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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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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수 특검, 법무부에 뿔났다

한국 정부 상대 소송 나선 헤지펀드 엘리엇…

이재용 편드는 법무부의 ‘수상한’ 답변서
등록 2018-09-11 04:39 수정 2020-05-02 19:29
박영수 특별검사(가운데)가 2017년 3월6일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 사건’ 수사 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박영수 특별검사(가운데)가 2017년 3월6일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 사건’ 수사 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박영수 특별검사팀은 지난 8월17일 법무부 인터넷 누리집을 보고 깜짝 놀랐다. ‘박근혜·최순실 국정 농단’ 사건 수사 결과와 정반대되는 자료가 떡하니 올라왔기 때문이다. 법무부는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매니지먼트가 한국 정부를 상대로 8천억원대의 ‘투자자-국가 간 소송’(ISD)을 제기한 것과 관련해 8월13일 중재재판소에 답변서를 제출했는데, 그 내용이 ‘박근혜·최순실 국정 농단’ 사건 수사 결과를 전면 부정하는 것이었다. 앞서 엘리엇은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과 관련해 “한국 정부의 부당한 조치(국민연금의 합병 찬성)로 최소 7억7천만달러(약 8600억원)의 피해를 봤다”며 지난 7월13일 중재신청서를 제출했다.

검찰이 입증하지 못했다?

법무부는 답변서에서 “한국 형사법원은 박근혜 전 대통령과 국민연금 직원 등의 위법적인 행위 결과로서 합병이 제안되거나 합병이 통과됐다고 판단하지 않았다. 이와 반대로 박 전 대통령 재판에서 서울중앙지법은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합병과 관련해 박 전 대통령에게 명시적 또는 묵시적 청탁을 했다는 점을 검찰이 입증하지 못했다고 판단했다”고 밝혔다. 법무부는 또 “엘리엇은 (이재용 재판에서) 서울고법이 1심 판단을 뒤집고 삼성이 승계 작업과 관련한 청탁을 위해 박 전 대통령에게 뇌물을 줬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았다는 점은 언급하지 않았다”고 했다. 또한 “한국 민사법원들은 삼성 합병 및 그에 대한 국민연금의 찬성에는 합당한 경영상의 이유가 있었고, 합병 비율이 현저히 불공정하다고 볼 수 없다며 합병의 적법성을 인정했다”고 주장했다.

박영수 특검팀은 법무부의 답변서에 ‘불순한 의도’가 있다고 본다. 법무부가 박 전 대통령의 항소심(2심) 선고를 열흘 앞둔 시점에서 굳이 답변서를 낸 것도 수상한데다, 항소심에 앞서 열린 재판에서 삼성에 유리하게 판단한 부분만 부각해서 답변서를 썼기 때문이다.

국정 농단 사건에 등장하는 삼성의 뇌물에 대한 법적 판단은 박 전 대통령과 이 부회장 재판에서 각각 이뤄진다. 두 사람이 뇌물 수수와 공여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박 전 대통령 항소심 전까지 3개 재판(박 전 대통령 1심 재판과 이재용 부회장의 1·2심 재판)이 있었는데, 이 가운데 삼성에 가장 유리하게 판단한 재판은 이 부회장의 2심 재판이다. 이 재판부(서울고법 형사13부 재판장 정형식)는 이 부회장의 청탁은 인정하지 않고, 박 전 대통령의 ‘겁박’에 따라 최순실씨 쪽을 지원한 것으로 판단했다. 뇌물 액수도 최씨의 딸 정유라 승마 훈련비용 36억원(최씨 쪽에 제공한 말을 삼성 소유로 판단해 말값은 제외)만 인정해 이 부회장에게 집행유예를 선고했다.

정형식 부장판사의 판결은 법조계에서 ‘삼성에 지나치게 관대한 판결’이라는 지적을 받았는데도 법무부는 이를 엘리엇의 주장을 반박하는 주요 근거로 언급했다. 법무부는 또 박 전 대통령 1심 재판부가 삼성의 경영권 승계 작업에 관해 묵시적으로 부정한 청탁을 한 사실을 인정한 것은 외면하고 합병 등 개별 현안에 대한 명시적 또는 묵시적 청탁을 인정하지 않은 점만 부각했다.

누구를 위한 반쪽짜리 답변서일까

더욱이 박 전 대통령 1심 재판부의 판단은 8월24일 2심 재판(서울고법 형사4부 재판장 김문석)에서 뒤집혔다. 2심 재판부는 박 전 대통령과 이 부회장의 독대 때 ‘엘리엇 등 외국자본에 대한 경영권 방어 강화’와 관련한 부정한 청탁이 있었다고 인정했다. 결국 법무부 답변서는 사실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 ‘반쪽짜리’ 답변서가 돼버렸다.

박영수 특검팀은 법무부 답변서가 이재용 부회장의 대법 확정판결을 겨냥한 게 아닌지 의심한다. 정부의 ‘공식 문건’에 삼성에 유리한 내용만 담은 것은 대법원에 어떤 ‘메시지’를 보내고 싶었던 게 아니냐는 것이다. 박 특검팀은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7월 인도 국빈 방문 때 이 부회장을 만난 것을 불길한 신호로 받아들인다. 이후 국정 농단 사건 관련 재판에서 이상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게 김기춘 전 대통령비서실장의 석방이다.

박 특검팀은 앞서 7월30일 대법원에 “국정 농단 사건 관련 심리를 신속하게 마쳐달라”는 의견서를 냈다. 재판 장기화로 김 전 실장과 같은 핵심 피고인들이 구속 기간 만료로 줄줄이 석방되는 것을 막기 위한 조처였다. 하지만 대법원은 특검의 의견을 일축하고 8월6일 김 전 비서실장을 풀어줬다. 이는 대법원이 국정 농단 사건 재판을 신속하게 처리할 의사가 전혀 없음을 공개적으로 드러낸 ‘사건’이었다. 박 특검팀 고위 관계자는 “삼성 쪽은 대법 판결이 장기화하는 것을 원한다. 이 사건에 대한 여론의 관심이 시들해지면 이 부회장의 재수감 가능성이 작을 것으로 보는 것 같다”고 말했다.

법무부는 박 특검팀의 이런 지적에 펄쩍 뛴다. 법무부 고위 관계자는 “답변서는 엘리엇의 주장을 반박하기 위한 것일 뿐 국정 농단 사건 재판과 전혀 관계가 없다. 대법 확정판결이 나기 전까지의 상황을 대략 정리한 것”이라고 했다. 이 관계자는 “답변서는 엘리엇이 제기한 ISD 소송에서 정부를 대리한 로펌(법무법인 광장과 프레시필즈 브룩하우스 데린저)이 작성했다. 초안은 내용이 훨씬 더 심해서 실무자가 대폭 고쳤는데, 미처 손보지 못한 부분이 있어서 오해를 일으킨 것 같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또 “내년에 답변서를 한 차례 더 제출해야 한다. 그때는 대법 확정판결까지 다 반영해서 제대로 작성할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삼성을 위한 일
문재인 대통령(왼쪽)이 7월9일(현지시각) 삼성전자 인도 공장에서 이재용 부회장과 악수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문재인 대통령(왼쪽)이 7월9일(현지시각) 삼성전자 인도 공장에서 이재용 부회장과 악수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번 법무부 답변서 파동은 박영수 특검팀이 얼마나 이재용 부회장 처벌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지 잘 보여준다. 박 특검팀은 국정 농단 사건의 본질을 ‘정경유착’ 사건으로 규정하고, 삼성을 비롯한 재벌의 범죄행위에 수사를 집중했다. 앞서 검찰이 박 전 대통령과 최순실씨 등 측근들의 범죄행위에 집중했던 것과는 차이가 있다.

박 특검팀은 검찰 수사 기록을 숙독한 뒤 미르재단 등에 출연금을 낸 재벌 가운데 삼성과 롯데는 형사처벌해야 한다고 결론지었다. 삼성과 롯데는 박 전 대통령과 독대할 때 각각 돈을 요구받았고 그만큼 돈을 냈기 때문이다(롯데는 나중에 돈을 돌려받았지만, 뇌물죄는 성립된다). 최태원 에스케이(SK) 회장도 돈을 요구받았으나 내지는 않았다. 이미 두 차례 구속된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재단 출연금만 낸 재벌들과 별도의 돈을 낸 삼성, 롯데는 구분해서 처리할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이재용 부회장 수사는 처음부터 난관에 부닥쳤다. 삼성이 국가 경제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해야 한다는 등의 수사를 방해하려는 말들이 보수 언론과 재계를 중심으로 빗발쳤다. 박영수 특검의 검찰 선배들도 직접 전화를 걸어와 삼성 수사를 신중하게 하라는 조언 아닌 조언을 했다. 사실 이런 현상은 과거 검찰이 재벌을 수사할 때마다 반복됐다. 그래서 검찰에 있을 때 ‘재계의 저승사자’로 알려질 만큼 재벌 수사 경험이 많은 박 특검은 크게 개의치 않았다.

박 특검이 지금은 없어진 대검찰청 중앙수사부장을 맡았을 때 정몽구 현대차 회장을 구속한 적이 있다. 2006년 대검 중수부가 수사한 ‘현대차 비자금 사건’에서다. 당시 재계와 경제지 등 보수언론들은 경제위기론을 제기하며 검찰 수사를 방해했다. 그러자 박 특검은 수사팀에 지시해 경제위기론을 반박하는 보고서를 만들라고 했다. 검찰 수사로 현대차 그룹의 경영이 투명해지고 지배구조가 개선되면 기업 가치가 더 커질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보고서를 본 검찰 수뇌부는 현대차 수사를 계속 진행하도록 했다. 현대차는 정 회장 구속 직후 주가가 급락하기도 했지만, 정 회장 재판이 모두 끝난 뒤에는 미국 시장에서의 선전을 발판으로 기업 실적이 크게 개선됐다.

박 특검팀은 수사 초기에 삼성 쪽으로부터 이 부회장 출국이 가능한지 문의받았다. 당시 미 대선에서 이긴 도널드 트럼프 당선자가 삼성과 애플 등 글로벌 정보기술(IT) 기업 총수들에게 만나자고 제안했다는 것이다. 박 특검은 특검팀 소속 검사들에게 의견을 구했다. 검사들은 하나같이 출국을 허락해선 안 된다고 했다. 이 부회장이 주요 피의자였기 때문이다.

출국 금지로 기선 제압

박 특검은 곧바로 법무부에 이 부회장의 출국 금지를 신청했다. 삼성은 몹시 당황했다. 반면 특검팀은 이 조처로 수사 초반부터 분위기를 장악할 수 있었다. 박 특검은 “이 부회장 출국을 허락하지 않은 것은 일종의 기 싸움에서 이기려는 것이었다. 수사에서 초반 기세는 아주 중요하다”고 말했다.

이춘재 기자 cjl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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