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실리콘밸리에서 성공한 한인 스타트업(신생 벤처기업) 창업자로 손꼽히는 이수인(41) 에누마(Enuma) 대표는 1980년대 수준에 머물던 장애아동의 학습 도구를 새롭고 아름다운 기술로 ‘혁신’했다. 은 6월5일 서울을 찾은 이수인 대표를 서울 공덕동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혁신의 동력은 모성이었고, 모성에 기반한 혁신은 끊임없이 확장됐다. 이미 ‘에누마 이수인’으로 유명해진 그에게 그동안의 성과는 묻지 않았다. 대신 무력감을 느끼던 ‘엄마’가 교육권을 박탈당한 전세계 아이들을 위해 ‘혁신가’로 거듭난 과정에 질문을 집중했다.
4박5일 일정으로 한국에 온 첫날 이수인 ‘에누마’ 대표를 만났다. 새벽에 공항에 내려 ‘킷킷학교’ 개발을 위한 한국국제협력단(KOICA) 회의와 서울 사무소 회의 등의 일정을 소화한 뒤였다. 두 달 전 둘째아이를 출산한 그의 출장을 위해 한국의 친정어머니가 이틀 전 미국 집을 찾았다고 한다. 이수인 대표는 7월 열리는 ‘2017 아시아 청년 사회혁신가 국제포럼’에 연사로 참석한다.
아이가 장애를 갖고 태어난 것을 알았을 때 무서웠다. 아이는 아픈데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게임 개발밖에 없었다. 나는 영어를 잘 못했다. 아이는 태어나자마자 병원 집중치료실에 오래 있었다. 어느 날 의사가 지나가면서 “무슨 일을 하냐”고 물었다. “게임을 만든다고 대답하는데 그렇게 부끄러울 수 없었다. 치료사도 의사도 아닌, 아픈 내 아이한테 하등 도움이 안 되는 직업을 가졌다는 게 부끄러웠다. 그런데 의사가 ‘판타스틱, 여기 있는 아이들한테 너무 필요한 기술이다’라고 말했다. 이 말을 그날 일기에 적은 기억이 난다. 아이가 아프면 집에서 아이를 돌봐야지 무슨 일을 하냐고 말하는 사람들이 간혹 있다. 지금 생각하면 아이를 위해 아무 것도 못하는 게 무서워서 무슨 일이라도 한 것 같다.
남편(이건호 에누마 최고기술경영자(CTO))과 구글에서 장애아동과 특수교육을 위한 게임을 검색해봤다. 수준이 너무 낮아서 당황스러웠다. 서울의 한 병원에서 본 인지치료용 게임은 1990년도 초기에 제작된 것이었다. “왜 회색과 초록색밖에 안 쓰냐”고 물으니 “자폐증 아이들한테 좋아서”라는 게 병원 쪽 대답이었다. 알고 보니 게임이 윈도3.1 체제에 맞게 개발돼 색을 온전히 못 쓴 것이다. 남편은 엔씨소프트의 테크니컬 디렉터였고, 나는 게임 디자이너였다. 건강한 성인이 한두 시간 노는 데 전세계의 기술과 자원이 얼마나 투입되는지 아는 우리로서는 분노가 치밀었다. 우리 아이한테 줄 수 있는 훌륭한 교육용 게임을 개발하면 다른 아이들한테도 도움이 되겠다고 생각했다. 운 좋게 2009~2012년 한 기업의 사회공헌 프로젝트를 통해 터치스크린 기반의 교육 게임을 만들었다.
미국은 장애를 가진 영·유아에게 출생 3개월부터 조기교육을 제공한다. 우리 아이도 일주일에 서너 번 방문 치료사한테 다양한 교육을 받았다. 아이의 언어치료사, 작업치료사 등이 도움을 줬다. 장애아동의 엄마들도 함께했다. 미국인 팀원들은 장애아동의 부모가 많았다. 마케터, 교사 등 전문성이 있어도 아이를 케어하느라 풀타임으로 일할 수 없는 이들이었다.
2012년 프로젝트가 끝났는데, 실리콘밸리의 유명 투자자(‘K9벤처스’의 마누 쿠마르 대표)가 “돈 줄 테니 창업하라”고 했다. 얼마나 특별하고 드문 기회인지 모르고 “우리는 무슨 일이 있어도 장애아동을 위한 제품을 만들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괜찮다”고 답했다. 남편과 함께 에누마를 창업했고, 2014년 ‘토도수학’을 애플 앱스토어에 출시했다.
개발 당시 교육학 석사 학위자 6명이 있었다. 미국의 특수교사, 교사, 아동 수학 평가 분야 박사, 대학교수와 일했다. 아이들의 인지 발달을 고려해 설계했다. 무엇보다 팀원 10여 명이 모두 3~8살 아이 엄마였다. 교육 전문가인 것도 중요하지만 ‘엄마’라는 사실이 굉장히 중요하다.
우리는 비장애아동도 갖고 싶어 하는 학습용 앱을 만들고 싶었다. 토도수학을 본 사람들은 “장애아동이 쓰는 것처럼 안 생겼어요”라고 말한다. 그들에게 “장애아동이 쓰는 건 어떻게 생겨야 하는데요” 물으면 흠칫 놀란다. 똑똑한 아이에게는 비싸고 좋고 아름다운 것을 주고 그렇지 않은 아이에게는 안 줘도 된다고, 그래도 불평하지 않는다고 생각한 것이다.
전세계 2억5천만 명 아이들의 문맹 문제와 우리 아이가 학교에서 읽기, 셈하기, 쓰기를 못하는 문제를 별개로 생각한다. 문맹, 학습장애, 교육 양극화, 다문화가정 교육 등을 개별적 문제로 나누기 시작하면 끝이 없다. 아이 처지에서는 모두 같은 문제다. 어떤 수준이나 상황에서도 배우고 싶은 마음이 있으면 배울 수 있어야 한다.
토도수학을 어떻게 확장할까 생각하다가 ‘글로벌 러닝 엑스프라이즈’(Global Learning XPRIZE)라는 국제대회를 알게 됐다. 테슬라의 최고경영자(CEO) 일론 머스크 등이 출연해 상금 150억원이 걸린 국제대회다. 탄자니아 학교에 태블릿PC만 제공한다는 전제로 읽기, 쓰기, 셈하기 교육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미션이다. 우리는 에누마가 그 방법을 가장 잘 아는 전문가 그룹이라고 생각했다.
비슷하다. 부자 동네 아이들은 교육 도구가 좀 허술해도 괜찮다. 엄마가 책 읽어주고, 경험하는 것도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프리카 아이들은 태블릿PC가 장난감, 엄마, 교사 역할까지 해야 한다. 아무런 보조 수단이 없을 때는 교육용 앱의 품질이 좋아야 한다. 공부를 잘하든 못하든, 잘살든 못살든 최고의 프로그램이 모두에게 주어지는 세상은 디지털에서만 가능하다. 게임업계에서는 평등 개념이 일반적인데 다른 분야에서는 안 그렇더라. 나 같은 게임은 동네 떡볶이집 아들이건 재벌 회장 아들이건 모두 재미있게 즐긴다.
‘아이를 키우는 우리도 일할 수 있는 회사’가 모토다. 사무실에서 제일 좋은 방은 아이를 데리고 올 수 있게 늘 비워둔다. 장난감도 있다. 미국에서는 아이가 아프면 학교에 못 보내기 때문이다. 실리콘밸리 스타트업들을 보면 사무실 인테리어를 아름답게 꾸미고 개·고양이도 데리고 올 수 있다. 그러나 아이를 받아주는 회사는 별로 없다. 아이가 아프면 “와, 오늘 엄마 회사 가는 날이다”라며 좋아한다. 물론 회사가 매일매일 눈부시게 성장하는 건 아니다. 어느 날 누군가의 자리가 없어지는 슬픈 일도 있다. 그래도 우리끼리 말한다. 서로 믿고 이런 ‘럭셔리’ 생활을 즐길 수 있을 때까지 최대한 이렇게 지내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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