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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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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만 잡고 자는 오빠들 커밍아웃하라

제3의 성적소수자, 섹스리스 권리청원 서명운동 벌어져…‘손만 잡곤 못살아 펀드’ 비롯해 보수 노인 단체서도 열혈 지지 일어
등록 2011-05-27 03:14 수정 2020-05-02 19:26

서울시청 앞에서 대학 선배인 S형을 만났다. 근 10년 만이었다. 까무잡잡한 얼굴은 나를 보자마자 환하게 웃었다. “너 잘 만났다. 지금 애인 있느냐?” “아뇨. 인연도 안 생기고… 요즘은 아예 욕구도….” “그럼 그렇지. 서명 좀 해라.” 그가 건넨 종이에는 ‘성적소수자 권리청원을 위한 100만인 서명’이라고 적혀 있었다. “근데 형 게이였어요?” “그게 무슨 소리야? 내가 여자를 얼마나 좋아하는데?”

“섹스리스도 성적소수자로 인정하라”

나는 S형이 뜻한 바가 있어 서명운동을 도와주는가 싶어, 펜을 꺼내 용지로 가져갔다. 그런데 그 내용이 이상했다. “근데, 형. 성적소수자라는 게 동성애자나 트랜스젠더를 말하는 거 아니었어요?” “아, 그 사람들도 마이너이긴 하지. 근데 우리 소수자들은 좀 다르다.” “뭐가 달라요?” “우리 성적소수자는 말이지. 남들 10번 할 때 1번 하는 사람들, 남들 둘이서 할 때 혼자 하는 사람들이야.” “뭘요?” “뭐긴 뭐야, 섹스지. 인간에게 주어진 가장 큰 기쁨을 사회적 억압과 장애로 인해 못한다는 게 말이 돼?” “억압과 장애라뇨? 누가 못하게 해요?” “야, 너는 최근에 한 게 언제야?” “그, 글쎄요?” “잘 기억 안 나지? 그만큼 오래됐단 거 아냐? 결국 혼자서 할 거 아냐?” 형의 목소리는 커졌고, 나들이 온 사람들이 우리 대화를 엿들으며 키득댔다. “형, 창피하게 그런 이야기를 공공장소에서….” “야, 섹스가 창피해? 동성애자라는 걸 숨겨야 해? 자위하는 게 부끄러워? 그게 다 억압이야. 우리 모두 커밍아웃해야 해. 나는 외칩니다. 지난 20년간 여자하고는 한 번도 못했습니다!”

일러스트레이션 조승연

일러스트레이션 조승연

얼떨결에 말려든 나는 S형의 서명운동을 도와주게 되었다. 그 자리는 묘하게도 ‘무상급식 반대’와 ‘청소년 인권조례’ 서명운동을 받고 있는 두 텐트 사이였다. 그리고 그 결과는… 놀랍게도 양쪽의 서명자를 합친 것만큼의 서명을 받아버렸다. 무상급식 포퓰리즘에 반대한다는 서울 대치동의 40대 주부는 “아이고, 얄궂게 이런 걸”이라면서, “아이들 사교육비 때문에 남편이 해외 근무 중인데 5년째 생과부”라고 실토했다. “학생 체벌은 절대 금해야 한다”는 남자 대학생은 “취업 준비도 버거운데 여자친구 만드는 건 사치”라며, 예전 애인과 “2년 전 러브호텔 앞에서 4만원이 아까워 돌아선 게 마지막 시도”였다며 서명에 동참했다. S형조차 뜻밖의 호응에 얼떨떨해하는 것 같았다.

2주 뒤 TV의 ‘뉴스 추격’ 시간에 S형이 등장했다. 아나운서는 우리 사회의 섹스리스 문제가 심각해 결국 성적소수자가 커밍아웃 운동을 하는 사태에까지 이르렀다고 전했고, S형은 자신 있게 주장을 펼쳤다. “말이 성적소수자지, 실제로는 우리 사회의 다수일 수도 있습니다. 일본에서 나온 이라는 책을 보면 40대 초반 남성 중 10% 정도가 성경험이 전혀 없다고 합니다. 3D(실제 여성)와 관계를 맺기보다 2D(비디오·잡지 등의 성인물)에 의존하는 거죠. 우리나라도 이와 비슷해진다고 생각하는데요. 문제는 독신자만이 아닙니다. 행복가정연구소, 한국성과학연구소 등에서 진행한 여러 조사를 보면 40대 부부 4쌍 중 1쌍이 한 달에 한 번도 관계를 맺지 않는다고 해요.”

성적소수자 단체 ‘옆반 사이’ 개설

“성적소수자들의 처지가 딱한 건 알겠는데, 도대체 어떤 조치를 원하시는 겁니까?” “우리는 소수자를 4단계로 구분합니다. 최근 1년간 한 번도 못한 4등급, 3년간 한 번도 못한 3등급, 10년간 한 번도 못한 2등급, 그리고 태어나서 한 번도 못한 1등급. 우리는 이 등급에 따라 주민센터에서 성인영화 동반관람권, 데이트 알선업체 등록권, 러브호텔 숙박권 등을 주는 혜택이 이루어지기 바랍니다.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에게 여러 가능성을 부여하는 거죠.” “사실 1등급인 중증소수자는 자체적으로 해결이 어렵지 않습니까?” “솔직히 그렇죠? 그들에게는 스티커를 발부해 장애인 구역에 주차할 수 있다든지 하는 혜택을 주었으면 합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안 했다는 건 어떻게 증명합니까?” 날카로운 질문에 S형은 얼버무렸다. “조, 좋은 질문입니다. 그러니까… 소수자 실태를 연구하기 위한 사업에 정부 차원의 지원이 있어야 하고요. 어쨌든 저희는 법이나 제도만이 아니라 문화적으로 성적소수자의 권리가 보장돼야 한다… 그러니까 같은 영화를 보면 동정인 남자를 멸시한다든가, 자위 행위를 부끄러워하는 장면이 나오지 않습니까? 이런 것은 분명히 시정돼야 합니다.”

방송 이후 성적소수자 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세력들이 윤곽을 드러냈다. 40~50대 주부들이 모인 ‘각방살이 자매단’은 부부생활을 소홀히 하는 남편들에게 ‘합방 청구서’를 발송하고, 불이행시 대대적인 위자료 소송에 나설 것임을 천명했다. 30~40대 남성이 중심이 된 ‘기러기 부대’도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결성됐는데, 부인과 자식을 해외로 보낸 남편들이 본인의 순결을 증명하는 차원에서 커밍아웃하게 된다. “우리는 매일 밤 부인의 사진을 보고 외로움을 달랠 뿐, 회식 이후 2차 등 불건전한 행동을 절대 하지 않았음을 맹세합니다.” 1등급 동정의 남성들이 대거 소속된 ‘미연시(미소녀 연애 시뮬레이션) 클럽’은 성인 매체 및 용품의 수입 자유화와 가상 결혼 합법화 등을 내걸고 의원 로비에 나섰다.

각계의 지지도 줄을 이었다. 알흠다운재단은 ‘손만 잡곤 못살아 펀드’를 만들어, 경제적 문제로 합방에 들어가지 못한 연인을 위한 모텔비를 지원하고, ‘각방살이’ 부부를 위한 침실 환경 개선 사업을 벌이게 되었다. 재단에서 진행하는 청소년 캠프 등에 소수자 부부 자녀를 우선적으로 입소시키는 정책도 큰 호응을 얻었다. 전투적인 젊은 여성들은 ‘초식남 토벌대’를 결성해, 연애에 관심 없고 자기 꾸미기에 바쁜 남성 성적소수자를 해방하는 일에 앞장서기로 했다. 그러나 이들은 잘 꾸미고 다니는 초식남이 해방의 대상이지, 방구석에서 애니메이션 캐릭터와 가상의 결혼 생활을 하는 ‘오덕후’들과 연대할 의사는 전혀 없다고 선을 그었다.

나는 어쩌다 보니 S형이 만든 성적소수자 단체인 ‘옆반 사이’의 간사 일을 하게 되었다. 동성애자들이 스스로를 ‘이반’(this class)이라고 하기 때문에, 섹스리스들은 ‘옆반’(next class)이라고 이름을 붙인 거란다. 내가 이반이 그런 뜻이 아니라고 했지만 상관없단다. S형은 단체 일을 나에게 맡기고 각종 강연과 학습 사업에 뛰어들었다. 계기는 형이 (Men’s Hands)와 인터뷰하면서부터다. 형은 20여 년간의 동정 생활을 이겨낸 노하우를 상세히 고백했는데, 그달 잡지 표지에 ‘자위왕’(King of Single Sex)으로 소개됐다. 원래 남성 건강 전반을 다루는 잡지인 줄 알았는데, 손의 악력을 전문적으로 단련하는 잡지였던 것이다.

독거노인 성해방 감사패 받기도

이후 형은 라는 책을 발간하고, 백화점 문화센터 등에 특강을 나가기 시작했다. 대히트였다. 표절에 가까운 책이 대거 쏟아져나왔고, 전국의 주민센터에서 유사한 강의들이 개설됐다. 처음에는 보수적인 노인 단체들에서 강의장을 부수고 들어오는 등 반대가 있었지만, 형의 현란한 실습을 보더니 열혈 수강생이 되었다. 형은 독거노인들의 성을 해방시켰다는 취지로 감사패를 받았다.

S형은 유명세 덕분에 온갖 여자들의 유혹을 받게 되었지만 아직도 꿋꿋이 동정을 지키고 있다. 어떤 의사는 S형이 자기 손과 판타지에 의존하며 실제 여성과 관계할 수 없는 몸이 되었을 것이라고 했다. 어쨌든 몸과 생각이 일치한다는 점은 높이 사줘야 하지 않나?

이명석 저술업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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