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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사와 판사, ‘동창생’들


형사소송법 체계상 ‘급’이 다르지만, 동료 의식 짙어 ‘판결의 왜곡’ 부르기도
등록 2010-01-28 05:28 수정 2020-05-02 19:25
같은 시험을 통과하고 같은 곳에서 배워서인가. 검사와 판사의 뿌리 깊은 동료의식은 재판의 왜곡을 불러오기도 했다. 한겨레 김진수 기자

같은 시험을 통과하고 같은 곳에서 배워서인가. 검사와 판사의 뿌리 깊은 동료의식은 재판의 왜곡을 불러오기도 했다. 한겨레 김진수 기자

2006년 11월10일 저녁 서울 역삼동의 한 음식점에 중년 남성 넷이 모였다. 서울중앙지법 이상훈 형사수석 부장판사가 박영수 대검찰청 중앙수사부장에게 전화를 걸어 자리를 만들고 거기에 민병훈 서울중앙지법 영장전담 부장판사, 채동욱 대검 수사기획관이 동석한 자리였다. 외환은행 매각 의혹을 수사하던 대검 중수부가 론스타 한국지사 대표 유회원씨의 구속영장을 주가조작 혐의로 청구했는데 법원이 두 차례나 이를 기각하면서 갈등이 최고조에 이른 시점이었다. 술잔이 돌고 현안을 얘기하기 시작했다. 박 중수부장은 “지금까지의 관례에 비춰볼 때 영장 기각은 맞지 않다”고 주장했고, 이 수석부장은 “수사가 충분히 되었고 도주 및 증거인멸의 우려가 없다면 구속의 필요성이 없다”고 반박했다. 서초동을 떠들썩하게 했던 문제의 ‘4인 회동’이다.

영장 발부 문제를 비공식적으로 해결하려 했다는 점에서 이 자리는 부적절했다. “밀실이 아닌 공개된 법정에서 사실관계를 다투자”는, 이용훈 대법원장의 ‘공판중심주의’ 소신에도 역행하는 것이었다. 한국방송의 첫 보도로 ‘4인 회동’ 사실이 세상에 알려지자 이 수석부장과 박 중수부장은 각자 기자들을 불러모아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그런데 이들은 언론의 문제제기를 전혀 이해할 수 없다는 태도를 보였다. “중수부장은 대학 선배인데다 연수원 동기로 친”(이상훈 수석부장)하고 “개인적으로 호형호제하는 사이”(박영수 중수부장)인데 그렇게 만난 게 뭐가 이상하냐는 생각이었다.

판검사들의 이런 ‘동료 의식’은 우리나라 법조인 양성제도에서 비롯됐다. 건국 이후 시행된 고등고시 제도에서는 사법과 시험 합격자를 바로 사법관시보 또는 변호사시보로 임명해 1년 동안 수습교육을 하고 판검사로 임명하거나 변호사 자격을 주었다. 그러다 1962년부터는 “예비 법조인 실무수습을 제도적으로 강화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에 따라 서울대에 사법대학원을 설치하고 이곳에서 2년간 교육을 받도록 했다. 1971년부터는 대법원 산하 사법연수원이 이 기능을 담당하기 시작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48년 전부터 대한민국 법조인들은 햇병아리 시절부터 동문수학하는 ‘동창생’이 돼버린 셈이다.

어제의 친구가 오늘은 판사가 되고 검사가 되는 현실에서 그들의 동료 의식(또는 동업자 의식)은 ‘판결의 왜곡’이라는 심각한 부작용까지 낳았다. 한 중견 판사는 이렇게 고백했다.

“검사가 기소를 했는데 무죄 같아. 그런데 무죄를 때리면 검사는 무죄 평정(수사와 기소에 검사의 잘못이 있었는지 평가하는 일)을 받아야 하고 항소장도 써야 하고 골치가 아프게 돼. 그러니 유죄로 하되 집행유예로 풀어주는 거야. 그렇게 한 수 접어주는 거지.”

최근 용산 참사 수사기록 공개, 강기갑 의원·〈PD수첩〉 무죄 등 법원의 상식적인 판결을 검찰이 거세게 비난하고 나섰다. 이참에 정권과 수구언론의 힘을 빌려 형사소송의 주도권을 찾아오겠다는 기세다. 그러나 검찰은 어디까지나 피고인의 유죄를 주장하는 소송의 한 당사자일 뿐이다. 그리고 최종 심판자는 법원이다. 형사소송법 체계상 ‘급’이 다르다. 그러나 검찰은 함께 동고동락했던 연수원 시절을 회상하는 듯 법원과 같은 반열에 오르려 한다. 정권을 위해 말도 안 되는 온갖 청부 수사를 마다하지 않으면서도 자신들이 ‘준사법기관’이란다.

검찰의 이런 끊임없는 ‘도발’에는 법원의 책임도 있다. 과거 권위주의 시절 검찰과 안기부의 주문대로 ‘정찰제 판결’을 내렸다. 눈에 보이는 압력이 없어진 뒤에도 검찰이 수사상의 필요가 아닌, 처벌의 성격으로 청구하는 구속영장도 재깍재깍 발부해줬다. 검찰이 험악한 말을 쏟아내면 법정이 아닌 다른 곳에서 해결하려는 저자세로 검찰의 기를 살려줬다. 검사를 고생시키지 않으려고 무죄판결을 자제하며 억울한 전과자를 만들기도 했다. 모두 사법부의 독립을 갉아먹는 행위였다. 헌법에 보장된 자신들의 권한도 제대로 행사하지 못하는 무능이었다.

사법부의 독립은 누가 대신 지켜주는 게 아니다. 판사 스스로 지켜야 한다. 몇몇 검사들은 “경찰은 검찰이 견제하고, 검찰은 법원이 견제한다. 그러면 법원은 누가 견제하느냐”고 항변한다. 그건 언론이 하겠으니 걱정 붙들어 매시라. 그러면 최근 검찰보다 험상궂고 한나라당보다 억지스러운 조·중·동의 ‘법원 물어뜯기’는 어떻게 설명할 거냐고? 〈PD수첩〉의 광우병 보도가 무죄이듯, 조·중·동에도 언론의 자유가 있다. 터진 입 아닌가.

김태규 기자 한겨레 편집팀 dokbu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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