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를 만나러 가는 길은 멀었다. 서울에서 1시간40분 남짓. 임박한 마감이 물리적 거리보다 심리적 거리를 더 멀게 느껴지게 한 탓일까. 그가 사는 충남 연기군 전의면 달전리로 가는 걸음은 쟀다. 하지만 잰걸음도 봄날의 만끽을 막지는 못했다. 서울을 벗어나자 봄은 더욱 완연했다. 도시의 분주함과 바쁜 일상은 계절의 변화마저 무뎌지게 했나 보다. 고속도로 옆으로 꽃이 지천이었다. 라디오에선 좋아하는 가수의 노래가 나오고 봄소풍이 따로 없었다. 차는 이윽고 남천안을 거쳐 연기군으로 향했다. 어느덧 굽이굽이 고갯길을 돌아 해발 250m에 자리한 그의 집이 보였다. 그가 직접 설계했다는 황토집이.
출판사 편집장에서 농부로
올해로 귀농 15년차 농부인 김맹수(54)씨. 그는 한때 잘나가는 출판사 편집장이었다. 책을 만들어 밥을 벌어, 인테리어 디자이너였던 살뜰한 아내와 자식을 건사했다. 경기도 산본에 숲으로 둘러싸인 아파트도 마련하고, 한숨 돌릴 여유도 생긴 호젓한 삶이었다. 하지만 바람은 늘 느닷없었다. 한 때 같이 일하다 녹색평론사로 자리를 옮긴 후배가 직장을 그만두고 돌연 충남 홍성으로 귀농을 한 것이다. 역시 의 열혈팬으로 당시 생태주의에 빠져들고 있던 그는 갑자기 조급한 마음이 들었다. 보람과 재미를 느꼈던 출판사 일도 시나브로 시들해졌다. “그때 전 ‘내가 원하는 삶을 살자, 도시를 떠나면 죽는다고 여기는 나 자신과 결별하자, 다른 삶도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자’라고 생각했어요.” 그러나 아내를 설득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전남 장성이 고향인 그와 달리 도시에서 나고 자란 아내는 도시가 주는 편리와 세련됨이 좋았다. 마침 자리를 잡기 시작한 자신의 일과 아이의 교육문제도 아내의 선택을 주저하게 했다. 설득은 집요했다. 시골에 가서도 일은 얼마든지 할 수 있다, 아이들 교육은 시골학교가 더 좋을 수 있다, 흙과 더불어 살면 몸과 마음도 평화로울 것이라는 등의 설교 아닌 설교가 이어졌다. 평소 환경문제에 어느 정도 관심을 가졌던데다 남편의 왕고집과 자의식을 익히 알았던 아내는 결국 승낙을 하기에 이른다. 귀농 바람이 분 지 1년 만의 일이었다.
몇 달에 걸쳐 귀농할 곳을 찾다 1996년 봄 이곳 충남 연기군 전의면 달전리로 이사왔다. 그의 나이 서른아홉의 일이었다. 달전리는 서울과 그리 멀지 않으면서, 기차와 고속도로 이용이 편하다는 장점과 더불어 매물로 나온 땅이 산 중턱이라 자연 속으로 들어가고 싶었던 마음에 딱 맞춤이었다. 한편 들떠 있던 남편에 비해 아내는 걱정이 앞섰다. 있는 건 산 중턱의 맹지(길이 안 난 땅)밖에 없었던 까닭이다. 집이며, 길이며, 물이며 사람이 살려면 마련해야 할 것이 한둘이 아니었다. “그때부터 아내는 저를 보고 똘아이라고 생각했는지 몰라요. 그냥 편하게 살 수도 있는데 왜 사서 생고생을 하느냐는 거죠. 허허.” 전통적인 방식으로 흙집을 짓던 신부님을 찾아 설계에 도움을 받고, 집을 짓는 두 달여 동안 아내와 초등학생 큰아들, 이사오면서 낳은 둘째아들은 동네 어귀의 마을회관에서 기거했다. 처가 식구들과 동네 할머니들이 번갈아 갓난쟁이를 돌봤다.
회관에 놀러온 할머니들은 아내를 붙잡고 조심스레 물었다. “젊은 사람이 왜 이런 시골까지 온겨~. 남편이 사업하다 망한겨? 다시 성공혀서 서울 가면 되니께 너무 상심 말어~.” 아내는 그냥 웃었다고 했다. 사실 사십 줄을 바라보던 그도 마을에선 가장 젊은 청년이었다. 반백의 마을 어르신들이 그를 두고 농 삼아 ‘애기’라고 불렀을 정도다. 애기는 환갑 넘은 어르신들을 동네 ‘형님’이라 불렀다. 70~80대 ‘진짜 어르신들’은 따로 있었으므로 형님을 어르신이라 부르면 지청구를 들어야 했다.
생각한 대로 살다
젊은이가, 아니 사람이 드물어 적막하던 동네가 집 짓는 공사로 떠들썩하자 마을 ‘형님들’이 구경 삼아 올라와 한 소리씩 거들곤 했다. “집은 그렇게 짓는 게 아니여~. 어허, 그래 가지곤 안 된다니껭~.” 형님들이 그럴 만도 했다. 실제 그의 집은 부채꼴 모양에 황토흙으로 이뤄진 벽과 대나무로 마감된 흙천장이니 말이다. 앞쪽은 넓고 높은 반면, 뒤쪽으로 갈수록 낮고 좁은 구조는 산속에 위치한 터에 자연 채광으로 열에너지 효율을 높이려는 고민의 결과였다. 또한 자연친화적인 황토집의 또 다른 문제는 지붕과 천장이었다. 지붕이야 전통적 방식으로 새끼를 꼬아 초가지붕을 올릴 수 없어 결국 코팅된 합판으로 타협을 봤지만, 흙칠을 한 천장이 골칫거리였다. 결국 서까래와 흙천장 사이에 대나무를 끼워넣는 것으로 도배를 대신했다. 지금도 며칠 집을 비우면 거실 바닥이 푸석하단다. 그는 그래도 장점이 많은 집이라며 흐뭇해한다. 그의 말처럼 신기하게도 그의 흙집은 숨을 쉬고 있는 듯했다. 별다른 환기 없이도 끽연가인 그의 집에서 담배 냄새가 나지 않는다는 것과 전날의 과음에도 몸과 머리가 개운했다는 점은 흙이 살아 있다는 그의 말에 고개를 주억거린 이유였다.
그렇게 어렵게 세상에 하나뿐인 집을 짓고, 작물을 캐기 전에 돌부터 캐야 했던 밭을 가꾸면서도 그는 그 시절이 행복했다고 회상했다. 들과 산으로 뛰어노는 아이들을 보는 게 좋았고, 그를 보러 주말마다 내려온 지인들을 기껍게 맞아주는 아내가 살가웠다. 동네 형님들과 밭일하다 먹는 참도 달았고, 친구들과 기울인 주말의 술 한잔도 흐뭇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를 복되게 한 것은 자신이 믿는 바를 그대로 실천하며 산다는 자부였다. “생각한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는 스콧 니어링의 말처럼 그는 생각한 대로 살고자 했다. 차마 버릴 수 없던 녹색의 꿈처럼 살고 싶었다.
리영희 선생은 몸담았던 신문사에서 해직된 뒤 출판사 외판원으로 잠시 일하다 때려치운 일을 회상하며 “인텔리는 결국 인텔리일 수밖에 없다”고 아프게 자인했다. 한때 인텔리였다 이제는 외견상 천생 농부로 보이는 그에게 이 말에 동의하느냐고 물었다. “그때 전 인텔리라는 자의식보다 생태주의자라는 자의식이 더 강했던 것 같아요. 사실 그것도 대단한 것이라기보단 그냥 게으르게 살고 싶었어요. 남과 경쟁하지 않고. 그리고 여기서 농사짓는 형님들보다 제가 농사짓는 양이 많지도 않았어요. 전 벌기 위해 짓지 않고 그냥 살기 위해서 지었으니까. 그냥 반쯤 놀면서 농사지었다고 보면 돼요.”
이 대목에서 그는 할 말이 많은 듯했다. “자본주의는 게으를 권리를 박탈한 사회예요. 마르크스의 사위인 폴 라파르그가 를 쓴 게 19세기 말이에요. 그때에 비해 인간은 더 바빠졌죠. 스마트폰이 쉴 권리마저 박탈하고 있잖아요. 사실 전우익 선생이 말했듯 인간이 자꾸 뭘 하려고, 뭘 되려고 하니까 문제인 거예요. 그러니까 역사책도 두꺼워지고, 공부할 것도 많아지고. (웃음) 그냥 무위자연 하면 되는데 말이죠.”
게으름에 대한 옹호
견결한 근본주의자로 보이는 그도 한때는 심약한 문청이었다. 젊은 날 신춘문예에 응모했으나 번번이 기회가 닿지 않아 술도 많이 마셨다. 박정희가 죽고 꼬마 박정희인 전두환이 정권을 찬탈하던 시절에 다닌 대학에서 행정학을 배웠지만 전공은 늘 뒷전이었다. 운동권 언저리를 맴돌았으나 정서적인 인간이었던 그는 투철한 이념형 인간은 되지 못했다. 늘 헛헛했다. 그러다가 도올 김용옥을 만났다. 한학에 조예가 깊은 부친 때문에 어릴 적부터 한문을 가까이한 그에게 도올의 혁신적이고 파격적인 동양철학은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그의 강의를 꼬박꼬박 챙겨 들으며, 그에게 기대 세상을 바라봤다. 그러다가 전통문화가 눈에 들었고, 수탈적이고 폭력적인 근대의 대안으로 생태주의를 만났다.
생태주의가 미시적 대안은 될 수 있지만, 거시적 사회 운영 원리가 되기는 어렵지 않겠느냐고 딴죽을 걸었다. “생태주의 국가가 출현하기는 어렵겠죠. 전 다만 낭떠러지로 가는 열차에서 내리고 싶었을 뿐이에요. 열차에서 내리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달리는 기차도 속도를 줄이든가 가는 방향을 점검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는 거죠. 사실 생태주의자들이 없었다면 지구의 환경 파괴는 더 급속도로 진행되었을 거예요. 그렇게 본다면 생태주의가 자본주의를 살린 게 되나. 좌파들이 들으면 싫어하겠네.(웃음)”
현 정부도 녹색성장을 얘기하지 않느냐고 웃으며 짓궂게 물었다. “제정신 있는 인간치고 이대로 가단 지구가 결딴난다는 데 동의하지 않는 사람은 드물어요. 심지어 가장 반생태주의적인 MB 정부마저도 ‘녹색’이라고 자신을 포장하는 것을 보면 생태 또는 환경 문제는 신자유주의자나 토건주의자들에게도 피할 수 없는 화두가 된 셈이죠. 물론 레토릭에 불과하다는 것이 문제지만. 그런 점에서 제정신이 없다고 볼 수도 있겠네요. (웃음)”
방사능비가 내린다는 뉴스를 들으며 공상과학(SF) 영화의 음울한 ‘세기말’ 풍경이 떠올랐다. 그렇게 인류의 세기가 저물고 있는지 모를 일이다. 자연스레 화제는 일본 원전으로 옮겨왔다. 그는 “일본 원전은 우리에게 더 많이 쓰고 더 편리하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이 어떤 결과를 부르는지 섬뜩하게 보여준다”며 “결국 인간은 자연의 재앙일 뿐”이라고 씁쓸해했다. 믿을 것은 아이들밖에 없다고 그는 말했다. 그런 문제의식을 담아 2005년에 (해와나무 펴냄) 세권을 펴내기도 했다.
무겁고 답답한 얘기 대신 가족에 대해 물었다. 큰아들은 얼마 전 군에 갔고, 교육문제로 막내는 아내와 함께 경기도 수원에서 살고 있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몇 해 전 논농사 대신 나무농사로 갈아탄 그는 환경 관련 책을 쓰며 홀로 지내고 있다. 적적하지 않느냐 물었다. 그는 “가끔 마을 노인네들을 모시고 읍내로 나가 자장면과 탕수육을 대접하는데 그때마다 노인네들이 그렇게 좋아라 하신다”며 “사람이, 자식이 그리워서 그런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고는 그 마음이 이제 이해가 간다는 말로 50대의 고적함을 슬쩍 내비쳤다.
봄날은 간다
그래서였을까. 그가 마련한 푸진 술상을 같이 들며 시작한 인터뷰는 밤늦도록 이어졌다. CD플레이에선 최백호 버전의 가 흘러나왔다. 그가 낮게 따라 불렀다. “예전엔 몰랐는데 이 노래에 우리네 삶이 닮겨 있더라고요.” 그가 쓸쓸하게 웃었다. 그에게 인생의 봄날이 다시 허락될까. 잘 모르겠다. 다만 봄날이 가더라도 그 뒤에는 신록이 기다리고 있다고 (그도 알고 있을 얘기를) 멋쩍게 전하고 싶었을 뿐.
연기=글 오승훈 기자 vino@hani.co.kr
사진 정용일 기자 yongi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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