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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동진2] ‘조동진 사단’엔 세월이 머무네

등록 2004-02-12 15:00 수정 2020-05-02 19:23

언더그라운드 음악 대부에서 은둔자 시인으로… 새로운 음악의 흐름 소화하며 언제나 그 자리에

신현준/ 대중음악 평론가

1980년 상처 입은 사람들을 조용히 위무한 노래 하나가 발표되었다. 라는 조동진의 두 번째이자 최고의 히트곡이었다. ‘나뭇잎’과 ‘가로등’과 ‘너의 얼굴’과 ‘지붕들’과 ‘하늘’과 ‘사람들 물결’이 등장하면서 땅에서 하늘로, 하늘에서 땅으로 시선이 교차하는 이 곡은 시적이고 회화적인 이미지를 동반하면서 1980년의 복잡한 정서를 적확하게 묘사한 작품이다. 늘 정치적으로 초연했던 이 곡의 주인공이 의도한 것은 아니라고 해도.

상처 입은 영혼에 한줄기 햇살을…

그 뒤로 그는 의도하지 않게 ‘언더그라운드 음악의 대부’라는 호칭을 얻게 되었다. 방송에 나가 아부하지 않으면서 뜸하게 음반을 발표하고 콘서트만 열면서도 음악인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은 그때까지 누구도 개척하지 못한 길이었다. 1981년 10월 숭의음악당, 1986년 5월 미리내극장에서의 ‘조동진 콘서트’는 이후 소극장 라이브 공연의 붐을 이루는 기폭제였다. 그 전부터 이미 ‘조동진의 집’은 최성원·전인권·이영재·이승희·하덕규·함춘호·허성욱·이병우 등이 들락날락하는 아지트가 되었다. 물론 조동진의 가장 가까운 후배는 그의 친동생 조동익(1960~)이었다. 조동진의 2집에 수록된 의 작곡자이자 1980년대 중반 이병우와 함께 듀엣 ‘어떤날’을 결성해 활동한 바로 그 조동익이다.

광화문에서 음반소매상을 경영하던 김영이 음반 제작에 뛰어들면서 조동진 사단의 일원들은 김영의 동아기획에서 음반을 발표하기 시작했고, 이때부터 ‘조동진 사단’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1985년 들국화의 음반이 대박을 터뜨리고 뒤에는 김현식·한영애·신촌블루스·봄여름가을겨울·푸른하늘까지 합류하면서 동아기획은 ‘1980년대 언더그라운드 음악’의 본산이 된다. 이 이야기는 꽤 복잡하고 다양하니 다른 인물들을 다룰 때 하도록 하자. 이 모든 이야기의 신호탄이 이 수록된 조동진의 세 번째 음반(1985)이었다는 사실은 굳이 말할 필요도 없다.

그렇지만 이 무렵 조동진의 이전 음반들이 여러 음반사에서 어지럽게 발표되었고 편집음반들도 시중에 나뒹굴었다. 비즈니스를 맡은 사람이 계약관계를 매끄럽게 하지 못한 결과였다. 조동진이 자신의 권리를 찾는 방식은 1집과 2집 음반을 다시 녹음하는 것이었고, 1986년에 ‘재녹음 음반’이 발표되었다. 이 음반부터 조동진의 음악을 연주하는 음악인들은 강근식·조원익·이호준 등의 베테랑에서 이병우·조동익·김광민 등의 (당시로서는) 젊은 음악인들로 대체되기 시작했다. 한 음악인이 세대를 이어가면서 하나의 계보를 만든 드문 경우였다.

동아기획이 주류에 진입한 뒤 조동진은 자기 발로 서는 작업을 추진했다. 1980년대 후반 조원익이 문예부장으로 근무하던 서울음반을 통해 자신과 후배들의 음반을 발표했지만, 1992년에는 음반산업에 진출한 한 대기업의 투자를 받아 전문 프로덕션인 ‘하나음악’을 탄생시켰다. 조원익이 비즈니스를 전담하고 ‘사단장’ 조동진과 ‘야전사령관’ 조동익의 휘하에 장필순·한동준·권혁진·이소라·박용준·고찬용·조규찬·신진 등이 모여들었고, 이들 가운데 몇몇은 엉클·더 클래식·낯선 사람들 등의 그룹으로 활동하면서 몇몇 히트곡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이들의 면면에서 확인할 수 있듯 1989년부터 개최된 ‘유재하 음악경연대회’는 조동진 사단과 하나음악의 식구들을 재생산하는 중요한 행사가 되었다.

상업성 잃고 변방으로 밀려날지라도

그렇지만 한국에서 방송에 의존하지 않는 음악인들의 설 땅은 넓지 않았고, 시간이 가면서 하나음악은 재정적 어려움에 빠진다. 1990년대 이후 한국 대중음악계의 판세가 어떻게 돌아갔는지 안다면 그 이유를 추측하기는 어렵지 않다. 결국 하나음악은 1995년께 일단 해산되었다가 1997년 서초동에 스튜디오를 마련하여 다시 모였지만 몇년 뒤 합정동으로, 그 뒤에는 다시 일산으로 이사하면서 중심부에서 멀어졌다.

조동진 (아세아, ALS-1000, 1983) 조동진 (동아기획/태광음반, VIP-20015, 1985) 조동진 (서울음반, spdr-231, 1990) 조동진 (킹 레코드, KSC-6033 SA, 1996) 조동진 (신나라뮤직, KSC-A0002, 2000)

그사이 조동진의 음악은 더 느려지고 더 우울해졌다. 4집(1990)과 5집(1996)에는 한번만 들어도 귀에 착 감기는 ‘히트곡’은 없었지만, 들으면 들을수록 슬프도록 아름다운 곡들로 채워졌다. 또한 변칙 조율을 이용해 만들어낸 기타 연주는 그 자체로 서정적이었다. 또한 후배들과의 일상적 교류를 통해 ‘퓨전 재즈’나 ‘모던 록’ 등 새로운 음악적 흐름도 능히 자기 것으로 소화해내고 있다.

이렇게 한자리에 머물러 있는 것 같으면서도 늘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음악인의 섬세한 노력에 대한 반응은 어떠했을까. 1995년 이후 조동진이 더 이상 새로운 정규 음반을 발표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 간접적인 답변이 될 것이다. 그래서 지난 10년 동안 그의 공적 활동으로는 1997년 세종문화회관에서의 합동공연, 2000년 예술의전당에서의 공연, 그리고 지난 1월 말 LG아트센터에서 개최한 공연 등이 전부였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그사이에도 그와 하나음악 후배들의 재정적 형편은 나아지지 않았다.

유혹에 흔들리지 않는 대중음악계 장인

그래서인지 최근 그의 모습은 저 멀리 아득한 곳에서 은둔하는 가난한 시인 같기만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니 그 때문인지 어쩌다가 무대에 오른 그의 모습은 그 나잇대의 다른 사람들이 발휘하지 못하는 ‘아우라’로 가득하다. 이는 이런저런 유혹에 흔들리지 않고(속칭 ‘삐딱선’을 타지 않고) 자신의 길을 올곧게 걸어온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것이다. 후배 연주인들과 함께 들려주는 음향도 오랫동안 공동체를 이루어 음악 세계를 가꾼 집단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다(나는 이 점이 그가 셰그린이라는 ‘커버 밴드’와 동방의 빛이라는 ‘세션 밴드’를 거친 것과 무관치 않다고 생각한다).

그가 마음 편히 노후를 보낼 수 있을까.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은 그뿐만 아니라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걸어온 사람들을 이 사회가 어떻게 대우하는가, 라는 질문에 대한 답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물론 이런 대우와 무관하게 조동진은 특유의 ‘느리지만 진지한’ 행보를 계속할 것이다. 그는 ‘언제나 그 자리에’ 있는 듯하지만, ‘아침 기차’를 타고 ‘바다’로 흘러가서 ‘작은 배’를 타고 ‘항해’하는 등 부단히 움직이고 있었으니까….

P.S. 하나음악은 2003년 옴니버스 음반 을 발표한 데 이어 올해에는 재즈 연주그룹 ‘더 버드’(The Bird)와 모던 록 싱어송라이터 ‘이다오’의 독집을 준비하고 있다. 이 음반들을 포함하여 하나음악에서 제작한 모든 음반에서 조동진은 프로듀서를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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