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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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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 탓’하는 검찰 버릇 언제까지


금태섭 전 검사 기고·이용훈 대법원장 강연에 발끈했던 검사들…
그런 주장들 열매를 맺어가건만 검찰 수사와 태도는 그대로인 듯
등록 2010-03-31 07:00 수정 2020-05-02 19:26
2006년 9월 이용훈 대법원장(가운데)은 검찰 수사 기록에 의존하는 ‘조서 재판’을 비판하고 공판 중심주의를 강조해 검찰과 갈등을 빚었다. 당시 서울고법·서울중앙지법 청사를 순시 중인 이 대법원장. <한겨레21> 박승화 기자

2006년 9월 이용훈 대법원장(가운데)은 검찰 수사 기록에 의존하는 ‘조서 재판’을 비판하고 공판 중심주의를 강조해 검찰과 갈등을 빚었다. 당시 서울고법·서울중앙지법 청사를 순시 중인 이 대법원장. <한겨레21> 박승화 기자

“검찰에 불려가서는 아무것도 하지 마라.”

“검찰 수사 기록을 던져버려라.”

지금으로부터 3년6개월 전인 2006년 9월은 검찰로서는 ‘굴욕의 달’이었다. 단 며칠 사이에 ‘공익의 대표자’를 자처하는 검찰의 자존심을 긁는 사건이 연달아 일어났기 때문이다.

시작은 검찰 내부였다. 서울중앙지검 금태섭 검사는 2006년 9월11일치 에 ‘수사 제대로 받는 법’이라는 기고를 실었다. 그는 “변호사를 동반하지 않은 피의자를 상대로 밤새도록 똑같은 질문을 해서 자백을 받던 시대는 지났다”며 “수사기관과 피의자, 피해자, 참고인 등 수사의 참여자들이 공정한 게임을 통해 실체적 진실을 밝히는 데 협력해야 한다”고 운을 뗐다. 이어 “피의자는 충분한 정보를 갖지 못한 채 어둠 속에서 헤매게 된다”며 수사기관에 소환됐을 때 △(변호인의 도움을 받을 수 있을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말고 △변호인에게 모든 것을 맡기라는 등 구체적인 행동 지침을 제시했다. 자백 위주의 ‘구닥다리’ 수사 방식은 이제 끝이 났으니, 피의자에게도 헌법적 권리를 정확하게 알려주고 법과 원칙에 따라 정정당당하게 실체적 진실을 가려보자는 제언이었다.

사법부 수장인 이용훈 대법원장이 바통을 이어받았다. 이 대법원장은 같은 달 11~13일, 18·19일, 지방의 법원들을 순회하며 판사들을 모아놓고 “검사의 수사 기록을 던져버리라”고 했다. 사인 간의 분쟁이 일어나면 법원에 손해배상을 청구하고 형사고소도 함께 하는 경우가 많은데, 민사소송을 맡은 재판부가 형사사건 조사가 끝날 때까지 재판을 미루는 행태를 겨냥한 발언이었다. 이 대법원장은 “법정에서 직접 다투지 않고, 어떻게 검사나 계장이 조사실에서 작성한 수사 기록을 유력한 증거로 삼아 판단할 수 있느냐”며 판사들의 잘못된 관행을 질책했다.

두 사람의 주장은 각각 조언하는 대상은 달랐지만, 더 투명하고 신뢰받는 형사사법 절차를 구축하자는 목적은 일치했다. 또 하나 일치한 건, 검찰의 격한 반발이었다. 금 검사의 연재를 놓고는 검찰 수사관부터 검찰총장까지 ‘영업비밀’을 발설한 금 검사를 비난했다. 당시 서울중앙지검의 한 부장검사는 “그 글에는 검사를 어떻게든 피의자를 얽어매려는 사람으로 보는 잘못된 전제가 깔려 있다”며 불쾌감을 감추지 못했다. “조서에 도장을 찍을 필요가 없다”는 2회 연재분 내용을 미리 파악한 뒤 수뇌부의 압박 강도는 더욱 세졌다. 결국 금 검사가 에 연재 중단을 요청하는 형식으로 10회짜리 기획은 세상의 빛을 보자마자 숨을 거뒀다. 검찰 내부의 촉망받는 엘리트였던 금 검사는 곧바로 인사 조처됐고, 결국 옷을 벗어야 했다.

이용훈 대법원장의 발언에 대해서는 정상명 검찰총장이 “국민을 위한 수사 활동을 담당하는 검사가 적법하게 작성하고 법률로 증거능력이 부여된 조서를 무시해버리라는 것으로 잘못 받아들여질 수 있다”며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이때부터 이 대법원장은 검찰의 공적이 됐다.

어찌됐건, 당시의 도발적인 주장은 정권과 세상이 바뀌면서 일부 열매를 맺고 있다. 문화방송 〈PD수첩〉의 PD들을 비롯해 정연주 한국방송 사장, 김상곤 경기도교육감, 한명숙 전 총리 등 얼토당토않은 이유로 검찰청으로 잡혀간 많은 인사들이 묵비권을 행사했다. 이들은 법정에 가서야 비로소 입을 열었고, 법원은 이들의 주장에 귀기울이며 검찰의 수사 기록을 ‘다시 보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검찰은 별로 변한 게 없어 보인다. 최근 장안의 화제가 된 한명숙 전 국무총리 재판을 보더라도 그렇다. 한 전 총리에게 뇌물을 건넸다는 핵심 증인 곽영욱씨의 법정 증언을 종합해보면, 검사가 호랑이보다 무서워 살기 위해 거짓 진술한 것이며, 심장이 좋지 않은데 새벽 1~2시까지 변호인도 없이 검사와 ‘면담’하는 게 고통스러웠으며, 검사가 “전주고 나온 정치인들 다 대라”고 했단다. “검사님이 막 죄를 만들잖아요”라는 곽씨의 말은 정말 압권이었다. 수많은 조사와 면담 속에서 수사를 받은 사람은 곽씨인데, 그가 되레 검찰의 속성을 꿰뚫은 것일까?

김태규 기자 한겨레 편집팀 dokbu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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