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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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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실의 만화가가 들여다본 세상

고양이와 개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워킹푸어 문제를 다룬 만화가 윤필씨… “이것은 우리 모두의 이야기”
등록 2011-12-15 11:05 수정 2020-05-02 19:26
윤필씨가 작업대에서 스케치를 하고 있다. 이야기가 잘 안풀릴 때는 빈 종이에 흰둥이 얼굴만 하염없이 그리기도 한단다. 팬이 전해준 쪽지를 스캔해 컴퓨터 모니터의 바탕화면에 깔았다.

윤필씨가 작업대에서 스케치를 하고 있다. 이야기가 잘 안풀릴 때는 빈 종이에 흰둥이 얼굴만 하염없이 그리기도 한단다. 팬이 전해준 쪽지를 스캔해 컴퓨터 모니터의 바탕화면에 깔았다.

주인이 빚을 졌다. 주인은 어느 깜깜한 밤, 집을 버리고 떠났다. 반려묘와 반려견이던 야옹이와 흰둥이도 버리고 떠났다. 빈집에 덩그러니 남아 있으니 빚쟁이들이 몰려왔다. 검은 수염을 기른 빚쟁이는 “너희가 주인 대신 채무이행을 하라”고 노발대발 소리쳤다. 그렇게 야옹이와 흰둥이는 주인 대신 빚을 갚으려고 생활전선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고양이와 개라는 이유로 구직은 힘들다. 최저 시급이 4320원이라지만 그보다 더 적게 받을 때도 있다. 신입 수습 기간 등의 이유로 시급은 절반으로 동강 나기도 한다. 게다가 흰둥이는 지금의 주인을 만나기 전 함께 살았던 가족이 짖지 말라고 성대 수술을 해놓은 탓에 말을 할 수도 없다. 그 이유로 번번이 면접에서 퇴짜 맞고, 말을 하지 않아도 되는 공사판 일용직이나 배달일을 전전한다. 이들은 지금은 비정규직이고 일용직이지만 열심히 일하다 보면 급여도 오르고 정규직 전환도 될 것이란 믿음을 품고 일한다. 그 믿음을 가지고 열심히 빚을 갚다 보면 언젠가 집 나간 주인도 돌아오리라는 희망이 그들을 버티게 하는 유일한 힘이다.

“만화에 진 빚이 있어요”

그 뒤로 야옹이와 흰둥이는 어떻게 됐을까. 이들은 일하고, 일하고, 또 일했지만 생의 고단함과 빚이 줄어드는 속도는 정비례하지 않았다. 정규직으로 전환될 리는 만무했고, 하루아침에 일자리가 없어지지나 않으면 다행이었다. 야옹이와 흰둥이가 이어가는 일상은 우리 주변 보통 사람들의 삶을 대변하고 있었다. 흰 배경 안에서 연필로 그린 투박한 선이 이어져 살아 움직이는 야옹이와 흰둥이에게 숨결을 불어넣어준 사람이 궁금했다. 무엇이 그로 하여금 보통 사람들의 고된 삶을 이토록 촘촘하게 들여다보게 했을까.

지난 12월7일, 부천만화창작스튜디오 내에 위치한 한 작업실을 찾았다. 의인화한 고양이와 개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워킹푸어 문제를 다룬 만화 (다음 웹툰 연재, 길찾기 펴냄)를 그린 만화가 윤필(31)씨를 그곳에서 만났다. 만화가를 떠올릴 때 흔히 상상하는 클리셰가 있다면, 그는 무언가 그 조건을 만족시키는 이였다. 멋부렸다기보다는 작업에 쫓기다 다듬지 못한 듯한 수염, 모자 모양대로 눌린 머리, 느리고 조근조근한 말투. 무엇보다 늘상 작업실에서 붙박이로 지낸다는 일상은 편견 혹은 상투적 상상에 화룡점정을 찍었다. 그는 아주 오랫동안 만화에 물들어왔다. 그렇다고 현실감 없이 만화의 세계에만 빠져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매일 작업실에서 기거하면서도 누구보다 넓고 크게 세상을 보고 있었다. 그 시선이 담긴 결과물이 를 비롯한 그의 만화들이다.

만화를 그리기까지 길은 멀었다. 어린 시절 그는 곧잘 그림을 그렸다. 만화에 빠지기 시작한 것은 지금은 폐간된 만화잡지 을 보면서부터다. 어릴 때 우스꽝스러운 모양으로 이를 다쳐 친구들에게 놀림을 많이 받았는데, 그림을 그려주면 아이들이 좋아하며 주변에 몰려들곤 했다. 초등학교 때까지는 나중에 대학을 간다면 당연히 미술을 전공하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6학년 때 한 시력 검사에서 약시가 있다는 말을 듣고 포기했다. 미세하게 색 구분을 못해 입시나 전공에서 절대 불리하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꾸준히 끄적거리며 만화를 향한 끈을 놓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본격적으로 만화가가 되겠다고 뛰어들지는 못했다. 그렇게 중·고등학교를 거치고 점수에 맞춰 행정학과에 입학했다.

그는 만화에 대한 부채의식이 있다고 말했다. “어릴 때 만화를 통해 친구들과 친해진 경험도 그렇고, 만화를 처음 봤을 때 이렇게 재미있는 게 있다는 데 놀란 것도 그렇고, 제가 만화로 위안을 많이 받았어요. 다른 사람도 그러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군 제대를 하고 로 유명한 만화가 이두호 선생을 찾아갔다. “TV에 나온 모습을 보고 좋은 분인 듯해 무작정 찾아갔어요. 이분이면 왠지 거절하지 않고 내 말을 들어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두호 선생은 그에게 학원 등을 등록해서라도 동료들을 많이 만나라고, 만화란 혼자 하는 작업이지만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과 교류하며 성장하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현실의 벽에 부딪쳐 쉬이 실천에 옮기진 못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출판사에 취직해 일을 하다 스물일곱, 자신의 20대에 마지막으로 주는 선물이라 생각하며 한겨레문화센터 출판만화과정에 등록했다. “그러고 보니 와는 인연이 많네요. 만화를 처음으로 제대로 배운 곳도 한겨레문화센터였고, 를 그리게 된 것도 정기구독하던 에서 ‘노동 OTL’을 보며 소재를 얻은 것이었고, 이렇게 인터뷰도 하니 말이죠.(웃음)”

만화 <야옹이와 흰둥이> 중 한 장면.

만화 <야옹이와 흰둥이> 중 한 장면.

‘노동 OTL’에서 영감을 얻어

출판만화과정 수업을 들으며 그는 만화에 입문했다. 강사로 있던 이경석 작가에게 종종 콘티를 보여주었는데, 이 작가의 이사를 도와주러 갔다가 데뷔 전까지 그의 작업을 거들기로 했다. 그러다 한국만화영상진흥원에 같이 입주해 계속 작업에 손을 보탰고, ‘이제 내 만화도 그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맡은 일을 하며 틈틈이 그리려 하니 최대한 시간을 아껴야 했다. 시간을 들여 고민할 틈 없이 평소 구독하던 에 실린 사람들 이야기를 소재로 삼았다. 색을 입히지 않고, 종이에 연필로 그림을 그렸다. 평소 동물을 좋아해 고양이를 주인공으로 내세웠다. 당시 고양이 만화가 인기가 많았던 영향도 있었다. “고양이 습성만 묘사해도 훌륭한 작품이 되는데, (본격 동물만화도 아니고) 왠지 야옹이만 있으면 심심할 것 같았어요. 흰둥이도 친구로 보태줬죠. 평소에 그림책 보는 것을 좋아하는데, 그림책 주인공 중에 동물들이 많더라고요. 동물이 주인공이면 감정이입도 잘되고 해서….” 그렇게 야옹이와 흰둥이가 탄생했다. 웹사이트 디시인사이드 만화 갤러리와 루리웹 만화게시판에 올리면 만화 좋아하는 사람들이 보고 댓글을 달기도 하고, 피드백이 있을 것이란 말에 그대로 실천해봤다. 반응이 기대 이상으로 폭발적이었다. 포털 사이트 다음에서 웹툰 연재 제안을 해왔다. 먼저는 흰둥이 캐릭터만 내세워 지난해 11월 로 처음 정식 고료를 받고 만화를 세상에 내보이게 되었다. 올 2월에는 야옹이가 합세한 연재를 시작해 7월에 마쳤다. 꾸준한 인기는 출판으로도 이어졌다. 영상으로 만들어보자는 의뢰도 들어왔다.

야옹이와 흰둥이는 대형마트, 피자가게, 공사판, 레스토랑 등을 전전하며 우리 시대 매일같이 감정노동에 시달리는 이들과 워킹푸어를 대변한다. 독자 반응을 묻자 “취업 준비하는데 공감 된다, 힘이 많이 된다는 얘기가 가장 많이 와요. 꾸준히 그런 반응을 보내주시는 걸 보며 앞으로 더 진정성을 가지고, 책임감을 품고 일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라고 말한다. 특별히 기억에 남는 반응이 있었느냐고 물었다. “개인적인 사연들을 의외로 많이 보내주세요. 이 자리에서 밝히기는 곤란할 정도로. 이런 반응들도 인상 깊었어요. 야옹이와 흰둥이 얘기를 읽고 세상에 처음 보는 이야기다, 이런 삶도 있느냐는 이도 의외로 많아요. 특히 어린 학생들 중에. 처음엔 이토록 평범한 이야기를 모른다는 사실에 좀 놀랐어요. 그런데 생각해보니 매일 차 타고 학교와 학원을 오갔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일상을 보낸다면 모를 수도 있겠다 싶더라고요. 환경에 의해 자의든 타의든 이해를 못할 수도 있는 거죠. 그런 이들에게 어떤 영향을 줬다는 게 뿌듯해요. 적어도 이 아이들이 좋은 어른이 되는 데 내가 작은 영향을 줬구나 생각하면 기분이 좋아져요.”

그는 앞으로도 사람들이 살아가는 이야기에 촉각을 세우고 이를 만화로 전할 것 같다. 그는 자신이 특별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고 강조했다. 야옹이와 흰둥이에서 비정규직, 감정노동, 워킹푸어 등의 문제를 다룬 것은 많은 사람들이 일을 하니까, 당연히 관심을 가져야 하는 부분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제도나 이런 건 어려워서 잘 몰라요. 무언가를 비판하는 것도 아니에요. 그저 우리가 살아가는 얘기들이니까 만화에 담는 거죠. 정답은 없다고 생각해요. 사람마다 처한 환경에 따라 제가 전하는 요지가 맞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으니까. 대신 제 만화가 적어도, 생각할 거리를 전달하는 통로가 되면 좋겠어요.”

윤필씨가 작업실을 같이 쓰는 만화가 ‘HUN’씨의 고양이를 무릎에 앉히고 이야기를 하고 있다.

윤필씨가 작업실을 같이 쓰는 만화가 ‘HUN’씨의 고양이를 무릎에 앉히고 이야기를 하고 있다.

평범한 소재에 특별한 이야기를 담자

처음에는 3쪽 분량의 ‘만인보’ 지면이 부담스럽다며 인터뷰를 저어하던 그였지만 자신의 만화철학을 차분하게 이어가는 그는 천생 만화가였다. 아직까지 작품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은 경우도 거의 없단다. 학창 시절 일본에서 건너온 해적판 만화를 많이 본 탓인지 일본 번역체의 영향을 받은 비문을 대사에 자주 써서 스스로 거슬리는 경우를 빼고는 만화 때문에 피로한 적은 없다. 마감을 어긴 적도 없다.

그는 다음 작품으로 여러 가지를 준비하고 있다. 특별한 소재를 찾기보다는 평범한 이야깃거리 안에서 사람 이야기를 어떻게 잘 풀어나가느냐에 초점을 맞춰 작품을 구상한다. 당장에는 가 계획돼 있다. 미래에는 여자도 군대에 간다는 설정으로, 여군 중 한 명이 군대에서 낙오해 다시 복귀하는 과정을 그린다. 여자배구팀을 다룬 스포츠 만화도 꼭 그려보고 싶은 작품 중 하나다. 초등학교 때 아버지를 따라 배구 시합을 보러 다녔는데, 여자배구단인 ‘한일합섬’을 응원했다. 그 기억이 좋았단다. 선거철을 앞두고 구상하는 만화도 있다. “요즘은 개나 소나 다 입후보하니, 고양이가 입후보해서 얼떨결에 출마해 고양시장이 되는 만화를 그려볼까 해요.”

글 신소윤 기자 yoon@hani.co.kr
사진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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