 형태로 제목과 기사의 문구, 내용, 발언 인용 등을 그대로 옮겨”(공소장 발췌) 기사를 작성해 내보냈다.

약점 잡힌 법원 “검찰 어디까지?” 불안

윤석열 서울중앙지검장이 지휘하는 사법 농단 수사는 검사 30여 명이 투입돼 5개월 넘게 진행되고 있다. 수사팀 규모는 이미 ‘박근혜·최순실 국정 농단’ 사건 특별검사팀을 넘어섰고, 기간도 ‘12·12 및 5·18 사건’의 역대 최장 기록(6개월) 경신을 앞두고 있다. 그만큼 검찰이 조직의 명운을 걸고 하는 수사다. 수사팀은 ‘중간고사’에 해당하는 임 전 차장의 공소장 작성에 심혈을 기울였다. 공소장 곳곳에는 검찰의 자신감을 엿볼 수 있는 표현도 나온다. 다음 대목이 대표적이다.

“사법행정권은 법관의 재판상 독립의 보장을 위해 헌법상 사법부에 부여되어 있는 것인 만큼, 위법·부당하게 남용되어 법관의 재판상 독립을 침해하는 통로나 수단이 되어서는 결코 안 된다.” 검찰 수사의 정당성을 강조하기 위한 표현이지만, 마치 검찰 수사에 부정적인 판사들을 훈계하는 것처럼 들리기도 한다.

하지만 사법 농단의 진상 규명을 강하게 요구했던 판사들 사이에서도 검찰 수사를 우려하는 시각이 있다. 검찰에 약점을 잡힌 법원이 과연 검찰의 수사권 남용을 제대로 견제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법원행정처 근무 경험이 있는 한 변호사는 “사법부의 심장부에 해당하는 법원행정처의 속살을 들여다본 검찰이 앞으로 수사 결과를 어떻게 활용할지 알 수 없다. 법원으로서는 불안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법원의 불안감은 전혀 근거가 없는 게 아니다. 검찰은 과거 ‘론스타 사건’ 영장 기각으로 법원과 갈등을 빚을 때 사법부 수장의 약점을 활용했다는 의심을 받은 적이 있다. 이용훈 당시 대법원장이 타깃이었다. 그는 변호사 시절에 거액의 수임료를 받고 제대로 세무 신고를 하지 않았다는 논란에 휩싸였다. 그 가운데서도 외환은행 사건 수임료가 문제가 됐는데, 공교롭게도 당시 검찰이 유회원 론스타코리아 대표의 외환은행 주가조작 사건을 수사하면서 이 대법원장의 수임 내역을 들여다본 것이다. 이 대법원장은 자신의 수임 내역이 기사화되자 “대법원장을 위협하는 세력이 있다”며 공개적으로 검찰을 겨냥했다. 검찰은 “관련 내용을 외부로 유출한 적이 없다”며 강하게 부인했지만, 의심을 잠재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영장기각 불복해 네차례 재청구

검찰의 미심쩍은 행동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외환은행 수임료 논란이 가라앉자마자 이번에는 이 대법원장이 진로를 헐값에 사들인 골드만삭스 쪽을 변론해서 받은 수임료 가운데 5천만원을 신고하지 않은 사실이 드러났다. 이 사실은 한 방송사의 단독 보도로 공개됐는데, 이 대법원장 쪽은 “세무사의 단순 실수였다”고 해명하면서도, 언론 제보자로 검찰을 의심했다. 국세청 신고 내역은 수사기관 말고는 들여다볼 수 있는 곳이 없었기 때문이다.

검찰은 자신을 향한 의심의 시선을 “터무니없는 모함”이라고 일축했다. 하지만 검찰은 한 시민단체가 이 대법원장을 탈세 혐의로 고발한 사건을 그 뒤 1년이 지나도록 처리하지 않고 캐비닛에 처박아뒀다. 사건이 복잡하지도 않고 관련자 가운데 도주한 사람도 없었지만 검찰은 어찌된 이유인지 수사를 진행하지 않았다. 법원에서 “사법부를 견제하기 위해 사건을 쥐고 있는 게 아니냐”는 볼멘소리가 나왔지만 검찰은 요지부동이었다.

윤석열 지검장은 당시 법원과 검찰의 영장 갈등을 초래한 론스타 사건 수사의 핵심 멤버였다. 그가 소속된 대검찰청 중수부는 유회원 론스타코리아 대표의 영장 기각에 불복해 네 차례나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법원과의 일전을 최일선에서 수행한 셈이다. 지금 법원이 그가 지휘하는 사법 농단 수사를 두려워하는 이유다.

이춘재 기자 cjl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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