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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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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움’을 불태우라

대학병원 지도간호사 갑질에 멍드는 ‘백의 천사’…

‘갑질 사각지대’ 동네 병원이 더 큰 문제
등록 2018-05-15 17:03 수정 2020-05-03 04:28
선배 간호사의 ‘태움’에 스스로 목숨을 끊은 박선욱 간호사를 추모하는 집회 현장에 조화가 놓여 있다. 한겨레 이정아 기자

선배 간호사의 ‘태움’에 스스로 목숨을 끊은 박선욱 간호사를 추모하는 집회 현장에 조화가 놓여 있다. 한겨레 이정아 기자

어릴 때부터 환자 돌보는 일을 하고 싶었다. 드라마 속 송혜교의 모습을 꿈꾼 건 아니었다. “의사는 진단하고, 간호사는 치유한다”는 미국 드라마 를 보며 간호사를 동경했다. 늦은 나이에 간호학과를 졸업하고 대학병원에 취직했다. 검버섯 핀 노모의 얼굴에 모처럼 웃음꽃이 피었다. 신입사원답게 예의 바르고 겸손한 자세로 배워야겠다고 생각했다.

프리셉터의 집요한 ‘태움’

부서가 정해지고 프리셉터(개인지도 간호사)가 배정됐다. 프리셉터는 간호술기 책을 훑어줬다. 업무 처리, 물품 위치, 각종 기계 사용법 등 설명이 쉴 새 없이 이어졌다. 질문하려 했더니 그건 집에 가서 알아오라며 숙제를 내줬다. 궁금한 게 있었지만 더 물어볼 수 없었다.

입사 3일차 되는 날이었다. “당신은 나랑 안 맞는 것 같아요.” “제가 이걸 돈 받고 하는 것도 아니고 선생님 그만둬도 나는 아무 상관도 없어요.” “그만둘 거면 빨리 그만둬요.” 말로만 듣던 ‘태움’(영혼이 재가 될 때까지 태운다는 뜻)이 시작되는 걸까? 그는 당황했다. 환자의 생명을 다루는 직업, 신경을 바짝 곧추세우고 긴장의 끈을 놓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과제를 하는데 중간에 다른 일을 시켰다. 일을 마치고 원래 과제를 하는데, 왜 과제를 끝내지 않느냐며 혼을 낸다. 해야 할 일을 못하게 잔소리로 시간을 보내고, 잔소리가 끝나면 왜 제시간에 일을 안 했냐고 또 야단을 친다. 20분 걸릴 일을 시켜놓고 서너 번을 불러 다른 일을 시키고, 야단치고, 20분 뒤 왜 과제를 하지 않느냐며 짜증을 낸다.

그는 프리셉터가 환자를 돌보면서 신입 간호사를 가르치는 일을 같이 하느라 짜증이 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스스로 더 열심히 노력하고 공부해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나 프리셉터의 태움은 갈수록 심해졌다.

“연휴 기간 쉬니깐 좋으시죠? 연휴 기간에 나와서 시험 보세요.” “나이가 많아서 쥐어팰 수도 없고.” “최소 한 시간 반 먼저 출근하세요. 아니, 세 시간 먼저 나오세요.” “끝나고 더 남아서 공부하고 집에 가세요.” “오프(비번)인 날도 나와서 화면 보고 가세요.”

‘이브닝’(오후 근무) 날이었다. 프리셉터가 말했다. “내가 하는 말에는 대꾸하지 말고 무조건 ‘예, 알겠습니다’로 대답하세요.” 교육생과 지도교사 사이에는 질문도, 대화도, 상의도 없었다. 면박과 짜증, 비난과 조롱만이 주어졌다. 평정심을 유지하고 참고 내색하지 않으려 애썼다. 프리셉터는 그럴수록 더 괴롭혔다. 깜지숙제(벌칙 숙제)도 해오라고 했다. 모르는 부분을 지적할 땐 특히 목소리를 높여 다른 간호사와 환자들이 듣게 했다. 정말 치욕감이 들었다. “왜 항상 화를 내고 가르치냐? 내가 당신한테 뭔 잘못을 해서 이런 말을 들으며 살아야 하나? 프리셉터면 사람을 그런 식으로 대해도 되는가? 넌 처음부터 잘났냐? 누가 너보고 그런 식으로 가르치라 그러던? 당신이 하는 그런 말들이 다 폭력이다. 입 밖에 나오지 못한 말들이 응어리로 남아 가슴을 짓눌렀다.

태움 때문에 체중 7kg 감소

어느 날이었다. 그는 컴퓨터 화면을 보며 말했다. “이게 눈에 안 보이냐? 눈깔을 빼서 씻어줄까?” “저한테 좀 맞으실래요? 왜 하라는 대로 안 해요?”

그는 충격적인 장면도 보았다. 환자가 이리타블(과민한 상태) 하면 손바닥으로 가슴을 세게 때렸다. 혈관 라인을 잡을 때엔 환자 팔을 엉덩이로 깔고 앉아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 의식이 좋지 않은 환자가 말을 안 들으면 손바닥으로 가슴을 세게 내리치고 심지어 얼굴을 때리기도 했다. 위급하지 않은데도 저항하는 환자에게 막힌 하수구 뚫듯 에어웨이(기도 확보를 위한 기구)를 삽입해 환자의 잇몸과 구강 안쪽이 피범벅이 된 적도 있었다. 동물이나 죽은 사람에게도 그렇게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또 어느 날 그가 태움을 당하고 있을 때였다. 인공호흡기 때문에 말도 못하고 몸도 가누기 힘든 환자가 그의 손을 꼭 잡았다. 참았던 설움이 북받쳐 눈물이 쏟아졌다.

“나는 항상 죄인처럼 걸어다니고 죄인처럼 인사하고 죄인처럼 대답하고 죄인처럼 밥 먹고…. 이제 두 달 지났다. 1년 버틸 수 있을까? 하루하루가 견디기 힘들다. 두들겨패고 그만두고 싶다. 너무 우울하다. 내 삶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웃긴 걸 봐도 웃기지 않다. 음식도 맛이 없다. 물맛도 쓰다. 두 달 만에 7kg이 빠졌다. 자도 피로가 안 풀리고 잠들기 전 마음이 너무 괴롭고 가슴이 두근거린다. 매일매일이 끔찍하다.”

신입 간호사를 괴롭히는 건 경력 간호사만이 아니었다. 의사에게 태움을 당한 간호사도 적지 않았다. 그는 ‘낮 근무’를 위해 아침 6시에 출근해 다음날 새벽 3시에 퇴근했다. 듀티(근무시간)에 소화하지 못한 전산 처리를 해야 했고, 과장이 원하는 대로 사유서를 써야 했다. 일을 가르친다며 폭언을 일삼았고, 벽에 밀치거나 등짝을 때리기도 했다. 울면서 잘못했다고 용서를 구하기도 했고, 다른 부서로 보내달라고 로테이션을 요청하기도 했지만 괴롭힘은 더 심해졌다. 20대 중반의 그는 결국 사표를 내고 병원을 나왔다. “저는 가끔 그 생각이 날 때면 아직도 눈물이 나고 아무것도 손에 잡히질 않습니다. 너무 무섭고, 무섭습니다. 그저 일정 기간 써보고 쓸 만한 인간이 아니면 쌓인 재고품으로 취급하는 사회, 제발 바꿔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는 직장갑질119에 들어온 제보 내용이다.

중소 병·의원의 권리 찾기

지난 2월, 서울아산병원 중환자병동에서 일하던 박선욱 간호사가 태움을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전국보건의료노조 설문조사 결과 간호사 10명 중 4명이 태움을 당했다. 간호사의 평균 근무연수가 5.4년에 불과하고 신입 간호사의 1년 내 이직률이 33.9%에 이른다. 태움이라는 갑질이 근절되지 않는 이유는 무엇보다 절대적인 인력 부족이다. 인구 1천 명당 활동하는 간호사 수는 3.5명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6.5명)의 절반 정도다.

정부 대책이 발표됐다. 의사나 간호사가 태움·성희롱 등 인권침해 행위를 하면 면허 정지 등 제재를 받는다. 2022년까지 신규 간호사를 10만 명 늘린다. 신입 간호사 교육 전담자를 두되 교육 기간에는 환자를 돌보지 않도록 하고, 정기 실태 조사를 벌인다.

그런데 정부 대책이 시행되면 태움 갑질이 사라질까? 생명을 다룬다는 이유로 벌어지는 병원 태움은 총기를 다룬다는 이유로 벌어지는 군대 군기와 판박이다. 간호사 경력이 태움의 면허증이 됐고, 신입 때 당한 기억은 갑질의 변명이, 병원의 비호는 범죄의 면죄부가 됐다. 선배 간호사들의 진정 어린 자성과 병원 노조들의 실천이 절실하다.

직장갑질119에 갑질을 제보해 한 달 만에 노조를 만든 한림대의료원(한림성심병원)은 선정적인 장기자랑, 체육대회 등 갑질이 상당히 줄어들었다. 최근에는 강동성심병원에도 노조가 만들어졌다. 문제는 갑질 사각지대인 중소병원과 의원이다. 병원노조에 가입한 동네 병원 간호사가 거의 없다. 중소병원 간호사 모임(http://band.us/n/a3aev68121Fdk), 병원노동자119(http://병원노동자119.net) 등에 갑질을 제보하고 권리를 찾아가는 일부터 시작해보면 어떨까? (직장갑질 제보 gabjil119@gmail.com)

박점규 비정규직없는세상만들기 집행위원·직장갑질119 운영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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