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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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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롱 속 전화기가 주군을 벼랑 끝으로

‘박근혜·최순실 국정 농단 사건’

결정적 증거 된 정호성의 휴대전화와 안종범의 수첩
등록 2018-05-29 08:45 수정 2020-05-02 19:28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한 항소심 공판이 6월1일 시작된다. ‘국정 농단 사건’의 대법원 최종 판결을 향한 두 번째 관문이다. 이미 ‘헌정 사상 첫 탄핵 대통령’이라는 불명예를 안은 그는 1심에서 징역 24년의 중형을 선고받았다.
그의 몰락은 ‘교훈을 얻지 못한 역사는 반복된다’는 말을 새삼 떠올리게 한다. 그는 아버지(박정희)와 마찬가지로 소수의 측근에게 의존하다 그 측근들에 의해 파국을 맞았다. 군 출신 측근에게 에워싸인 아버지처럼 딸도 비선 실세와 법조 엘리트에 둘러싸인 채 국민과 멀어졌다. 비운의 역사를 반복하지 않으려면 박 전 대통령이 몰락한 이유를 정확히 규명해야 한다. 2016년 국정 농단 사건에 대한 검찰·특별검사팀 수사와 헌재의 대통령 탄핵 재판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들의 이야기는 그 단초를 제공한다. 당시 법조팀장이던 이춘재 기자가 ‘그때 그 사람들’의 이야기를 연재한다.
서울중앙지검에 조사를 받기 위해 출두하는 박근혜 전 대통령. 사진공동취재단

서울중앙지검에 조사를 받기 위해 출두하는 박근혜 전 대통령. 사진공동취재단

2016년 10월29일 아침 서울 삼성동의 한 아파트에 검사와 수사관들이 들이닥쳤다. 정호성 청와대 부속비서관이 사는 곳이었다. 정 비서관은 막 집을 나서려던 참이었다. ‘박근혜·최순실 국정 농단 사건’ 특별수사본부 소속 유경필 검사가 정 비서관에게 압수수색 영장을 제시했다. “(박근혜·최순실 국정 농단 사건) 공무상 비밀누설 혐의와 관련해 지금부터 압수수색을 시작하겠습니다.” 수사관들은 정씨를 밀치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정 비서관의 아내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정 비서관을 쳐다봤다.

‘행운의 선물’ 입수한 검찰

같은 시각, 서울의 또 다른 아파트에도 검찰 수사관들이 몰려들었다. 안종범 청와대 정책조정수석비서관의 집이었다. 안 수석과 정 비서관은 전날 박근혜 대통령에게 사표를 낸 상태였다. 국정 농단 의혹 사건으로 궁지에 몰린 박 대통령이 청와대 인적 쇄신 카드로 탈출구를 마련할 수 있도록 돕자는 의도였다.

하지만 이들이 박 대통령을 진짜 도울 수 있는 방법은 사표가 아닌 다른 데 있었다. 바로 검찰의 압수수색에 대비한 ‘집 안 정리’였다. 검찰이 이날 이들의 집에서 확보한 압수물들은 이후 박 대통령을 옭아매는 올가미 구실을 톡톡히 했다. 박영수 특별검사팀의 성공적 수사는 물론 박 대통령을 헌정사상 첫 탄핵 대통령으로 만드는 데 중요한 밑돌이 됐다. 정 비서관과 안 수석은 검찰의 기습에 속수무책 당함으로써 ‘주군’을 돕기는커녕 검찰의 칼 앞에 맨몸으로 서게 했다.

검찰은 정 비서관의 집에서 휴대전화 8대와 태블릿피시 1대를 확보했다. 그는 당시 업무용 휴대전화 외에 ‘대포폰’ 3대를 쓰고 있었다. 대포폰은 주로 최순실씨와 통화하는 데 쓰였지만, 박 대통령도 가끔 전화를 걸어왔다. 대포폰에는 최씨가 국정운영 방향 등을 지시하는 통화 녹음파일들이 무더기로 저장돼 있었다.

정 비서관이 박 대통령 취임 전에 사용했던 오래된 전화기들은 그의 안방 장롱 안에서 발견됐다. 이 전화기들이 안방에 보관된 줄은 그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정 비서관이 처분하려고 했던 것을 그의 아내가 혹시나 해서 장롱 안에 보관해둔 것들이었다. 이 전화기들이 검찰에 압수되자 정 비서관의 아내는 그를 끌어안고 펑펑 울었다고 한다.

정 비서관의 휴대전화는 검찰에 ‘행운의 선물’이었다. 검찰은 그의 휴대전화에서 녹음파일 200여 개를 복구하는 데 성공했다. 파일 내용은 최순실씨가 박 대통령의 ‘비선 실세’였음을 입증하기에 충분했다. 정 비서관은 박 대통령의 지시 사항을 하나도 빠뜨리지 않으려고 통화 내용을 모조리 녹음했다. 시도 때도 없이 걸려오는 대통령의 전화를 즉석에서 메모하며 응대하는 것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그의 휴대전화가 훌륭한 녹음기 구실을 한 셈이다.

특수본 출범과 동시에 압수수색
국정 농단 사건으로 실형을 선고받은 정호성 전 청와대 부속비서관. 연합뉴스

국정 농단 사건으로 실형을 선고받은 정호성 전 청와대 부속비서관. 연합뉴스

정 비서관의 휴대전화를 압수하기 전에는 수사팀도 최씨를 대수롭지 않은 존재로 판단했다. 그저 박 대통령의 말벗이나 심부름을 해주는 사람 정도로 짐작했다. JTBC가 태블릿피시 내용을 보도했을 때 수사팀 가운데 일부는 최씨가 아닌 정윤회씨가 이 태블릿피시의 주인이라고 생각했다.

검찰이 안종범 수석의 집에서 확보한 수첩도 횡재에 가까웠다. 검찰은 2016년 10월29일과 11월16일 각각 안 수석 집과 그의 청와대 사무실 압수수색에서 손바닥 크기의 업무용 포켓 수첩 17권을 확보했다. 수첩에는 박 대통령의 지시 사항과 청와대 수석비서관회의 내용 등이 기록돼 있었다. ‘안종범 수첩’이라 명명된 이 증거물은 이듬해 1월 안 수석의 보좌관 김아무개씨가 보관하고 있던 39권의 업무일지와 함께 박 대통령의 뇌물 혐의를 입증하는 데 중요한 증거가 됐다. 박 대통령에게 뇌물을 제공한 혐의로 구속 기소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과 신동빈 롯데 회장도 대통령과 면담한 내용을 기록한 안 수석의 수첩으로 덜미가 잡혔다.

정 비서관의 휴대전화와 안 수석의 수첩이 “결정적 증거”(김수남 검찰총장)로 평가받는 이유는, 이 증거물이 정확성뿐 아니라 객관성도 완벽하게 갖추었기 때문이다. 이 증거물을 제외하면 재판에서 박 대통령과 최순실씨의 공소 유지에 쓸 수 있는 증거는 고영태 전 더블루K 이사와 노승일 전 K스포츠재단 부장 등의 진술밖에 없었다. 하지만 고 이사 등은 최씨와 함께 일하다가 최씨에게 ‘팽당한’ 이들이었다. 최씨에 대한 감정이 좋을 리 없는 이들의 진술은 재판부에 따라 순도가 떨어지는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안 수석 등에 대한 기습적 압수수색은 검찰의 이전 태도와 견줘 의외로 여겨졌다. 10월29일의 압수수색은 김수남 검찰총장의 지시로 특별수사본부가 꾸려진 지 이틀 만에 이뤄졌다. 김 총장은 앞서 10월24일 JTBC가 ‘최순실 태블릿피시’를 처음 보도하자, 사흘 뒤인 27일 이영렬 서울중앙지검장에게 특별수사본부를 만들도록 지시했다. 본부장을 맡은 이 지검장은 수사팀이 수사 개시 당일 보고한 압수수색영장을 결재했고, 28일 법원이 영장을 발부하자마자 이튿날 압수수색을 집행했다. 수사팀 출범과 압수수색이 동시에 이뤄진 그야말로 전광석화 같은 대응이었다.

그러나 김 총장은 이보다 한 달여 전 와 TV조선의 최순실씨 관련 의혹 보도와 야당·시민단체의 수사 촉구에는 소극적으로 대응했다. 투기자본감시센터가 최씨와 안 수석을 고발한 사건을 부동산 관련 고소·고발을 처리하는 서울중앙지검 형사8부에 배당해 검사 1명에게 전담시켰다. 이 때문에 김 총장에게 “임명권자인 박 대통령의 눈치를 보고 있다”는 비난이 쏟아졌다.

2014년 검찰이 제대로 수사했다면

그에 대한 비난은 서울중앙지검장 재직 때 이른바 ‘정윤회 문건’ 수사를 지휘했던 경력과 겹쳐 증폭된 측면도 있다. 2014년 11월 보도로 촉발된 이 사건은, 최순실씨의 전남편인 정씨가(정씨와 최씨는 문건 사태가 일어나기 직전인 그해 5월 이혼했다) 청와대 핵심 인사들과 정기적으로 만나 국정 운영에 관여했다는 내용이 담긴 청와대 작성 문건이 공개된 사건이다.

사건의 핵심은 공식 직함도 없는 정씨가 박 대통령의 ‘비선 실세’로 활동했는지 였지만, 검찰은 엉뚱하게도 청와대 문건이 외부로 유출된 과정에 초점을 맞췄다. 대통령 비선 실세의 권력형 비리 사건을 문건 유출 사건으로 둔갑시킨 것이다.

검찰 수사는 당연히 야권의 강한 반발을 샀지만, 여권 안에서도 크게 환영받지 못했다. 2년 뒤 국정 농단 사건이 터졌을 때는 오히려 여권의 원망을 샀다. 이유는 간단했다. 문건의 ‘주어’를 정씨가 아닌 최씨로 바꾸면 문건 사건은 국정 농단 사건과 판박이였다. 만약 검찰이 제대로 수사했더라면 최씨의 존재가 드러났을 테고, 형사처벌까지는 몰라도 그의 국정 농단은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랬다면 2년여 뒤 박 대통령이 파국을 맞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라는 논리다.

더욱이 문건을 작성했던 박관천 경정이 당시 검찰에서 ‘권력 서열 1위는 최순실, 2위 정윤회, 3위 박 대통령’이라고 언급한 것을 수사팀이 뭉갠 것으로 드러나 검찰에 대한 여론은 더욱 악화됐다. 그러나 수사책임자인 김수남 서울중앙지검장은 이후 대검차장을 거쳐 검찰총장으로 영전했다.

정윤회 문건 사건은 이후 김 총장을 두고두고 괴롭혔다. 박영수 특별검사팀은 검찰에 이어 국정 농단 사건 수사에 착수하면서 “김 총장도 수사 대상이 될 수 있다”고 밝혔다. 김 총장은 발끈했다. 그는 대검 대변인을 통해 “당시 문건 유출 경위뿐만 아니라 정씨의 국정 개입 여부에 대해서도 철저히 수사했으나 이를 인정할 증거는 없었다. 최순실의 국정 개입 범죄를 수사할 만한 구체적인 단서나 비리에 관한 증거도 전혀 없었다”고 반박했다.

김 총장은 뒤늦게나마 특별수사본부를 띄운 뒤에는 거침이 없었다. 그는 수사팀에 최종 수사 결과만 보고하라고 지시했다. 중간 수사 내용이 외부, 특히 청와대로 유출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총장이 수사 진행 상황을 보고받지 않으니 법무부도 속수무책이었다. 법무부를 통해 검찰 수사 내용을 파악하려던 청와대 민정수석실도 두 손 놓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외로움 토로한 김수남 총장

검찰은 황교안 대통령 권한대행의 특검 수사 기간 연장 거부로 박영수 특검팀이 박 대통령 조사를 못하게 되자, 특검의 바통을 넘겨받아 박 대통령 수사를 진행했다. 김 총장은 수사팀이 박 대통령 공개 소환 조사 계획을 보고하자 승인해주었다. 공개 소환은 그만큼 죄질이 나쁘다는 것을 의미했고, 구속 수사가 불가피함을 암시했다. 박 대통령은 2017년 3월21일 서울중앙지검에 소환돼 조사를 받은 지 열흘 만인 3월31일 구속됐다.

김 총장은 수사가 되는 동안 지인들에게 외로움을 자주 토로했다고 한다. 당시 상황을 잘 아는 법조계 인사들은 그가 동향인 TK(대구·경북) 출신 검찰 선배들에게 면박을 당하기도 했다고 전한다. 선배들은 박 대통령이 파면(2016년 12월9일)된 뒤에 “(박 대통령) 수사를 서두를 필요 없다. 새로운 정부에서 임명된 총장이 하도록 놔두면 된다”는 조언 아닌 조언을 했다.

김 총장은 선배들의 말을 따르지 않았다. 대선이 아직 두 달이나 남은 상태에서 정치적 파장이 큰 사건을 뭉개고 있는 것은 검찰 조직에 두고두고 부담이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는 상식을 따랐다. 그리고 새 정부 출범 이틀 뒤인 2017년 5월12일 옷을 벗었다.

이춘재 기자 cjl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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