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고혈압·당뇨병 전문가가 뭉쳤다


대구 심뇌혈관질환 등록관리 시범사업 1년, 의사·약사·간호사·영양사·운동처방사 협력 모델
등록 2008-11-14 06:37 수정 2020-05-02 19:25

“고혈압과 당뇨병은 생활습관을 고쳐나가야 이겨낼 수 있습니다. 담배부터 끊읍시다. 매일 30분 이상 걸읍시다. 음식은 알맞게 드십시다. 가까운 병·의원을 찾아 도움을 받으세요.”
이게 뭘까 싶은 광고가 대구 지역 라디오에서 매일같이 흘러나온다. 의과대학 교수가 나와 꾸준한 치료를 권하기도 하고 영양사가 식단 관리 방법을 설명하기도 한다. 버스에는 ‘99세까지 88하게’라는 문구로 고혈압·당뇨병 등록관리사업단의 전화번호(053-253-9988)를 알리는 광고가 붙어 있다. 이 캠페인은 대구시가 진행하는 ‘심뇌혈관질환 고위험군 등록관리 시범사업’의 일환이다.

“내가 옛날 사람이라 밥이 남으면 먹고, 과일이 썩게 생겼으면 먹고… 그러다 보니 당수치 관리가 안 되더라고.” 대구에 사는 최일권(69) 할머니는 당뇨병을 10년간 앓았다. 당뇨병이란 것을 알고 나서도 병원에서 받아온 처방대로 약만 먹을 뿐 식이요법은 생각지도 못했다. 그나마 약도 꼬박꼬박 챙겨먹지 않았다. 몇 년 전엔 아는 사람이 권한 건강보조제를 먹었다가 혈당이 갑자기 오르기도 했다. 지난해 혈당이 300mg/dl(일반인 평균 90mg/dl)까지 올라서야 ‘고혈압·당뇨병 사업 등록병원’을 찾았다. 병원을 통해 고혈압·당뇨병 환자로 등록을 마친 뒤 ‘고혈압·당뇨병 교육센터’를 소개받았다.

(※ 이미지를 클릭하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 이미지를 클릭하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남은 밥, 과일 안 먹기 어려웠는데…”

“영양사가 와서는 밥상을 차리더라고. 밥은 큰술로 3술 담아놓고 토마토를 조금 놓고는 이 정도 먹으라고 일러줬어. 운동도 하루에 얼만큼, 어떻게 하라고 설명해주고.” 눈으로 보고 몸으로 익힌 내용은 조금씩 생활에 스며들었다. 당수치가 호전된 최 할머니는 “이전에는 의사가 운동해라, 음식 조심해라 해도 감도 안 오고 뒤돌아서면 잊었는데 자꾸 불러서 가르쳐주니까 좋다”고 말했다.

대구시는 현재 국내에서 유일하게 민간 병·의원, 약국 등과의 협조 아래 고혈압·당뇨병 환자를 대상으로 ‘심뇌혈관질환 고위험군 등록관리 시범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65살 이상 노인이 이 사업에 참여하는 병·의원과 약국을 이용할 경우 고혈압·당뇨병 환자로 등록을 시키고 ‘고혈압·당뇨병 광역교육정보센터’로 이들의 진료 정보를 전달한다. 그러면 광역교육정보센터의 콜센터가 환자에게 연락해 교육을 권하고, 환자가 가까운 ‘고혈압·당뇨병 교육센터’를 찾으면 간호사, 영양사, 운동처방사 등이 맞춤 상담·교육을 해준다.

뇌혈관질환은 생활습관과 관계가 있고 치료를 위해선 꾸준한 식이요법과 운동이 필요한데, 저소득층일수록, 나이가 많을수록 그 내용을 정확히 알고 실천하기가 어렵다. 하다못해 병원에 정기적으로 오고 약을 꾸준히 먹는 일도 게을리하는 경우가 많다. 이런 환자들을 체계적으로 관리해주는 게 필요하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한 게 대구시의 시범사업이다.

또 등록한 환자에게는 한 달에 진료비 1천원, 약제비 3천원이 지원된다. 김재경 고혈압·당뇨병 광역교육정보센터장은 “크지 않은 돈이지만 꾸준히 약을 먹어야 하는 노인 환자들, 특히 저소득층 노인들의 경우 지원을 받으면 한결 수월해하신다”고 말했다. 11월3일 현재까지 65살 이상 고혈압·당뇨병 환자 4만6817명이 ‘고혈압·당뇨병 사업 등록병원’을 통해 등록을 마쳤다. 활발한 홍보 활동과 교육 효과가 입소문으로 퍼지면서 11월3일 하루만도 131명의 환자가 추가 등록을 했다. 64살 이하도 3599명이 등록해 교육·관리 서비스를 받고 있다.

센터 8곳에서 식단·운동법 교육

지난 9월 시작한 이 사업은 정부가 추진하는 ‘심뇌혈관질환 종합대책’의 일환이다. 보건복지부·질병관리본부·대구시가 손을 잡고 정부와 지자체가 5:5의 비율로 예산 50여억원을 마련했다. 이 돈으로 ‘고혈압·당뇨병 교육센터’를 대구 시내에 구별로 8곳 세웠다.

(맨 위부터) 영양사가 고혈압·당뇨병 환자들에게 적당한 간으로 음식 만들기 시범을 보이고 있다. 지난 10월20일 교육센터에서 수료증을 받은 학생들(고혈압·당뇨병 광역교육정보센터 제공). 교육센터에는 적당한 당뇨 식단 모형이 전시되고 있다.

(맨 위부터) 영양사가 고혈압·당뇨병 환자들에게 적당한 간으로 음식 만들기 시범을 보이고 있다. 지난 10월20일 교육센터에서 수료증을 받은 학생들(고혈압·당뇨병 광역교육정보센터 제공). 교육센터에는 적당한 당뇨 식단 모형이 전시되고 있다.

대구시가 이 사업에 나선 것은 뇌혈관질환이 시민들의 건강을 크게 위협하고 있다는 판단에서였다. 지역보건의료 문제 진단을 위해 2001년 연구조사를 벌인 결과, 대구 시민의 가장 큰 사망 원인은 뇌혈관질환이었다. 2001년 사망자 중 남성 43.8%, 여성 53.4%가 뇌혈관질환으로 숨졌다. 이는 전국적인 추세와도 다르지 않다.

고혈압·당뇨병 환자의 관리를 위해서는 병·의원과 약국의 참여가 필수적이다. 시에서 환자를 지원하기 위해서는 병·의원 차원에서 환자의 개인 진료 기록을 전산화해 등록·관리해야 하기 때문이다. 지난 1년간 대구시에 있는 병·의원 1581개 중 532개가 ‘고혈압·당뇨병 사업 등록병원’으로 등록을 마쳤다. 내과 295개 중 201개, 가정의학과는 137개 중 85개가 참여했다. 약국은 1236개 중 964개가 참여했다.

이 사업의 핵심은 의사와 약사, 간호사, 영양사, 운동처방사 등 다양한 전문가가 터놓고 협력한다는 점이다. 병·의원에서 의사의 진료와 처방을 받고 약사의 복약 지도를 받은 뒤 교육센터로 가면 영양사가 식단을, 운동처방사가 운동방법을 알려준다. 간호사는 혈압과 혈당을 재고 관리하는 법을 설명한다. 이 완벽한 공조 속에서 환자는 최상의 관리를 받게 된다.

교육센터의 장영선(43) 간호사는 “우리 시어머니도 고혈압에 당뇨병까지 앓고 계신데 그동안 병원만 잘 다니라고 해왔다”며 “여기에 온 뒤에 나도 공부가 많이 돼서 식사, 운동 등 생활습관에 대해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니까 어머님이 좋아하신다”고 말했다. 간호사 경력 20년인 그는 “여기 오는 어르신들을 우리 부모님처럼 생각하며 정서적인 부분까지 채워드리는 것이 목표”라고 말했다.

함께 일하는 박지은(25) 영양사는 대학을 졸업하고 바로 이곳에 합류했다. “여기서는 환자들에게 쉽게 설명하기 위해 공부를 많이 해야 하고, 동시에 다른 전문가들과 소통하다 보니 공부가 많이 된다”고 한다. 교육센터를 찾은 11월4일, 박 영양사는 계속 밀려오는 전화 상담 요청에 좀처럼 인터뷰 시간을 내기가 어려웠다. “하루에 10건 정도 상담 전화가 와요. 식사 처방 외에도 소소한 생활습관까지 질문하고 싶어하는 게 많아서 통화가 길어지죠.” 이제는 고혈압·당뇨병 관리사업이 많이 알려져 지나가다가도 혈당 재러 한번씩 들어오는 환자들이 많아 교육센터 분위기가 활기차다. “예를 들어 어르신들에게 ‘짜게 드시지 말라’고만 말하면 그냥 듣고 흘리세요. 저희는 콩나물국을 짠 것부터 싱거운 것까지 준비해서 직접 자기 스타일을 선택하게 하고 적당한 간은 어떤 것인지 맛보여드리죠.” 환자들은 “이렇게 싱거워서 어떻게 먹냐”고 말하면서도 식습관 개선을 어떻게 해야 할지 피부로 느끼게 된다.

병·의원, 약국 “불편해도 공익 위해”

대학에서 운동처방을 전공한 김종호(35) 운동처방사는 “의사·약사·영양사·간호사와 함께 원활하게 돌아가는 시스템에 속해 있어 일의 효율이 높다”고 말했다. “65살 이상 환자의 경우 반복 학습이 중요한데 운동 방법과 시간을 구체적으로 알려주고 주기적으로 교육을 반복하니 환자들의 상태가 나아진다”는 설명이다.

고혈압 환자 대상 6주 교육 프로그램의 예

고혈압 환자 대상 6주 교육 프로그램의 예

이들은 일주일에 한 번 이 사업에 참여하지 않는 병·의원으로 ‘외부 교육’도 나가고, 매월 7일 거리 캠페인도 펼치는 등 다양한 활동을 한다.

고혈압·당뇨병 교육에 앞장서고 있는 대구 수성구의 ‘21세기내과’ 신이철 원장은 “의사의 환자 진료 시간이 3분 내외인 현재 진료 시스템에서 고혈압·당뇨병의 효과적인 교육은 기대하기 어렵다”며 “시범사업을 통해 영양사와 운동처방사 등이 환자별로 실생활에 맞는 식사와 운동 방법을 제시해 치료에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그의 병원에서는 당뇨병 환자를 위한 시식회도 열고 내년 봄에는 운동회도 열 계획이다.

같은 건물에 있는 ‘수약국’의 이종희 약사는 “약국 입장에서는 환자 약제비 중 3천원은 시에 따로 청구해 받아야 하니 불편한 일일 수도 있으나 결국 이런 협력이 공익을 위해 필요한 일이라는 데 생각을 같이했다”고 말했다. 이제 그는 65살 이상 고혈압·당뇨병 환자 가운데 시의 등록환자가 아닌 사람이 있으면 병원에 되돌려보내 등록을 하도록 유도한다.

전문가들이 협력해 지역 안의 고혈압·당뇨병 환자를 관리해나가는 대구시의 도전은 이제 다른 지방자치단체들이 응용하고 싶어하는 모델이 돼가고 있다.



안문영 대구시청 보건위생과장
“뇌혈관질환, 사회가 함께 대처해야”


안문영 대구시청 보건위생 과장

안문영 대구시청 보건위생 과장

대구시가 전국 최초로 고혈압·당뇨병 관리 사업을 진행할 수 있었던 것은 지난 10년간 초석을 깔아온 덕분이다. 경북대 의대를 졸업하고 연천·청송 등에서 보건의료원장으로 재직하던 안문영 대구시청 보건위생과장은 대구시로 온 1999년부터 고혈압·당뇨병 관리 사업을 이끌어왔다.

-왜 고혈압·당뇨병인가.
보건소에서 국가가 정하는 사업 우선순위를 따라가다가 시청에 들어오니 지역보건의료를 위해 능동적인 일을 해보고 싶었다. 2000년에 ‘시민건강 증진을 위한 보건의료정책’ 계획을 세웠고 이듬해에 지역사회 진단을 통해 대구 시민들의 사망 원인 분석을 했다. 그때 제안한 것이, 가장 중대한 사망 원인인 뇌혈관질환을 예방하기 위해 고혈압과 당뇨병을 관리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심뇌혈관질환 고위험군 등록관리 시범사업’이 어떻게 대구에서 시작됐나.
2006년에 유시민 보건복지부 장관이 심뇌혈관질환 관리 정책을 세웠는데 당시 대구는 이미 111개 민간 병·의원이 참여한 형태로 관리 사업을 추진하고 있었다. 정부가 추구하는 사업 방식이 민간과의 협력 체계를 갖추는 것이었는데, 미약하게나마 가능성이 있던 곳이 대구였다.
-지금까지의 사업을 평가한다면.
우리는 여전히 ‘맨땅에 헤딩’ 중이다. 우리나라엔 아직 보건정책이 미약해 고혈압·당뇨병 관리도 복지 개념으로 추진해야 한다. 의료비·약제비 지원 대상이 65살 이상에 국한된 것도 노인 복지정책 예산이기 때문이다. 대구시에만 고혈압·당뇨병 환자가 50만~60만 명이다. 보건의료정책이 더 확대되어야 한다. 이제 시작 단계다.
-바라는 점은.
고혈압과 당뇨병은 환자뿐 아니라 가족도 교육을 받아서 식사 조절, 운동, 금연 등을 도와줘야 한다. 각종 전문가들도 개별적인 관리를 해줘야 한다. 주변 환경도 변해야 한다. 고혈압 환자가 식당에 가면 맞춤 식단을 사먹을 수 있고, 당뇨병 환자가 운동을 할 땐 제대로 지도해줄 수 있는 트레이너가 있어야 한다. 이런 ‘지지적 환경’까지 조성돼야 지역의 보건의료정책이 완성된다.

대구=글 임지선 기자 sun21@hani.co.kr·사진 류우종 기자 wryu@hani.co.kr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