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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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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운 시대, 뜨신 국밥 한 그릇의 위안

질박한 전통의 맛으로 전주를 울린 국밥쟁이 성재수·장은주 부부…

적게 만들고 적게 팔아 오래된 맛 지키려는 그들의 촌스러운 꿈
등록 2011-01-27 13:55 수정 2020-05-03 04:26
<font color="#008ABD">장삼이사들의 사연 많은 삶의 이야기를 전할 ‘2011 만인보’를 연재한다. 근사하고 잘난 사람 아니면 뉴스에 얼굴도 내밀기 어려운 시대, ‘만인보’는 순정하고 착한 우리네 이웃들을 불러내 그들의 곡절 많은 생으로 우리 시대 이름 없는 모든 사람들의 생애사를 구성해보고자 한다. ‘손바닥 문학상’ 당선자들이 필진으로 참여한다. _편집자</font>

맛의 고향 전라북도 전주, 그 시내 한복판에 자리한 작은 콩나물국밥집. 점심을 준비하는 사장 성재수(67)씨와 부인 장은주(55)씨의 손길이 분주하다. 열 평 남짓한 공간에 테이블이 예닐곱 개뿐인 초라한 규모지만, 이곳은 15년 전 자리잡은 이래 입소문을 타 ‘아는 사람은 다 아는’ 맛집이다. 점심때는 언제나 자리가 부족할 정도지만, 고마운 손님들은 불만이 없다. 그들을 위해 준비하는 식사였다. 부부의 손에 자연스레 정성이 깃든다. 그렇게 묵묵히 일을 하던 성씨가 문득 아내를 툭툭 건드린다. 창밖을 내다본 아내의 얼굴이 흰빛으로 물들었다. “눈님이 오시네.” 부부의 눈이 마주친다. 눈이 내리고 비가 내리고 날씨가 궂을수록 손님은 적지만, 그만큼 오시는 손님이 귀하고 감사해진다. “꼭 고맙다고 해. 고마운 분들이야.” 둘은 그렇게 하루를 시작하고 손님을 맞으며 오랜 단골들과 가족의 안부를 묻는다. 그들에게 이곳은 단순한 일터가 아니라 하루의 즐거운 생활을 담는 사랑방과 같은 곳이다.

성씨는 어린 시절을 풍남문(옛날 전주의 남문)을 중심으로 자리한 남부시장에서 보냈다. 1950년대 말 외식문화가 형성되지 않던 때지만, 식료품점을 운영하는 부모님이 바쁜 탓에 처음으로 외식을 해본 것도 그곳이었다. 가게 옆에 붙어 있던 초라한 식당. 그 식당 이모님은 텀벙텀벙 무심한 손길로 국밥을 말아주었다. 그러나 그 맛은 그에게 평생 지워지지 않을 것이었다. 그야말로 소름이 오스스 돋아나고 콧잔등에 땀이 송글송글 맺히는, 도무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환상적인 맛이었다. 그것이 바로 ‘전주 콩나물국밥’이었다.

소름 돋는 전주 콩나물국밥의 ‘첫맛’
» 성재수 사장은 ‘아무런 반찬이 없어도’ 국밥만으로 완성되는 맛을 찾으려 노력한다. 지난 1월18일 오전 성재수씨와 부인 장은주씨가 콩나물국밥을 내놓고 있다. 한겨레 윤운식 기자

» 성재수 사장은 ‘아무런 반찬이 없어도’ 국밥만으로 완성되는 맛을 찾으려 노력한다. 지난 1월18일 오전 성재수씨와 부인 장은주씨가 콩나물국밥을 내놓고 있다. 한겨레 윤운식 기자

1960년대 들어 새마을운동이 본격화되자 남부시장에도 현대화 바람이 불어왔다. 양철지붕과 판자로 잇대어 만든 상점들을 철거하고 재건축을 하기로 한 것이다. 어르신들이 운영하던 수많은 전통 맛집들이 사라지거나 흩어지고, 혹은 타인의 손에 넘어갔다.

여전히 콩나물국밥의 ‘첫맛’을 잊지 않고 있던 성씨는 그것이 안타까웠다. 기적처럼 펼쳐지던 다채로운 맛의 조화를 다시 만날 수 있길 간절히 바랐다. 그러나 그 욕구를 완벽히 충족시킨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국밥을 끓여주던 이모님은 멀리 떠났고, 요리사가 다른 음식은 어딘가 다를 수밖에 없는 법이니 말이다. 더구나 전주에서는 언젠가부터 ‘끓이는 국밥’이 대세를 이루고 있었다. 주방과 홀이 분리되지 않은 구식의 식당 구조 아래, 한 그릇의 국밥을 먹을 때마다 각인되었던(그가 기억하는) 조리법은 밥을 직접 끓이지 않고, 끓는 육수에 밥을 토렴해 양념과 함께 내는 것이다. 그러나 그 조리법을 고수하는 곳은 많지 않았고, 고수한다 해도 그가 기억하는 이모님의 국밥은 아니었다. 그 ‘맛’에 대한 집착은 그로 하여금 수많은 맛집을 찾아다니게 했다. 다르다 싶은 것에 대해서는 충언을 했고, 간절히 부탁도 해보았다. 방송사, 요리연구가, 관공서, 식당 주인…. 귀기울이는 이도 있었으나, 대부분은 고개를 흔들었다. “전통의 맛만 맛은 아니다.” “현대에 맞게 발전시켜가는 맛도 맛이다.” 그들의 말도 틀린 것은 아니었다. 그가 기억하는 맛만이 진짜라는 법은 없었다. 성씨는 점차 말을 아끼게 되었다. 그래도 가끔은 참을 수 없을 때가 있었다. 이대로- 이 순간에도- ‘점점 더 사라져버리는 전통의 것’에 대한 아쉬움이었다.

쉰이 갓 넘어 건강상의 이유로 현업에서 은퇴하게 된 그에게, 아내 장씨가 “우리가 그 맛을 찾아보자”고 권했다. “당신이 하는 대로 열심히 내가 도울게요.” 눈매가 고운 아내는 성씨의 손을 잡았다. 성씨는 용기를 내어 자그마한 가게를 얻고 콩나물국밥집을 냈다. 어린 시절 보았던 이모님의 방법 그대로, 손길 그대로, 국물을 담백히 우려내고 갖가지 양념을 모두 따로 만들어 마지막 순간에 배합했다. 그것은 ‘국밥의 생명은 담백한 육수와 양념 맛’이라는 그의 신념에 따른 조리법이었다. 

가장 가까이 놓는 반찬이 젓갈이냐 깍두기냐

처음, 사람들은 그러한 방식의 국밥을 이해하지 못했다. 때로 성씨에게 따져물으며 국밥에 이것을 넣어라 저것을 넣어라 하는 손님들이 있었다. 그는 그들에게 국밥의 유래부터 차근차근 설명하며 일단 먹어보라고 설득했다. 불만스러운 얼굴로 국밥을 먹었지만, 먹고 나면 표정이 달라졌다. 단순한 ‘감칠맛’이 아닌 ‘깊은 맛’에 의한 감동이다. 차차 입소문이 났고, 어르신들부터 찾아오기 시작했다. “바로 이 맛이 전통의 맛이다”라며 좋아하는 그들의 얼굴에서 부부는 희열을 느꼈다. 현대의 맛도 그르지 않으나, 전통의 맛은 순수하게 지켜야 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는 것이다.

그래도 성씨가 갈 길은 멀었다. “맛있다”는 것으로 족할 수 없는 그의 욕심이었다. 수대가 지나도 변치 않을 전통의 맛을 찾고 싶었다. 시행착오와 반복되는 시험 끝에 국물과 각종 양념(그 양념의 가장 적절한 조리법을 포함)의 황금 배합률을 5년 만에 찾아냈다. 다른 사람들은 느끼지 못하는 미묘한 차이도 용납지 않은 고집으로 이룬 것이었다. 아내 장씨가 조금만 배합을 흐트려도 성씨는 “원조리의 맛을 잃지 마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 또한 아내가 손님의 싱겁고 짠 정도에 맞춘 배려에서 나온 것이었다. 하지만 성씨는 그것은 국밥을 낸 뒤에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둘은 그렇듯 무엇이 이 식당을 위해, 손님을 위해 옳은지에 대해 왕왕 옥신각신한다. 새우젓, 오징어젓갈, 깍두기 세 가지 반찬을 내려놓는 순서에서도 마찬가지다. 오른손잡이를 기준으로 가장 가까운 것이 젓갈이냐 깍두기냐를 두고 벌이는 논쟁이다. 그뿐 아니다. 물, 그릇, 재료 한 가지를 두고도 꼼꼼하게 따진다. 투가리(뚝배기)는 세제 찌꺼기를 깨끗이 벗겨내기 힘든 재질이므로 뜨거운 물에 푹푹 끓여 건져내고, 콩나물은 지인이 물로만 키운 것으로 매일 배달돼온다. 깍두기를 하나 담을 때도 가장 맛있는 무를 찾고 새우젓도 비싸더라도 더 맛있는 걸 골라 구입한다. 담백한 국물 맛을 위해 고급 멸치를 쓰는 것은 물론이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무엇보다 중시하는 것은 국밥이다. 반찬은 반찬일 뿐, 그것에 의한 맛은 집에서 먹는 밥과 다를 바 없다고 믿는 성씨다. “김치 맛으로 먹어서는 진짜 맛있는 국밥이 될 수 없다”는 옛 어른의 말씀을 되새겨 ‘아무런 반찬이 없어도’ 국밥만으로도 완성되는 맛을 찾으려 노력한다. 이제는 그런 남편 곁에서 장씨도 둘째가라면 서러운 ‘국밥쟁이’가 되었다. 그렇게 지나칠 정도의 고집과 장인정신이 있었기에 그들의 국밥이 ‘아는 사람은 다 아는 맛’으로 인정받게 된 것이다. 

방송출연은 사절합니다
» ‘국밥쟁이’ 부부의 콩나물국밥은 국물을 담백히 우려내고 갖가지 양념을 모두 따로 만들어 마지막 순간에 배합하는 레시피로 옛맛을 살려냈다. 한겨레 윤운식 기자

» ‘국밥쟁이’ 부부의 콩나물국밥은 국물을 담백히 우려내고 갖가지 양념을 모두 따로 만들어 마지막 순간에 배합하는 레시피로 옛맛을 살려냈다. 한겨레 윤운식 기자

손님이 많아지면서, 두 사람의 손만으로는 부족하게 되었다. 몇몇의 직원을 두었고, 확장 이전도 권유받는다. 그러나 문제는 ‘맛의 변질’이었다. 국물과 양념 만들기는 성씨가, 그들의 배합은 아내 장씨가 맡으며 철저히 분담되었던 일이, 바쁜 때면 직원들과 교차되며 조리가 들쭉날쭉해진 것이다. 성씨가 가장 우려하던 것이었다. 부부는 고민 끝에 직원을 내보냈고, 확장 이전도 거론하지 않기로 했다. ‘적게 만들고 적게 파는 것.’ 가격 변동이 없는 한 이익 창출에는 적혀 득이 되지 않는 원칙을 세운다. 그들에게 가장 두려운 것은, 그들의 손을 떠나 조금이라도 맛이 변질되고 전통이 왜곡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같은 이유로 방송출연도 연거푸 거절했다. 방송에 나가고 손님이 몰려들기라도 하면 둘이서 감당할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둘이서 감당할 수 없게 되고 가게가 확장되고 직원이 많아지고 지점을 개설하는 성공 신화는 둘의 꿈이 아니다. 둘의 꿈은 그저 맛을 보존하고 있는 그대로 계승하는 것. 어찌 보면 촌스러운 그 꿈을 둘은 나직한 목소리로 노래처럼 읊조린다. 그 자체가 또한 소박한 우리네 옛 어른들의 모습이고 전통의 멋이라 믿으며.

그런 그들에게 참으로 어울리는 취미가 있다. 한 가지는 빠지지 않고 매일 아침 ‘그날의 콩나물국밥 맛’을 보는 일이요, 또 한 가지는 매주 일요일 오후 가게 문을 닫고 떠나는 맛 기행이다. 아침마다 질리지도 않고 국밥을 먹는 것은 조금이라도 국물 맛이 변하지는 않았는지, 매일 가져오는 콩나물의 질감과 밥알의 가장 적정한 상태를 확인하려는 까닭이고, 맛 기행을 가는 이유는 어딘가에 숨어 있는 맛의 장인들을 만나는 일이 그들의 삶이며 기쁨이기 때문이다. 어느 산골에서든 골목길 어귀에서든 그러한 맛을 만나고 돌아오면 힘이 난다. 기운이 넘친다. 그렇게 한 가지 길만 바라보며 지나온 세월이었다.

그러는 사이 2남1녀의 자녀들은 성장해 저마다의 재능을 살려 제 길을 걷고, 부부는 초로의 나이가 되었다. 돌이켜보면, 다른 길을 빙빙 돌기도 하고 엉뚱한 곳에 서 있기도 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진정 원하는 일을 종국엔 찾았다는 점이다. 부부는 ‘행복’이라는 단어를 당당히 가슴에 새길 수 있다. 음식꾼이요 국밥쟁이로 산다는 것이, 누군가에게는 한 끼 식사가 되고 누군가에게는 50년 전의 추억이 되고 누군가에게는 한 번도 맛보지 못한 신세계가 될 수 있다는 것이, 그들에게는 긍지요 보람이다. 70℃의 적정한 온도, 아름다운 빛깔로 조화를 이룬 양념의 배합, 아삭거리면서도 본래의 향을 잃지 않은 콩나물, 담백하면서도 깊은 감동을 주는 국물. 이 한 그릇의 국밥을 만들 때마다 부부의 손이, 조리가 아닌 예술에 가까운 경외감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그것을 증명한다. 

정성을 먹는 애틋하고 반가운 손님들

손님이 들어온다. 더욱 거세지는 눈발을 뚫고 들어온 손님이 더없이 반갑고 애틋하다. 부부의 얼굴에 미소가 번진다. “어서 오세요. 오시는 길 추우셨지요.” “난로 곁으로 앉으세요.” 이어지는 부부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닮아 있다. “잘 지내시죠”라든가 “오랜만에 오셨네요”라든가. 언어가 중요하지는 않는다. 그 말 속에 오가는 그들의 마음이 아름답다. 손님이 국밥을 비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장씨가 그를 쫓아나가며 정답게 덧붙였다. “목도리 하고 다니세요. 날씨가 너무 추워요.” 손님이 싱긋 웃으며 손을 들었다. 다시 부부는 주방과 홀 사이의 의자에 앉아 손님을 기다린다. 그들에게 손님은 남이 아니다. 자신들이 정성들여 만든 음식을 함께 나누는 친구이며 어른이며 가족이다. 그래서 둘은 오늘도 웃는다.

글 김소윤 제2회 손바닥 문학상 당선자

사진 윤운식 기자 yw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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