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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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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가 월급을 상품권으로 주거나 억지 장기자랑을 벌인다면…

박점규의 갑돌이와 갑순이 22개월의 연재를 마치며
등록 2019-11-11 02:03 수정 2020-05-02 19:29
박점규 직장갑질119 운영위원이 서울 정동 민주노총 사무실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 류우종 기자

박점규 직장갑질119 운영위원이 서울 정동 민주노총 사무실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 류우종 기자

강성우씨는 복사기를 만드는 신도리코에서 일한다. 매달 서울 본사에서 회장과 고위 임원들이 충남 아산공장을 방문한다. 아산공장 직원들은 보고서를 완벽하게 만들고, ‘높으신 분’들이 지나가는 동선마다 먼지 하나 없게 몇 번을 쓸고 닦아야 한다. 그런데 업무상 적정 범위를 넘는 지시사항이 있다. 식사 수발과 장기자랑이다.

여직원 차출해 밥 시중

아산공장 관리자들은 ‘높으신 분’들의 식사 시중을 위해 여직원 두 명을 차출한다. 두 여직원이 미리 식당에 가서 밑반찬을 테이블에 차려놓고, 관리자들이 식사하러 오면 정중히 인사하고, 그들이 자리에 앉으면 국과 밥을 놓는다. 관리자들이 밥 먹는 동안 뒤에서 다소곳이 서서 부족한 반찬은 없는지 살핀다. 회사는 여직원들이 의무를 나눠 지게 하기 위해 매달 담당자가 적힌 계획표를 만들었다. 만삭의 임신부도 열외일 수 없다.

1년에 한 번 열리는 확대 석식 간담회를 위해서는 장기자랑을 준비해야 했다. “회장님이 장기자랑 보는 걸 좋아하신다”고 알려졌기에 싫어도 빠질 수 없다. 부서별로 할당이 내려왔다. 퇴근 뒤 모여 동영상을 보며 춤을 연습한다. 가발을 쓰고 치마를 입고 무대에 올라 걸그룹 춤을 춘다. 옆 부서는 차력쇼를 한다. 회장은 저녁을 먹으며 장기자랑을 즐긴다.

관리자들은 불만을 표현하는 직원들에게 “한 달에 한 번 여자가 밥 차리는 게 그렇게 문제될 일이냐”고 했다. 강하게 문제를 제기한 사람은 유독 진급이 안 되거나, 먼 지역에 장기간 출장 가는 대상자가 됐다. 동료가 불이익 받는 것을 지켜본 사람들은 공포심을 갖게 됐고 침묵하게 됐다.

성우씨는 직원들을 불러 모아 노조를 설립했다. 노조는 회사에 공문을 보냈고, 단체교섭에서 식사 수발과 장기자랑을 없앨 것을 촉구했다. 회의에서 장기자랑에 모두 참여하지 않기로 결의했다. 장기자랑이 사라졌다. 하지만 회사는 밥 시중을 포기하지 않았다. 노조는 동영상을 찍어 언론사에 제보했다. 결국 회장이 서울에서 점심을 먹은 뒤 아산공장을 방문하는 것으로 일정을 바꾸었다. 수십 년을 이어온 직장갑질을 노조의 힘으로 없앤 것이다.

직장갑질119 출범 다음날일 2017년 11월2일 오전 11시, ‘적폐한림청산일송’이라는 아이디의 간호사가 단체대화방에 들어와 “한림대성심병원 계열 계십니까?”라고 물으며 동료를 불렀다. 선정적 장기자랑, 강압적 화상회의, 청소, 앵벌이 갑질 등을 쏟아냈다. 제보 149건을 모아 갑질 보고서를 만들어 국회에 보내고 노동부에 근로감독을 요구했다. 11월9일 네이버 밴드에 한림성심병원 모임을 만들어 직원들을 초대했다. 보름 만에 밴드 가입자가 400명을 돌파했다. 12월1일 보건의료노조 한림대의료원지부를 결성했고, 갑질 근절에 관한 단체 교섭을 했으며 5개월 뒤엔 강동성심병원에도 노조가 만들어졌다.

‘괴롭힘이 모호하다’던 자한당 의원들

2018년 1월 방송계갑질119 단체대화방에 아이디 ‘상품권1천만원’이 들어왔다. SBS 시즌1 당시 6개월 치 넘는 임금을 롯데와 신세계 상품권으로 받았다는 내용이었다. 상품권 페이(급여) 제보를 받았다. 에서 상품권으로 급여를 받은 작가와 인턴의 제보가 쏟아졌다. 이 기획 보도를 했고 시민들이 공분했다. 보름 만에 SBS가 상품권 페이를 중단한다고 발표했다. 누군가 ‘노조 만들자’라는 카톡을 올리자, ‘노조가입동의1’ ‘노조가입동의2’로 이어졌다. 2월3일 첫 모임이 열렸고, 2018년 7월 희망연대노조 방송스태프지부가 됐다.
지난해 9월 경기도 광주 장애인시설 동산원 직원들이 긴 내용의 전자우편을 보냈다. 이사장 가족의 인권유린, 성희롱, 횡령, 임금체불 등 심각한 갑질이 벌어지고 있었다. 신원을 보호하기 위해 직원들을 단체로 만났고, YTN 기자들도 함께 만나 보도하게 했다. 경찰이 수사에 나섰고, 증거인멸 사실을 알려 압수수색도 이뤄졌다. 회사는 1년 치 체불임금을 주겠다고 직원들을 회유했다. 직원들은 공공운수노조 사회복지지부에 가입했다. 법대로 체불임금 3년 치를 돌려받기로 했고, 단체교섭을 진행 중이다.
직장갑질119 출범 1년차는 직장갑질의 심각성을 사회에 알리고, 문제 해결을 촉구하는 시간이었다. ①한림대성심병원 선정적 장기자랑 ②농협 간부 소주병 폭행 ③쿠쿠전자 마라톤 ④육아종합지원센터장 논문 대필 ⑤101경비단장 헬스트레이너와 마사지 ⑥동산원 이사장 불법시위 동원 ⑦성균관대 대학원 교수 자녀 논문 대리 작성 ⑧금호고속 신입사원 군대식 교육 ⑨신한생명 연수원 금붕어 ⑩SBS 상품권 페이 등이 세상에 알려졌다.
직장갑질119 2년차는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을 제도화한 기간이었다. 자유한국당 의원들이 “괴롭힘을 정의한 규정이 모호하다”는 이유로 법안을 ‘국회의 무덤’이라 하는 법안심사2소위로 넘겼을 때다. 국회에서 ‘양진호 방지법’ 통과를 촉구했고, 제보자들이 집단 항의 전화를 걸었다. 결국 지난해 12월27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해 7월16일부터 시행되고 있다. 법 개정 직후인 올해 1월6일 을 만들었고, 모범 취업규칙을 발표했다. 고용노동부 매뉴얼 제정에 참여했다. 직장갑질119는 사각지대를 없애고 실효성을 높이기 위해 ①가해자 처벌 조항 신설 ②5명 미만 사업장 적용 ③간접고용 노동자 적용 ④실업급여 수급 ⑤의무교육을 요구했다. 10월18일 고용노동부는 정당한 이직 사유에 ‘직장 내 괴롭힘’을 추가하는 고용보험법 시행규칙 일부개정안을 입법 예고했다.

업종별 ‘갑질119’ 온라인 모임도

직장갑질119 3년차는 직장인들이 스스로 뭉쳐 권리를 찾아가도록 할 계획이다. 직장갑질을 없애는 가장 좋은 방법은 노동조합이다. 하지만 기업별노조가 고착된 대한민국에서 중소영세기업 노동자들에게 노조는 먼 나라 이야기다. 300명 이상 사업장의 노조가입률은 57.3%이지만, 30~99명은 3.5%, 30명 미만은 0.2%다. 업종별로 온라인 모임에서 서로 정보를 주고받고, 갑질을 제보하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 보육교사모임·사회복지119·대학원생119 등 업종별 모임이 만들어졌고, 간호조무사·미용사·학원강사 모임을 추진하고 있다. 지난 10월 직장인 1천 명을 설문조사했는데 “직장갑질에 대응하기 위해 같은 업종(직업)별로 온라인 모임이 만들어진다면 가입할 의향이 있다”는 응답이 36.8%로 ‘없다’(24.7%)보다 높았다.
“공관에 있는 감을 따야 한다면 공관병이 따야지 누가 따겠습니까?” 박찬주 전 육군 대장과 같은 갑질 사장에게 맞설 수 있는 가장 큰 힘은 직장인들이 뭉치는 일이다.
직장갑질 제보 gabjil119@gmail.com
후원계좌 010-119-119-1199 농협
*연재를 마치며
용기 내 제보한 직장인 이야기를 언론을 통해 세상에 알려 소중한 경험을 나누고 갑질에 맞서길 바라는 마음으로 22개월 동안 연재했습니다. 연재는 끝나도 119 활동은 계속됩니다. 독자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박점규 비정규직없는세상만들기 집행위원·직장갑질119 운영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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