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뭐든지 로또 공화국

무리한 토건사업 등으로 재정 적자에 봉착한 대한민국

복권사업 자율화로 베팅할 수 있는 모든 것에 돈을 건다는 상상
등록 2011-08-03 07:07 수정 2020-05-02 19:26

지난주 대한민국은 희대의 ‘날씨 조작 사건’으로 뒤숭숭했다. 지금까지 일기예보와 맞지 않는 갑작스런 호우로 낭패를 본 시민들은 모두 범죄조직의 희생양이었던 것이다. 경찰은 이 사건에 가담한 혐의로 속칭 ‘레인맨’ 일당 12명을 체포했는데, 이들은 조직적인 부정을 통해 ‘날씨 로또 365’에 개입해 수천억원에 이르는 불법적인 이익을 얻었다고 한다. 공범들 중에는 섹시한 외모와 파격적인 의상으로 인기를 모은 기상캐스터 H를 비롯해 전·현직 기상통보관, 일급 해커 등이 포함돼 있어 큰 충격을 주고 있다. 도대체 이 나라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뭐든지 로또 공화국. 일러스트레이션 조승연

뭐든지 로또 공화국. 일러스트레이션 조승연

희대의 날씨 조작 사건에 연루되다

한국 정부는 5년 전 막대한 재정 적자에 봉착하게 된다. 마구잡이식으로 벌여온 국책 토건사업, 국제 행사, 선심성 공약 등이 문제였다. 적자는 걷잡을 수 없이 늘어났고 모라토리엄 직전의 상황에까지 이른다. 결국 정부·여당은 획기적인 재원 마련의 일환으로 ‘복권 자율화 법안’을 밀어붙인다. 기존의 로또, 연금복권, 경마, 경정, 스포츠토토는 물론 모든 형태의 복권사업을 자율화해 신고제로 전환한 것이다. 그리하여 매출액의 10%인 레저세를 납부하기만 하면 어떠한 형태의 승부도 복권을 발행할 수 있게 되었다.

제일 먼저 등 각종 순위 프로그램을 대상으로 한 로또가 인기를 모았다. ‘나는 가수다’의 경우 녹화 전날까지 가수들의 예상 순위를 찍어 7명의 순위를 모두 정확히 맞히면 1위의 당첨금을 받게 되는 것이다. 시행 초기부터 여러 말이 오고 갔다. 청중 평가단이 특정 후보에게 돈을 건 뒤 무대 수준과 상관없이 표를 줄 수 있지 않겠냐? 제작진이 특정 후보를 밀 수도 있고, 가수가 컨디션을 핑계로 일부러 실력을 발휘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1천만 건 이상의 베팅이 이루어진 가운데 ‘나가수 로또’는 대성공을 거두었고, 이후 여러 채널에서 로또화할 수 있는 순위 프로그램을 경쟁적으로 신설했다.

‘날씨 로또 365’는 여러 기상 현상에 베팅하는 도박이다. 종목은 대단히 많아 일조량, 기온, 습도, 태풍의 진로, 황사, 열대야 등의 현상에 돈을 걸 수 있는데, 가장 인기가 많은 것은 역시 ‘강우 도박’이다. 원래 캄보디아의 바탐방주에서는 화교들을 중심으로 ‘비 도박’이 행해져왔다. 주민들이 지붕에 13장의 화장지를 붙여놓고 물에 젖어 떨어지면 ‘강우’로 판정을 내려 승자를 가리는 것이다. ‘날씨 로또 365’의 ‘강우 도박’은 기상청에서 발표하는 강우량을 통해 판정하는데, 최근 한반도의 기후가 급격히 바뀌어 언제 집중호우가 쏟아질지 예측하기 어려워진 탓에 하루 수십억원의 상금이 오고 가는 초대형 도박판이 된 것이다.

여기에 ‘레인맨’파의 조직적 부정이 개입되었다. 이들은 해커를 동원해 위성 기상정보를 조작한다든지, 기상통보관이 미세한 수치를 무시한다든지 하는 방법으로 강우 예측을 어긋나게 했다. 거기에 속칭 ‘비의 여신’이라 불리는 기상캐스터 H의 활약이 더해졌다. ‘레인맨’파는 과감한 노출 의상으로 유명한 H의 인기를 이용해 ‘H가 노란 옷을 입고 나오면 비가 온다’ ‘H의 치마 길이가 곧 기온이다’ 같은 속설을 퍼뜨렸다. 그리고 내부 정보를 통해 작은 판에서 신뢰도를 높인 뒤 결정적인 순간에 판을 뒤엎곤 했던 것이다. H가 범행을 자백한 뒤에도 일부 팬은 그녀에 대한 믿음을 버리지 않았다. “여신님이 개나리 드레스를 입고 나왔는데 비가 안 온 게 아니지 말입니다. 연두색 옷인데 당신들 TV가 HD가 아니라 잘못 본 거지 말입니다.”

개인들도 스마트폰 어플을 이용해 실시간으로 도박 게임을 만들 수 있게 되었다. 최근 인기 있는 것이 ‘퇴근길 교통 상황 로또’다. 예를 들어 교통 체증이 심한 금요일 저녁, 서울 역삼동에서 퇴근해 삼청동 카페로 가는 자동차를 게임 모드로 지정한다. 그리고 과연 이 차가 얼마 만에 목적지까지 도달할지를 베팅하는 것이다. 도박에 참여한 유저들도 자신의 차를 몰고 나가 교통량에 영향을 끼치는데, 이는 게임의 한 부분으로 인정된다. 더 많은 그룹을 모으면 이기기 쉽지만, 그만큼 배당금은 줄어들게 된다.

사회책임 로또 ‘그린 베팅’ 등장

로또산업이 새로운 단계로 진화하게 된 것은 여러 사회현상까지 도박 게임의 테마로 끌어들이면서부터다. ‘이번 선거에서 각 당의 국회의원 당선 수는?’ ‘다음해의 신생아 탄생 수는?’ ‘애플의 새 스마트폰 출시일은?’ 도박의 판이 커지려면 더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고 베팅을 해야 한다. 당연히 사회적 쟁점이 되는 사안은 당첨 배당금이 폭발적으로 늘어나게 된다. 최근 가장 큰 배당금이 걸린 종목은 ‘복권 자율화법 폐지를 위한 촛불집회 인원은 몇 명일까?’였다. 이 분야는 항상 경찰과 주최 쪽 집계가 달라, 양쪽을 별도의 게임으로 진행했다.

이번주 서울 광화문 집회에서는 경찰 집계 3만 명, 주최 쪽 집계 5만 명이 모여 도박 중독의 폐해를 고발했다. ‘로또반대연대’의 정구집 교수는 말한다. “생활 곳곳에 도박이 침투해 건강한 노동의 의미가 상실되었어요. 대학생들이 학자금 융자로 받은 돈을 학점 맞히기 도박으로 날리는 일이 허다합니다.” 여기에 대해 복권사업부 관계자는 말한다. “대학도 어차피 도박 아닙니까? 4년 이상의 시간과 몇천만원 이상의 돈을 들여도 취직이 될까 말까… 그럴 바에야 화끈하게 한 방에 승부 보는 게 편하죠.”

이런 가운데 ‘그린 베팅’이 등장했다. 기왕 도박을 할 거면 자신이 지지하는 사회적 방향에 베팅하자는 운동이다. 주식 투자에서 사회책임투자를 주장하는 견해와 비슷하다. 이들은 ‘삼성에는 절대 노조가 안 생긴다’처럼 사회적으로 비난받아야 할 결과는 철저히 배제하고 베팅한다. 대신 ‘저탄소 게임’에 과감히 투자한다. ‘2020년까지 온실가스 배출량 30% 감축’ 등의 긍정적 사안에 돈을 거는 것이다. 자연스럽게 ‘베팅 행동주의’가 등장한다. 자신이 지지하는 정책에 돈을 걸 뿐만 아니라, 그 게임에서 이기려고 실제 행동에 나서는 것이다. 마치 특정 영화의 제작에 소액 투자한 뒤 그 영화의 성공을 위해 발로 뛰는 홍보요원이 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주말이면 ‘불공정 자유무역협정(FTA) 반대 시위’에 나가던 회사원 장구철씨는 부인에게서 “만날 데모만 하면 돈이 생기나 밥이 생기나?” 타박을 받던 신세였다. 그러나 FTA 국회 동의 저지로 받은 배당금으로 부인에게 한우를 사준 뒤에는 어깨를 펴고 산다고 한다.

정치인의 실언은 판돈 때문?

많든 적든 승부에 돈이 오고 가면 조작 시비가 발생한다. 지난달까지 여당 대표를 지냈던 안수상 의원이 최근 큰 곤혹을 치르고 있다. 현재 거의 모든 당들이 공식적으로 ‘당 지지율 토토 복권’에 거액을 베팅하고 있다. 원래 취지는 이런 것이었다. 각 정당에서 목표 지지율을 정해놓고 거기에 베팅하면 그 돈을 챙기기 위해서라도 성심성의껏 정치를 하지 않겠는가 하는 것이다. 여당은 여기에 최대 액수를 베팅해두고 있다. 그런데 안수상 전 대표는 틈만 나면 온갖 실언을 내뱉어 당 지지율을 떨어뜨렸다. “을 보면 알겠지만, 아버지를 위해 몸 팔러 가는 건 우리 딸들의 훌륭한 전통”이라든지, “자연 그대로 좋은 건 생선회와 여자 가슴밖에 없다”든지… 그의 실언록이 책으로 묶여 나올 정도였다. 그런데 최근 그의 전 보좌관을 통해 충격적인 소식이 들려왔다. 안 전 대표가 차명을 이용해 ‘여당 지지율 20% 이하’에 거액을 베팅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혐의는 곧 사그라졌다. 그렇게 따지면 대통령이야말로 지지율 까먹기에 전 재산을 베팅한 게 틀림없었기 때문이다.

이명석 저술업자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