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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관님의 불타는 권력 의지


재판 개입 파문 일으켰던 신영철 대법관…
하마평 기사에 이름 넣어달라 노골적으로 부탁하던 ‘정치 판사’의 기억
등록 2010-02-11 02:49 수정 2020-05-02 19:26
신영철 대법관. 한겨레 신소영 기자

신영철 대법관. 한겨레 신소영 기자

그를 처음 만난 건 2003년 12월이었다. 내란음모 사건의 재심을 청구한 김대중 전 대통령이 불편한 몸을 이끌고 법정에 직접 나온다는 소식을 접하고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부장판사실로 올라갔다. 신분을 밝히고 방에 들어가자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어째 기자가 찾아온 게 영 달갑지 않은 눈치였다. 앉으라는 얘기도 없어 집무실 책상을 사이에 두고 선 채로 간단하게 ‘팩트’만 확인하고 나왔다. ‘아, 이 사람은 언론에 친화적이지 않은 은둔형 판사구나.’ 당시 서울고법 형사3부장을 맡고 있던 신영철 판사 얘기다.

차관급 대우를 받는 고등법원 부장판사는 서울고법에만 30명이 넘는다. 언론에 친화적이지 않은 판사를 굳이 찾아갈 필요도, 시간도 없었다. 그러하기에 그와의 대면은 그게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2005년 요직인 서울중앙지법 형사수석부장판사로 기용된 뒤에는 스타일이 바뀌었다. 기자들을 자주 만나고 스킨십을 늘리고 있다는 얘기가 들려왔다. 형사수석부장은 법원장을 대신해 공보관 역할을 하는 자리니, 그러려니 생각했다.

그러나 기자들과 거리를 좁히면서 본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2006년 5월, 횡령 혐의 등으로 구속 기소된 정몽구 현대차 회장의 재판부 배당 문제점을 지적하는 기사를 후배 기자가 썼다. 정 회장 변호인단에 퇴직한 지 1년도 안 된 ‘전관’ 변호사가 포함됐는데, 이런 경우 특별히 형사수석부장판사가 재판을 직접 맡도록 돼 있는 예규를 어기고 일반 재판부에 사건을 배당했다는 내용이었다.

사건을 배당하는 이는 형사수석부장판사이기에, 신 판사는 매우 즉자적으로 반응했다. 대응 수단은 역시 전자우편이었다. 기사가 나간 날 오전 9시58분에 그가 후배 기자에게 보낸 전자우편의 제목은 ‘너무 한심하고 가벼운 분석에 실망이 큽니다’였다.

“기자님 머릿속에는 법원에 관한 한 전관예우 네 글자밖에 없나요. 한심합니다. 형사재판에서의 최근의 모든 개혁 작업에는 눈감고 오로지 전관예우 어쩌고 하는 기사만 쓰다니요. 출입처에 관련된 실질적 기사를 쓰려면 연구를 하여야 합니다. 전관예우 어쩌고 하는 펜대 굴리기 한 번이 관련 법관들의 사기를 엄청나게 떨어트립니다.”

‘한심하다’ ‘펜대 굴리기’ ‘연구를 하라’는 원색적 표현에는 감정이 잔뜩 묻어 있었다. 일찍이 접하지 못한 판사님의 ‘이색 전자우편’ 소식에 법조팀원들은 모두 혀를 내둘렀다. 당사자인 후배 기자는 형사수석부장실로 올라가 사과를 요구했지만, 그 자리에서 신 판사는 “대법관 후보 물망 기사에 내 이름 하나 못 올려주느냐”며 또 다른 불만을 나타냈다. 당시 대법원은 대법관 다섯 명의 교체를 눈앞에 두고 있었다. ‘전관예우’ 기사보다 일주일 앞서 대법관 인선 전망 기사가 나갔는데, 그때 왜 자신의 이름은 뺐느냐는 또 다른 항의만 늘어놓은 것이다.

같은 해 8월 헌법재판관 인선을 앞두고도 그는 똑같은 얘기를 했다. “인선 기사 쓸 때 제 이름 넣어주셔야 됩니다. 지난번에 말했던 (중부권 출신 대표주자라는) 그런 측면에서.”

대한민국 최고법원의 구성원인 대법관은 판사라면 누구나 꿈꾸는 자리다. 그렇기 때문에 대법관 인선이 다가오면 대부분의 고위 법관들은 안테나를 곧추세운다. 심지어 “김 기자, 그거 몰랐어요?”라며 경쟁자의 흠을 슬쩍 제보하기도 한다. 비록 의도가 있다 하더라도 진실을 말하는 그 정도는 애교로 봐줄 만하다. 그러나 후보군에 들어 있지도 않던 자신의 이름을 안 써줬다고 항의하고, 다음에는 꼭 써달라고 요구하는 식의 대언론 로비는 정치인에게나 어울릴 법한 행태였다.

일련의 사건을 겪으며 그가 그토록 바라는 대법관이 되기는 어려울 거라 판단했다. 발 없는 말이 천 리를 가고, 대법원도 눈이 있고 귀가 있을 테니. 그런데 평소에 주창하던 ‘중부권 기수론’(충남 공주 출신)이 먹혀들었는지 어느 날 그는 대법관으로 제청됐다. 하지만 얼마 뒤 대법관에 오르고도 남을 만한 공이 무엇이었는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촛불 사건’ 재판을 보수 성향 판사에게 몰아주기로 배당하도록 하고, 헌법재판소의 집시법 위헌 여부 결정이 나오기 전에 빨리 재판을 진행하라는, 사실상 빨리 유죄 판결문을 쓰라는 압력을 담당 판사들에게 가한 사실이 공개된 것이다. 불타는 권력 의지가 빚어낸 ‘사법 참사’ 앞에서 나는 “그러면 그렇지”라며 혀를 끌끌 찰 수밖에 없었다.

그가 대법관에 임명된 지 벌써 1년이다. 모두가 오래가지 못할 거라 생각했지만, 예상을 깨고 그는 여전히 대법관이고 오늘도 확정판결을 쏟아내고 있다. 법원행정처의 한 판사는 그가 “착근(着根)하고 있다”고 전했다. 존경받지 못하는 ‘재판 기술자’가 대법관으로 뿌리내리고 있다면, 우리 사법부의 토양이 기름지다는 얘긴가, 아니면 척박한 건가.

김태규 기자 한겨레 편집팀 dokbu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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