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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근식] 세션 기타는 내게 맡겨라!

등록 2003-10-30 00:00 수정 2020-05-03 04:23

<font size="2" color="663300">1970년대 스튜디오 세션 도맡은 이장희의 분신… 영화음악에도 이름 남기며 광고인으로 맹활약</font>

음악인을 다루는 이 연재물에 ‘유명한 스타는 등장하지 않고 잘 알려지지 않은 사람만 나오는가’라는 의문을 품고 있는 사람은 연재물의 제목이 ‘악사열전’이지 ‘가수열전’이 아닌 것에 주의하기 바란다. 악사(樂士)란 음악인(音樂人)의 속어다. 곧, 화려한 조명을 받는 가수도, 그렇다고 수입이 짭짤한 작곡가도 아니고 뒤에서 묵묵히 맡은 일을 수행하는 연주인이다.

짧은 활동에도 대중음악에 깊은 영향

가수나 작곡가 가운데 어느 쪽에도 이름을 올리지 않았지만 3~4년의 짧은 활동 기간에 강근식이 한국 대중음악에 미친 영향은 지대하다. 도대체 그가 누구기에? 1973년을 상징하는 이장희의 노래 ‘그건 너’와 1975년을 상징하는 송창식의 노래 ‘왜 불러’에서의 기타 소리가 강근식의 것이라고 말하면 ‘지대한 영향력’에 대해 동의할 것이다. 곧, 그는 한국 대중음악 음반을 ‘들을 만한 것’으로 만드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운 존재다. 그것도 그때그때 불려 가서 기타를 쳐주고 오는 세션맨이 아니라 탄탄한 팀워크를 갖춘 스튜디오 밴드(‘동방의 빛’)의 수장이었다.

강근식의 이름이 등장하는 최초의 음반은 양희은의 (KLS-40, 1972)일 것이다. 양희은이 적은 깨알같은 글씨 가운데 “기타를 연주해준 군인 아저씨 강근식 兄”이라고 표현된 인물이 바로 그다. 지난번 보았던 정성조, 그리고 다음에 볼 안건마와 더불어 강근식은 1970년대 청년문화와 연관된 대중음악의 ‘젊은 명인’이었다.

‘군인 아저씨’ 이전에 그는 무슨 활동을 했을까. 휘문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홍익대학교 도예과에 입학한 뒤 2학년 때부터 5인조 ‘캄보 밴드’(combo band: 3~4명의 연주자로 이뤄진 소규모 밴드)인 홍익 캄보를 결성해 활동했다는 기록이 있다. 밴드에서 음악을 연주하는 길이 ‘미 8군 무대’ 외에는 마땅치 않던 시절 이례적으로 대학교 캠퍼스를 무대로 활동한 것이다. 그 당시는 음악을 제대로 한다면 ‘재즈’를 한다고 생각했던 무렵이었으므로 강근식 역시 조지 쉐링 퀸텟(George Shearing Quintet) 스타일의 음악을 주로 연주했다. 그렇지만 그가 가장 좋아했던 음악은 컨트리 기타리스트 쳇 앳킨스(Chet Atkins)의 연주였다. 홍익 캄보는 TBC(동양방송)에서 주최한 ‘전국 남녀대학생 재즈 페스티벌’에서 2년 연속 1위를 차지하는 등 캠퍼스 아마추어 그룹으로는 드물게 실력 있는 존재로 명성을 쌓았다.

그리고 이장희와의 운명적 만남이 있었다. 명동의 생음악 살롱 뉴 멕시코에서 맺어진 둘의 인연은 1969년께 ‘이장희와 강근식’이라는 통기타 듀엣 활동으로 이어졌다. 사이먼 앤 가펑클의 영향을 받아 트윈 폴리오(송창식과 윤형주), 투 에이스(오승근과 홍순백), 도비두(김민기와 김영세) 등 대학물 먹은 젊은이들 사이에서 남성 듀엣이 전성기를 이루던 시대였다. 불행히도 강근식의 입대로 듀엣 활동은 단명했다. 다행인 것은 군에 입대한 뒤에도 문선대에서 악사 생활을 이어갈 수 있었던 것. 앞서 양희은의 음반에 연주인으로 참여할 수 있었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

포크 음악의 전설에 그의 연주가 있다

제대 이후 그는 한국 음반업계의 전설인 오리엔트 프로덕션의 나현구 사장(일명 ‘나 사장’)을 만나서 서울 뚝섬과 역촌동의 스튜디오에서 ‘포크 음악’의 무수한 명반들을 만들어 냈다. 조동진(리듬 기타), 조원익(베이스), 이호준(키보드), 배수연(드럼, 뒤에 유영수로 교체)으로 이루어진 ‘동방의 빛’은 탄탄한 팀워크를 이루어 포크 가수의 수많은 음반들을 양산했다. 이장희, 송창식, 김세환, 윤형주 등 ‘스타’가 된 포크 가수들뿐만 아니라 양병집, 4월과 5월, 현경과 영애 등 ‘컬트’의 대상이 된 포크 가수들의 음반 제작에도 관여했다.

컨트리 기타 특유의 클린 톤과 더불어 퍼즈(fuzz)와 와와(wah wah) 등의 첨단 이펙트 기기를 이용한 강근식의 기타 사운드는 ‘오리엔트 사운드’의 핵심이었다(일렉트릭 피아노와 미니 무그 등 건반악기를 통해 전자 음향을 실험한 이호준의 연주에 대해서는 나중에 다시 다룰 것이다. 참고로 이호준은 1980년대 조용필의 밴드인 ‘위대한 탄생’에서 활동한 바로 그 인물이다). 강근식의 기타 연주는 노래의 반주에 머물지 않고 다양한 선율과 리듬을 만들어 내면서 그 자체 독자적인 감정 표현 수단이 되었다. ‘그건 너’에서 이장희가 “그건 너!”하고 소리친 다음 “띠리리 디 띠리리 디”하는 멜로디 라인이나 ‘왜 불러’에서 송창식이 “왜애 불러” 하고 소리친 뒤 “짱”하고 터지는 굉음은 수많은 예들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동방의 빛의 명연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것은 과 의 사운드트랙 앨범이다. 은 이장희가 부른 ‘한 소녀가 울고 있네’와 ‘한 잔의 추억’, 은 송창식의 ‘왜 불러’와 ‘고래사냥’을 앞세워 각각 1974년과 1975년 극장가를 석권하였다. 음악과 영상이 서로 상승작용을 일으키는 시너지 효과를 발휘했음은 두 말하면 잔소리고 안 봐도 비디오다. 자신이 직접 작곡도 담당한 의 사운드트랙(1981)에서는 유일하게 자신의 노래를 남긴 일도 있다.

그렇지만 강근식 역시 1975년 12월의 대마초 파동으로 크나큰 곤욕을 치렀고, 그 뒤 실질적으로 대중음악계와 거리를 두어야 했다. 그 대신 그는 ‘CM송’을 제작하는 ‘강 프로’(강 프로덕션)를 직접 경영해 수많은 광고음악을 제작했다. 부라보콘, 바밤바, 칠성사이다, 조이너스, 해태껌 등이 그의 대표적 작품이다. 대마초 파동으로 인해 우리는 한 명의 음악인을 잃고 광고인 한 명을 얻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강 프로’는 1970년대 말~1980년대 초 ‘언더그라운드 음악인’들의 아지트 구실을 수행했다. 한때 조동진과 최성원이 강 프로에서 ‘직원’이나 ‘기사’로 근무했고 뒤에는 이영재와 강인원도 그랬다. 그러다가 가끔 동료와 후배 음악인들의 음반에 ‘우정출연’했다. 어니언스 출신의 이수영, 뒤늦게 솔로로 데뷔한 조동진, 이장희의 동생인 이승희의 음반 등 1979~1980년무렵에 발표된 음반들이 그것이다. 아, 거의 알려지지 않은 전인권의 데뷔 음반의 한 면에서 편곡과 연주를 맡은 일도 있다. 1981년 숭의음악당에서 열린 조동진의 콘서트 무대에 오른 것이 마지막 공연이었다.

귀에 익은 ‘CM송’… 그가 다시 돌아온다

1980년대와 1990년대 내내 그는 광고인으로 열심히 살아갔고, 가끔 영화음악에도 손을 댔다. 그의 평생의 지음(知音)인 이장희는 1980년 이런저런 일로 미국으로 쫓기듯 이민을 가서 그곳에서 방송인으로 성공을 거두었다. 음악인이어야 했지만 광고인과 방송인이라는 낯선 삶을 살아간 두 사람이 다시 만나서 평생의 업적을 정리하는 작품을 만들어내기를 바랄 뿐이다. 그런 바람이 불원간 실현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최근 만난 강근식은 “광고회사는 정리하고 새로운 음악을 구상 중”이라고 말했다. 나처럼 그의 기타 소리와 더불어 10대의 성장기를 보낸 사람으로서 이보다 더 반가운 말은 없다.

신현준 | 대중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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