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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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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 약국’은 어디로 갔나

의약분업 이후 약국판 지각변동…
대형 약국이 병원 주변에 몰리며 약국 간 양극화 심화
등록 2008-11-14 06:56 수정 2020-05-02 19:25

딸랑딸랑, 약국 문을 밀면 종소리가 났다. 약 냄새가 훅 끼치고 곧 익숙한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나무 의자에는 으레 이웃 철물점 아줌마와 양장점 아줌마가 앉아 수다를 떨고 있었다. 약사는 늘 “어디가 또 아파서 왔어?”라고 물었다. 따뜻한 눈빛이었다. 감기 기운이 있으니 약을 달라고 하면 “일단 집에 가서 푹 쉬어봐, 요즘 비염 약도 먹는 중이잖아. 푹 자보고 그래도 안 나으면 다시 와”라며 약을 내주지 않았다. “엄마 몸살은 좀 나아졌냐”고 묻는 ‘한양약국 아줌마’는 동네 터줏대감, 인근 주민들의 가족 건강 상담사였다.
30여 년간 한자리를 지켜온 한양약국이 문을 닫은 건 2003년 여름이었다. 유연순(68) 약사에게 당시에 대해 묻자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는 “갈수록 약국 경영이 악화돼서 유지할 수가 없었다”고 말했다. 한양약국은 가파른 언덕길을 올라 대우아파트(옛 서림아파트) 가는 길목, 인근에 병원이 하나도 없는 서울 구로구 고척2동 어귀에 있었다.


한양약국처럼 2003년에만 3084곳 폐업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 인근에 밀집한 문전약국들. 의약분업이후 약국은 대형화·양극화의 길을 걷고 있다.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 인근에 밀집한 문전약국들. 의약분업이후 약국은 대형화·양극화의 길을 걷고 있다.

의약분업이 실시된 2001년 이후 한양약국은 내리막길을 달렸다. “동네 단골들이 처음엔 멀리 병원에서 받아온 처방전도 들고 왔지. 한데 온갖 의사들이 처방하는 그 수많은 약을 다 구비해놓을 수가 없잖아. 그렇게 손님을 다 놓쳤지.” 의사가 지정한 약 이외에는 같은 성분의 약으로 대체 조제하는 것도 금지돼 있으니 방법이 없었다. 단골들이 자주 처방받아오는 약 중심으로 구비해보려고 노력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차츰 단골들에게 “처방전은 병원 근처의 약국에 가져가라”고 권해야 했다.

2003년 들어 매출이 2~3년 평균치의 5분의 1로 줄어들었다. 한 달 내내 문을 열어도 100만원 벌기가 힘들었다. 각종 세금과 약국 유지비를 제하고 나면 자신의 인건비도 건지기 어려웠다. 문을 닫자 주민들이 “주변에 약국이 없어 불편하다” “사랑방이 없어져서 아쉽다”고 불평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는 “작은 약국을 하면서 동네 사람들과 함께 늙어가고 싶었는데 이젠 다 옛 이야기”라고 말했다.

한양약국과 운명을 같이 하며 2003년 한 해 동안 폐업한 약국은 전국에 3084개다. 그 자리엔 대형 약국들이 생겨났다. 지난해 국정감사 자료를 보면, 2층 이상의 규모를 지닌 대형 약국은 2006년 835개, 2007년 1~6월에 423개가 문을 열었다. 같은 기간 3평 미만의 소형 약국 개업은 전국 22개에 불과했다.

대형 약국이 출현하면서 약사들은 ‘뜨내기’가 됐다. 올해 초 약국 전문지 이 전국 개국 약사 217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약사 60%가 “의약분업 뒤 약국 이전을 경험했다”고 응답했다. 두 차례 이전한 약사가 21%(45명), 3회 이상도 12%(25명)나 됐다. 2004년에 약대를 졸업한 박아무개 약사는 “문전 약국(의료기관 가까이에 있는 약국)에 계약직으로 들어가 1년 정도 일하고 옮기고를 반복해 소속감은 별로 없다”고 말했다.

양극화도 심해졌다. 전국 2만여 개 약국 중 상위 1%의 월평균 약제비는 3억4836만원에 이른다. 반면 하위 5%의 약국이 국민건강보험공단에 청구하는 한 달 약제비는 100만원에도 미치지 못한다. 지난해 10월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요양기관의 특성을 고려한 유형별 분류 방안’ 보고서는 “상위 8%의 약국이 전체 약제비의 45%를 점유하면서 극심한 빈익빈 부익부 현상을 보이고 있다”고 평가했다.

보고서는 처방조제가 병원 인근의 일부 대형 약국에 집중되면서 병·의원 문전 약국과 비문전 약국 간의 수입 격차가 커진 것으로 분석했다. 연구진은 “재정 악화를 피하기 위해 약국들이 병·의원이 몰려 있는 도시 중심지로 이동하면서 결국 의료기관이 적은 지역엔 약국마저 감소하고, 반면 문전 약국은 더 대형화될 우려가 있다”고 지적했다. 이미 2006년 대한약사회가 1139개 표본 약국을 분석한 결과 병·의원 근처에 있는 약국이 79.7%였다. 도시 외곽이나 시골 등 병원이 없는 곳에 사는 사람들의 약국 접근도만 떨어지는 형국이다.

지난 10월24일 국정감사에서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이 제출한 자료에서도 양극화는 두드러졌다. 올 상반기 전국 약국 2만244곳 가운데 하루평균 처방조제 건수가 30건 미만인 약국이 24.3%(4935곳)였고, 50건 미만인 약국은 전체의 절반 정도(8693곳, 42.8%)에 이르렀다. 반면 9.9%(2013곳)의 약국은 하루 150건 이상의 처방조제를 시행했다. 입지와 규모에서 밀리는 약국들이 처방전을 기다리고만 있는 사이 좋은 입지 조건을 가진 상위 10% 안쪽의 약국만 호황을 이어가는 셈이다.

이 때문에 약국도 전문성을 살려야 한다며 ‘특화 약국’을 주장하는 목소리도 있다. 대한약사회의 2006년 ‘약국 경영 활성화 방안 연구’를 보면, 앞으로 약국 경영 개선을 위한 특성화 계획을 가진 약국은 조사대상 1139곳 가운데 43%였다. 특성화를 꾀하려는 부문은 ‘건강기능식품·기능성 화장품 판매’가 23.7%, ‘한약(첩약) 조제’가 22.0%로 나타났다.

한약을 취급하는 약국의 내부 풍경. 약사가 한약조제 자격을 갖고 있더라도 조제 가능한 약의 수는 제한된다.

한약을 취급하는 약국의 내부 풍경. 약사가 한약조제 자격을 갖고 있더라도 조제 가능한 약의 수는 제한된다.

상위 8% 약국이 약제비 45% 점유

하지만 지금의 제도하에서 약국을 ‘특화’하기란 쉽지 않다. 전문 분야를 갖는다 해도 복약 지도 외에 합법적으로 할 수 있는 업무가 한정돼 있기 때문이다. 서울 영등포구의 한 약사는 “아토피 제품을 취급하고 아기 엄마들과 상담을 많이 하지만 처방을 할 순 없으니 제품을 추천만 해줄 뿐”이라고 말했다. 그는 최근 한 신문에 ‘아토피 전문 약국’이라고 소개가 나갔는데, 관할 보건소의 지적을 받아 ‘아토피 전문’이라고 써 있는 간판을 내려야 했다. 약사법 시행규칙 62조 4항은 약국개설자가 특정 의약품이나 특정 질병에 관련된 의약품을 전문적으로 취급하고 있음을 나타내는 표시나 광고를 금지하고 있다. 어떤 분야의 전문성을 갖는다는 것 자체가 위법이라는 논리다.

서울 마포구에서 38년째 약국을 운영하고 있는 이아무개 약사는 “약국은 퇴보하고 있다고 보는 게 맞다”며 한숨을 쉬었다. 그의 약국은 한약을 함께 취급하고 있다. 한약 조제 자격증을 갖고 있는 그는 “1996년까지 한약 분쟁을 치르면서 결국 당시 자격증을 딴 2만5천 명의 약사에게만 한약 조제 자격을 주고 약대 95학번 이후로는 첩약을 금지했다”며 “자격증이 있는 이들도 100가지 종류의 처방만 할 수 있게 해 결과적으로 한약 시장을 죽였다”고 말했다.

대학교수이기도 한 이 약사는 약사로서 한의학을 오랜 기간 공부해왔다. 그는 “예전엔 공부를 많이 한 약사가 성공했는데 이젠 환자들이 병원 앞에 있는 약국만 간다”며 “각 의료 주체가 실력 발휘를 못하게 만든 구조를 바꿔야 한다”고 주장했다. 얼마 전엔 약대를 졸업하고 한의대에 다시 진학한 제자가 찾아와 “6년의 시간을 더 투자했지만 양약과 한약 접목의 미래가 안 보인다”며 어려움을 호소했다고 한다. 이 약사는 “서로의 영역다툼으로 결국 학생들은 학교 다니느라 시간만 허비하게 하고 정작 한약의 발전에는 뜻있는 사람끼리도 머리를 모으지 못했다”고 비판했다. 한약 조제가 법적 제약을 받게 된 이후로는 약국에서의 한약 매출도 크지 않고 약사 스스로도 한약을 그리 권하지 않고 있다고 한다.

대한의사협회 관계자는 “의약분업으로 환자와의 관계에서 업무 분담이 명확해졌는데도 공공연하게 ‘특화 약국’을 내세우고 처방을 하는 행위는 명백한 불법”이라며 “얼마 전 한 제약업체가 약국에 비만 관리 프로그램을 제공하려고 해서 물의를 일으킨 적도 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대한약사회는 “의약품이 아닌 건강기능식품, 화장품, 유아용품 등을 파는 것까지 너무 민감하게 반응한다”며 “특화 약국 자체가 불법이 될 순 없고 진료행위를 할 경우 불법이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현행법에서는 약국에 있는 혈압기로 환자가 직접 혈압을 재면 합법, 약사가 재주면 불법이다. 약사회는 “국민보건이란 큰 틀에서 환자의 건강관리에 접근해야지 환자를 뺏는다는 시각으로 접근해선 안된다”고 말했다.

‘특화’도 어려워 “실력 발휘 불가능”

‘단골약국’의 필요성도 대두되지만 현 구도에선 쉽지 않은 대안이다. 약국에 오는 모든 환자를 대상으로 약력(그동안 먹어온 약의 내역· 734호 기획연재 약과 건강① 참조) 관리를 하는 경우는 전체의 7.4% 수준이다. 대부분의 약국은 환자에 대한 이해 없이 약을 내줄 뿐이다. 이 때문에 복약 지도도 쉽지 않다. 약국의 26.5%가 ‘환자 질병 정보가 부족해서’, 26.1%가 ‘시간이 부족해서’ 복약 지도를 제대로 못하고 있다(약국 경영 활성화 방안 연구, 2006년). 대구의 한 약사는 “처방전 손님이 줄을 서있는 상황에서 개인의 약력을 따지기는커녕 복약 지도를 하기에도 시간이 없다”고 말했다.

대형화·양극화의 판형으로 지각변동 중인 약국시장에 어떤 약을 처방해야 할까. 제도와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힌 약국시장에서 나와 가족을 기억해주던 ‘동네 약국’은 설 자리가 없다.


약국 선택 방법
다시 시작해볼까, 단골 약국


‘약력 관리’란 환자가 사용해온 약에 관한 모든 정보를 체계적으로 관리하는 것을 말한다. 이 약국 저 약국 다니다 보면 ‘나와 약’의 관계를 잘 아는 약사를 만나기 쉽지 않다. 그래서 단골 약국은 환자에게 이롭다. 여러 가지 약을 동시에 복용할 때 상호작용으로 유해한 반응이 생기지 않도록 정보를 얻을 수 있고, 새로 약을 추가할 때도 기존 약 정보를 토대로 안전한 선택을 할 수 있다. 가족 단골 약국을 만들면 가족 특성에 맞는 복약 지도도 가능하다. 약국 입장에서도 단골들이 주기적으로 복용하는 약을 미리 구비해놓을 수 있어 재고 관리 면에서 이득이 된다. 동네 약국이 사라진 자리에서 다시 단골 약국을 대안으로 꺼내드는 까닭이다.

*단골 약국 선택과 활용법
첫째, 쉽게 방문할 수 있어야 한다. 집 근처에 있는 약국을 선택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둘째, 단골 약국이 정해지면 약사에게 가능한 한 많은 정보를 알려줘야 한다. 사용 중인 약은 물론 건강식품, 한약에 대해서도 얘기해 체계적인 약력 관리가 되도록 해야 한다.
셋째, 지속적인 상담을 해야 한다. 단골 약국과 지속적으로 관계를 유지해 자신이나 가족의 건강과 관련한 변화가 있을 때 바로 그 사실을 단골 약국에 알리도록 한다.
도움말: 신용문 대한약사회 학술위원

글 임지선 기자 sun21@hani.co.kr· 사진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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