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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수를 위해 산으로 가다

⑦ 응웬수와 쩐반타 이야기- 전 공산당원과 미래의 베트콩에게 다가온 운명
등록 2013-12-26 02:23 수정 2020-05-02 19:27
응웬수(뒤 오른쪽) 가족의 1960년대 사진. 왼쪽이 부인 보티찌와 쌍둥이 여동생 응웬티씨에우와 응웬티응우. 앞줄 왼쪽부터 응웬탄꺼와 응웬탄끄엉. 보티찌는 1973년 남베트남 군인의 총에 맞아 죽었다. 베트콩이었던 응웬탄끄엉은 20살 되던 1974년 남베트남군이 버린 총으로 사격을 하다 총이 폭발해 목숨을 잃었다. 응웬수 제공

응웬수(뒤 오른쪽) 가족의 1960년대 사진. 왼쪽이 부인 보티찌와 쌍둥이 여동생 응웬티씨에우와 응웬티응우. 앞줄 왼쪽부터 응웬탄꺼와 응웬탄끄엉. 보티찌는 1973년 남베트남 군인의 총에 맞아 죽었다. 베트콩이었던 응웬탄끄엉은 20살 되던 1974년 남베트남군이 버린 총으로 사격을 하다 총이 폭발해 목숨을 잃었다. 응웬수 제공

딸이 사라졌다.

판수언리엔(38)은 급보를 들었다. 마을의 젊은 여자 두 명이 저녁에 1번 국도 근처에서 한국군 해병대원들에게 연행돼 갔다고 했다. 딸 판티수엔(18)과 또래 친구 쩐티수언이었다. 아버지의 심장은 철렁했다. 왜 의심을 샀을까. 별일 없으리라 마음을 진정시켰다. 절대 별일이 없으리라는 보장도 없었다. 전쟁 기간이었다. 1968년 2월12일을 하루 앞둔 11일 오후. 베트남 꽝남성 디엔반현 디엔안사 퐁니·퐁넛촌.

한국군에 연행된 소녀들

당시 추라이에서 호이안으로 북상해 주둔지를 옮겼던(1967년 12월22일~1968년 1월29일) 해병 제2여단(청룡부대)은 1월30일부터 꽝남 지역 일대에서 괴룡 1호 작전을 수행 중이었다. 이른바 구정대공세 반격작전. ‘뗏’이라 부르는 설(구정) 명절을 앞두고 휴전을 통보했던 베트콩 쪽은 북베트남군과 합세해 1월31일 전국 각지에서 봉기했다. 호이안 인근 꽝남 지역도 예외가 아니었다. 꽝남 지역 내 해병 제2여단 전술책임지역 여러 곳에서 베트콩이 공격을 가하자 ‘이들을 격파하고 이어서 도전하는 적을 반격 탐색’()한다는 취지로 작전이 시작됐다. 해병대원들은 주둔지로 돌아가지 못하는 나날이 계속됐다. 2월29일까지 한 달 내내 꽝남 지역 밀림과 거리를 떠돌아다니며 수색 정찰을 했다. 간헐적인 전투도 벌였다. 두 명의 젊은 여자가 한국군에 연행됐던 1968년 2월11일에도 마찬가지였다.

의 기록에 따르면, 퐁니·퐁넛촌 인근엔 제1대대 1중대 1소대가 있었다. 소대장은 최영언(26) 중위. 2·3소대와 만나기 위해 1번 국도를 정찰하며 북상하던 1소대는 오후 1시 대전차지뢰에 반파된 미군차량 1대를 보호하라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위치는 미군 캡소대(정보 수집·관측을 위해 소대보다 적은 규모로 편성한 부대. 일명 마이너스소대) 주둔지 서남쪽 500m 교량 부근으로, 좌표상 퐁니·퐁넛촌 바로 옆이었다. 제1대대 1중대 1소대 해병대원들이 이날 이곳에서 정찰과 경계 활동을 벌였다면, 1중대 1소대나 연계작전을 폈던 2·3소대원들에 의해 판티수엔과 쩐티수언이 연행됐으리라는 추정이 가능하다.

딸은 곧 풀려났다. 친구도 무사했다. 아버지 판수언리엔의 얼굴엔 화색이 돌았다. 딸은 유격대였다.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이라 불리는 베트콩 대원이었다. 의료팀 소속이었다. 다행스럽게도 들키지 않았다.

당시 꽝남 지역(면적 28k㎡, 인구 16만5014명)에서 작전하던 해병 제2여단의 병력 규모는 4800여 명. 미 해병 LTV(수륙양용 장갑차) 중대와 전차소대, 미 해병 제1비행사단과 미 해군 제7함대가 한국군 해병 제2여단을 도왔다. 아군에 맞서는 적의 병력은 8700명으로 파악됐다. 퐁니·퐁넛촌으로부터 서쪽 쯔엉선(長山) 산맥 부근에 위치한 북베트남군 제2사단 병력 7400명에 베트콩 지방군 1300명을 더한 결과였다. 남베트남 정부는 이곳의 적성인구를 30%, 회색인구(중간지대)를 50%로 분석했다. 아군에 우호적인 인구는 20%뿐이었다. 적세가 우세한 지역이었다.

다음날인 2월12일 오전 퐁니촌 입구에서 울린 총소리에 창밖을 내다보던 응웬수(39) 역시 적성인구에 포함된 한 사람이었다. 남베트남 정부의 블랙리스트에도 올랐다. 고향에서 프랑스식 초·중등교육기관인 소학예우르억(So hoc yeu luoc·初學要略)을 졸업하자마자 공산당 활동에 참가했다. 16살이던 1945년부터 25살이던 1954년까지 인도차이나공산당(1951년 베트남노동당으로 개칭. 통일 뒤인 1976년 베트남공산당으로 다시 바뀜)에 입당해 해방군선전대에 참가한 것이다. 촌락 내부에 침투해 조직과 선전 활동을 하는 임무였다. 10년간 10번 넘게 프랑스 군인들한테 끌려가 감옥생활을 했다. 1955년 남베트남 정부 수립 이후, 함께 당 활동을 하던 동지들 대다수는 북으로 갔다. 그는 남았다. 북베트남과 남베트남 혁명세력을 연결해주고 외곽에서 그들을 지원하는 임무를 맡기로 했다. 얼마 안 가 연락선이 끊어졌다. 조직과 떨어진 채 조용히 농사만 지었지만, 보이지 않는 강력한 베트콩 지지세력이었다. 아버지의 영향 때문인지 큰아들 응웬탄끄엉(14)도 베트콩의 일원이었다. 그날도 가족 중 응웬탄끄엉만 집에 없었다. 남베트남 정부 관리들의 해코지는 없었다. 응웬수를 마을의 리더로 따르고 존중하는 이가 많았기 때문이다.

집은 불타고, 곳곳에서 고함과 비명이…

단발로 울린 총성은 어떤 폭음이 있고 나서였다. 폭음은 미군 LTV가 지뢰를 밟고 내는 소리였고, 첫 총성은 일대를 지나던 한국군 해병대를 향한 누군가의 저격이었다. 해병대가 응사하는 총소리가 몇 차례 났다. 잠시 정적. 1시간쯤 흐른 뒤 빗발치는 총성이 퐁니·퐁넛촌 일대를 흔들었다. 응웬수는 부인 보티찌(41)와 함께 귀를 막고 웅크렸다. 보티찌는 둘째아들 응웬탄꺼(11)와 쌍둥이 딸 응웬티씨에우, 응웬티응우(5)를 다독였다. 큰 사고라는 예감이 왔다. 전날 밤 젊은 여자 두 명의 연행은 어떤 전조였던 셈이다.

마을은 시뻘겋게 불타고 있었다. 고함과 비명이 뒤섞였다. 불과 몇백m 밖에서 벌어지는 일이었다. 응웬수는 무기력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어설프게 나갔다간 총 맞아 죽기 딱 좋았다. 이럴 땐 가만히 숨어 있는 게 최선이었다.

바로 그 시각, 11살 소년 쩐반타는 퐁니촌 입구에 있는 가옥에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원래 살던 집보다 안전하다 하여 세든 곳이었다. 아버지는 일을 나갔다. 주인집 할머니와 세 남매만 집을 지켰다. 화염에 휩싸인 마을은 아비규환이었다. 작게 들리던 군인들의 발자국 소리가 갑자기 커졌다. 집에 있는 동굴은 이미 피신 온 마을 주민 서너 명이 차지했다. 동굴로 함께 들어갈까 망설였지만 들어가지 않았다. 대신 부엌에 숨었다. 쩐반타는 두 여동생을 꼭 끌어안았다. 심장이 쿵쾅거렸다. 이가 덜덜 떨렸다. 옆에 있는 주인집 할머니도 눈을 감은 채 두 손으로 귀를 막았다. 동굴에 들어가지 않은 것은 천행이었다. 집에 들어오자마자 한국군은 동굴 입구를 발견했다. 총을 쏘며 소리를 질렀다. 안에 사람이 숨었다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그들은 땅굴에 수류탄을 까 넣었다. 폭음과 함께 집이 들썩거렸다. 동굴 속에서 비명이 가느다랗게 새어나왔다. 몰살이었다. 쩐반타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여동생들을 끌어안은 팔에 더욱 힘을 주었다.

쩐반타의 본래 집은 퐁넛촌 녓지압 마을이었다. 1년 전 그곳에서도 죽을 고비를 넘겼다. 1967년 3월30일(음력 2월19일)이었다. 그때는 미군이었다. 전투 기록을 뒤져보면, 미 해병 제1사단 소속 제5연대 휘하의 병사들일 가능성이 높다. 그들은 마을에 들어와 닥치는 대로 총을 쏘고 수류탄을 던졌다. 마을 주민 10여 명이 죽었다. 왜 그랬는지는 알지 못했다. 다행히도 그때는 혼자 서쪽으로 1km 떨어진 디엔안사 찐쭈마을 외할머니 집에 놀러갔던 터라 큰 화를 피했다. 어머니 다오티르(당시 35살)와 막내 여동생 쩐티무어(당시 1살)는 목숨을 잃었다. 미군은 어머니를 성폭행하고 살해한 뒤 주검을 우물 속으로 던졌다. 어린 소년의 가슴은 원한으로 사무쳤다. 1년 뒤엔 미군이 아닌 한국군이었다. 살았다. 지난해에도 살았고 이번에도 살았다.

한국군 떠난 뒤 발견된 70여 구의 주검

1시간이나 흘렀을까. 쩐반타의 집을 수색하던 한국군 해병대는 마을을 떠났다. 총성이 잦아든 고요함의 틈새로 곳곳에서 잔불 타오르는 소리가 들렸다. 집에서 애만 끓이던 응웬수도 상황이 끝났음을 눈치챘다. 마을로 진입하는 미군들과 남베트남 군인들이 창밖으로 보였다. 그들은 한국군의 동맹군이었지만, 이날만은 전혀 다른 편처럼 보였다. 응웬수는 부인과 함께 마을 쪽으로 달려갔다. 살아남은 사람들이 바깥으로 쏟아져나왔다. 현장은 끔찍해서 눈 뜨고 볼 수 없었다. 널브러진 주검들 사이로 간간이 목숨을 건진 이들이 보였다. 미군과 남베트남 군인들은 그들을 치료하거나 후송했다. 불을 끄는 작업도 했다. 10구가 넘는 주검이 한곳에 모여 있었다. 모아놓고 죽인 흔적이었다. 그런 주검들이 세 곳에 있었다. 불에 그을리거나 우물에 빠진 주검도 있었다. 도합 70여 구였다.

열다섯이던 1972년 입산해 베트콩 유격군으로 활동한 쩐반타는 1973년 1월 파리평화회담 이후 남베트남 임시혁명정부 해방군으로 꽝남 지역에서 활동했다. 주로 남베트남군과 전투를 벌인 쩐반타는 1986년 중위로 예편했다. 사진은 1975년 해방 뒤 호이안에서 해방군 동지들과 함께. 앞줄 왼쪽 두 번째가 쩐반타. 쩐반타 제공

열다섯이던 1972년 입산해 베트콩 유격군으로 활동한 쩐반타는 1973년 1월 파리평화회담 이후 남베트남 임시혁명정부 해방군으로 꽝남 지역에서 활동했다. 주로 남베트남군과 전투를 벌인 쩐반타는 1986년 중위로 예편했다. 사진은 1975년 해방 뒤 호이안에서 해방군 동지들과 함께. 앞줄 왼쪽 두 번째가 쩐반타. 쩐반타 제공

초가로 이은 집들은 대부분 불에 탔다. 주검을 수습할 공간이 없었다. 1번 국도에 있는 사당 앞으로 옮기기로 했다. 나를 도구가 없었다. 음식 말리는 둥근 채반에 주검을 올렸다. 사당 앞에 빈집이 하나 있었지만, 주검을 다 보관하기엔 좁았다. 몇 구를 제외하고는 죄다 바깥에 놓아야 하는 운명이었다. 소식을 듣고 사당 앞에 디엔반현 현장이 도착했다. 흥분한 마을 주민들이 삿대질을 하며 항의의 목소리를 높였다. 대참사가 벌어질 때 관리들은 도대체 뭐했느냐는 질책이었다. 주검을 담을 관도 없었다. 인민위원회에서 관 몇십 짝을 가져왔지만 태부족이었다. 주검을 묻어줄 사람도 없었다. 장례를 어떻게 치러야 할지 막막했다.

2월12일 당일 퐁니·퐁넛촌에 들어갔던 해병 제2여단 1대대 1중대 병력은 그날 밤 마을로부터 그리 멀지 않은 곳 노천에서 밤을 새웠다. 1중대 1소대장 최영언 중위는 무언가 심상치 않은 사태가 발생했음을 직감했다. 그는 한국군 해병을 노린 저격이 있은 뒤 퐁니촌으로 가장 먼저 들어가 민간인들을 뒤 소대 쪽으로 후송한 책임자였다. 콩 볶는 듯한 총소리를 들은 건 마을 끝에 당도했을 때였다. 누구 짓인가. 2소대인가? 3소대인가? 깊게 생각할 여지는 없었다. 계속 임무가 주어졌다. 다음날인 2월13일 아침 7시50분부터 출동이었다. 전날 정찰했던 1번 국도를 남쪽에서 북쪽 방향으로 다시 밟았다. 미 공병대와 협업해 서쪽 교량 보수작업을 엄호하기 위해 가는 길이었다. 퐁니촌 근처 국도변에 수십 명의 주민들이 보였다. 도로 맞은편 쪽이었다. 주민들이 이쪽을 바라보았다. 저격이 날아올지도 몰랐다. 소대원들에게 경계를 강화할 것을 지시했다. 앞으로 나아갔다. 가까이서 보니 서 있는 주민들 옆으로 누워 있는 사람 형체가 보였다. 더 가까이 가자 희끄무레하던 그것은 또렷하게 드러났다. 주검이었다. 최영언 중위의 머릿속이 빠르게 돌아갔다. ‘아, 어제 뒤에서 총소리가 났는데, 그 희생자들이구나.’ 그러고 보니 마을 주민들의 눈초리엔 원망이 서렸다. 빠르게 이곳을 빠져나가야 했다. 주민들 무리 속엔 응웬수도 있었다. 그날 아침, 베트남 주민 응웬수와 한국군 해병대 소대장 최영언의 눈빛이 부딪쳤는지도 모른다.

소년, 유격대를 자원하다

쩐반타의 아버지도 주검을 수습하는 자리에 있었다. 남베트남 군인들은 어린 쩐반타를 안전한 곳으로 옮겨 식사를 챙겨주고 보살펴줬다. 고마움을 느꼈지만, 마음속으로 남베트남 군인은 되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어머니와 여동생을 죽인 미군과 한통속인 남베트남 군대였다. 자신의 집 동굴에 수류탄을 투척하고 총을 쏜 한국군과 연합한 남베트남 군대였다. 원수를 갚아야 했다. 4년 뒤, 열다섯이 되던 1972년. 그는 유격대를 자원했다. 산으로 들어갔다.

토요판 에디터 k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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