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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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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분 간격 업무보고로 새벽 3시 퇴근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 7월16일부터 시행

차별적 업무보고서 강요는 직장 내 괴롭힘으로 봐야
등록 2019-07-12 02:28 수정 2020-05-02 19:29
30분 단위로 업무보고서를 작성하라는 지시는 직장 내 괴롭힘이 아닐까? 한겨레 자료

30분 단위로 업무보고서를 작성하라는 지시는 직장 내 괴롭힘이 아닐까? 한겨레 자료

부서가 바뀌기 전까지 수진(가명)씨는 회사에 불만이 별로 없었다. 팀에서 갈등이나 어려움이 생기면 부서 이사와 소통해 문제를 해결했다. 맡은 업무를 얼마나 잘 수행하느냐로 평가하는 회사였고, 갑질이나 괴롭힘 때문에 스트레스 받는 일도 없었다. 얼마 전 갑작스레 부서가 바뀌었고, 수진씨는 새로운 팀장과 일하게 됐다. 새 팀장에게 적응하는 데 어려움이 있겠지만 그동안 회사의 신뢰를 받았기에 걱정되지는 않았다. 어느 날 점심시간이었다. 팀장이 수진씨에게 업무지시를 했다. 수진씨는 점심 먹고 와서 처리하겠다고 했다. 지금까지 식사 시간을 방해받은 적이 없었고, 취업규칙이나 법에서 보장하는 점심시간만큼은 자유롭게 쓰고 싶었다.

점심시간 눈치 주고 모욕하는 팀장

그러나 팀장의 생각은 다른 것 같았다. 점심시간이 되기 전에 업무를 지시했다. 식사하러 나가는 수진씨에게 눈치를 줬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고 생각한 수진씨는 부서를 책임지는 이사에게 면담을 요청했다. 면담 신청 사실을 알게 된 팀장이 그를 회의실로 불러 불만이 뭐냐고 물었다. 수진씨는 점심시간 방해 말고는 없다고 했다. 그러자 팀장이 말했다. “그것도 사회생활의 일부야. 네가 하기 싫어도 할 줄 알아야 한다고.” 수진씨가 누구에게도 점심시간을 간섭받아본 적 없다고 했더니, 팀장은 부서를 옮겼으니 이제는 싫은 것도 해야 한다며 그것 때문에 이사에게 면담을 신청했냐고 화를 냈다. 수진씨는 더는 말하지 않았다.

이사는 수진씨와 면담 뒤 조처를 하겠다고 했다. 수진씨는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자리로 돌아왔다. 한참 통화하고 돌아온 팀장이 수진씨에게 오더니 소리를 질렀다. 거짓말 잘하는 고자질쟁이라고 했다. 이것도 이사한테 일러바치라고 했다. 사무실 직원들이 보는 앞에서 점점 언성을 높이며 모욕을 줬다. 수진씨는 당황했다. 법에 보장된 점심시간을 방해하지 말아달라는 것뿐인데, 이게 무슨 잘못을 한 건지 이해하기 힘들었다.

다음날 팀장이 수진씨를 불렀다. 업무지시서를 던져주며 30분 단위로 업무보고서를 작성해 올리라고 했다. 퇴근시간이 지난 저녁 7시 무렵, 팀장은 수진씨에게 업무보고서를 달라고 했다. 점심시간 이후 이사와 회의했고, 다른 업무를 하느라 업무보고서를 못 썼다고 했다. 곧 작성해서 보고하겠다고 했다. 팀장은 소리쳤다. “내 말을 무시하는 거야? 네가 다 기억하고 있어? 메모라도 해뒀냐고? 어떻게 작성할 거야?” 수진씨가 대충 기억한다고 하자 팀장은 “너는 대답은 참 잘한다. 하는 건 하나도 없는데”라며 비꼬았다. 수진씨는 늦은 밤까지 책상에 앉아 30분 단위 업무보고서를 모두 써서 팀장에게 제출했다.

‘업무보고 괴롭힘’은 멈추지 않았다. 팀장을 비롯해 회사의 모든 직원이 퇴근했다. 수진씨는 업무보고를 거부할 경우 팀장이 쏟아내는 인신공격과 모욕을 견뎌낼 수 있을지 두려웠다. 대중교통마저 끊긴 시간, 그는 책상에 앉아 울면서 일했다. 새벽 3시. 팀장의 업무지시서, 30분 단위 업무보고서, 새벽까지 일한 보고서, 그리고 사직서를 이사 책상에 두고 그길로 짐을 챙겨 회사를 나왔다.

“어디 잠시라도 자리를 비울 때조차 회사 안에 있음에도 보고해야 했고, 일하기도 바쁜 시간에 30분 단위 업무보고서를 써야 했습니다. 일부 못 쓴 시간에 대해 뭐라 했고 이날뿐만 아니라 다른 날에도 특정 사람들 앞이나 혼자 있을 때 인신공격과 모욕감을 주는 언행을 자주 했습니다. 그 때문에 저는 너무 많은 스트레스를 받아 밥을 먹지 못하고 위 기능 장애가 왔으며 정신적 스트레스로 일부 지인들 외에 다른 사람들과 전화하거나 만나지 못했습니다. 이러한 팀장의 갑질 어떻게 처벌할 수 있나요?”

고용부 매뉴얼엔 빠진 ‘부당한 업무보고서’

팀장의 점심시간 업무지시, 부당한 업무보고서, 모욕적인 언사 등은 직장 내 괴롭힘으로 7월16일부터는 회사에 팀장을 신고할 수 있다. 하지만 팀장은 업무의 하나고, 수진씨가 새벽까지 일한 것도 업무 능력이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반박할 수 있다. 모욕죄나 명예훼손죄는 공연성, 즉 불특정 다수에게 전파될 가능성이 있어야 하고, 명백한 증거가 있어도 벌금형이 고작이다. 고용노동부가 발표한 ‘직장 내 괴롭힘 판단 및 예방·대응 매뉴얼’에서 ‘금지되는 괴롭힘 행위’에는 수진씨가 당한 ‘업무보고 갑질’이 빠져 있다. 직장갑질119가 발표한 ‘모범취업규칙’에는 “[반성] 적정 범위를 넘거나 차별적으로 경위서·시말서· 반성문·일일업무보고를 쓰게 하거나, 업무상 필요성이 없는 독후감을 쓰게 하는 행위”로 규정돼 있다. 수진씨가 괴롭힘을 버티다 7월16일 이후 고용노동부에 직장 내 괴롭힘으로 신고했다면 근로감독관들은 어떻게 판단했을까?

“기관장께서 왜 바로 보고하지 않았냐고 시말서 쓰라고 하셨습니다. 경위서를 제출했는데 불충분하니 더 보완하라고 세 번이나 말씀하셨습니다. 다른 직원도 시말서를 쓰고 퇴사했는데, 기관장이 시말서를 요구한 이유가, 직원이 스스로 인정했다는 증거자료를 남기기 위해서라고 말씀하셨던 것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시말서를 하루에도 몇 번씩 강요하셨고 인사담당 직원이나 부하 직원이 있는 상황에서 제가 뭘 잘못했는지, 제가 얼마나 회사에 손해를 끼쳤는지 생각하고 자아성찰하며 작성하라고 모욕감을 주는 것은 아무 문제가 없는 건지요?”(직장인 A)

“경위서 요구부터 지금까지 직무정지 4일째입니다. 제가 억울한 건 처음부터 경위서를 쓰지 않은 것도 아니고, 시간의 흐름에 따라 일을 못하게 된 동기까지 써서 제출했음에도 2차, 3차 경위서를 요구하고, 심지어 오전 오후 내용도 바뀌어 작성을 요구하는 등 갑작스러운 직무정지로 동료들과도 고립됐고, 근무지를 따라다니며 지적하는 횡포를 당했습니다. 어찌 대처하면 좋겠습니까?”(직장인 B)

고용노동부가 발표한 ‘직장 내 괴롭힘 판단 및 예방·대응 매뉴얼’에 따르면 7월16일 시행되는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의 괴롭힘 행위로 ①폭행이나 협박 ②반복적 욕설이나 폭언 ③모욕감이나 소문 ④사적 지시 ⑤업무 성과 조롱 ⑥따돌림이나 의사결정 배제 ⑦허드렛일 지시 ⑧업무 배제 등이 있다. 반복적인 업무보고서나 시말서·경위서·반성문 같은 내용이 포함돼 있지 않다. 1월에 만든 초안에는 ‘부당한 징계 부여’(반성문, 처벌 등)가 있었는데 빠졌다.

직장 내 괴롭힘 전담 근로감독관 70명 역할 막중

근로기준법 제76조의 2에는 직장 내 괴롭힘을 “직장에서의 지위 또는 관계 등의 우위를 이용하여 업무상 적정 범위를 넘어 다른 근로자에게 신체적·정신적 고통을 주거나 근무환경을 악화시키는 행위”라고 규정한다. 30분 단위 업무보고서를 쓰게 하는 일이 ‘적정 범위’라고 할 수 있을까? 새벽 3시까지 일해야 했는데 근무환경을 악화하는 행위가 아니란 말인가? 업무보고 때문에 스트레스로 위 장애가 왔는데 ‘신체적·정신적 고통을 주는 행위’가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고용노동부가 근로감독관 70명을 직장 내 괴롭힘 전담 감독관으로 지정했다. 그들의 역할이 막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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