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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탁] 한국적 록의 씨앗을 뿌리다

등록 2003-08-13 15:00 수정 2020-05-02 19:23

그룹사운드 시대 열어 스타 연주인으로 활약… 특유의 고집으로 외국 모방의 한계 뛰어넘어

록 음악인에 대한 가장 선명한 이미지는 ‘기타 연주자이자 밴드(그룹)의 리더’인 인물이다. 작곡자를 겸하는 경우라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그 점에서 인천 출신의 김홍탁(59)은 한국 록 음악인의 선구자이다. 단지 선구자일 뿐만 아니라 한국 록 음악의 초기 형태를 통칭하는 ‘그룹사운드’ 시대에 스타 연주인의 지위를 누린 인물이다. 조용필이 김홍탁을 “한국의 넘버 원 기타리스트”라고 평한 것이 괜한 말이 아닐 것이다.

록 음악인이 되기 이전, 즉 ‘록 음악인 지망생’의 이미지는 ‘기타에 미친 소년’일 것이다. 그 점에서 중학생 시절 친구집 위층에 살던 미군 병사에게 기타를 배울 수 있었던 것은 더없는 행운이었다. 곧이어 미국에 사는 친척의 도움으로 펜더 스트래토캐스터 기타와 트윈 리버브가 달린 앰프를 선물받은 일은 더 큰 행운일 것이다. ‘스트래토캐스터’나 ‘트윈 리버브’라는 용어는 일반인에게는 낯설지 몰라도 기타에 미쳐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입에 군침이 돌았던 기억이 있을 것이다.

고교생으로 미군클럽 등서 기타 연주

그는 일찌감치 ‘스타 연주인’의 길을 걸었다. 고등학교 무렵에도 인천 주변의 미군클럽에서 기타를 연주했지만 본격적으로 직업적 연주인이 된 것은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윤항기, 차중락, 차도균, 옥성빈과 함께 키보이스의 일원이 되면서부터다. 키보이스는 신중현의 애드 훠(Add 4)와 더불어 ‘한국 최초의 록밴드’라고 부를 만한 존재였다(누가 최초인지에 대해 궁금한 사람은 471호 참조!). 비록 초기의 시도였던 만큼 창작보다는 모방에 머물렀다고 해도 ‘연주는 악단이 하는 것이고, 노래는 가수가 하는 것’이라는 전통적 분업구조를 허물었다는 점은 누가 뭐래도 대단한 업적에 속한다. 키보이스는 미8군 무대에서는 ‘락 앤 키’(Lock and Key)라는 이름으로 객원가수들과 함께 ‘패키지 쇼’를 하고, 한국인을 상대로 하는 ‘일반 무대’에서는 키보이스라는 이름으로 ‘리싸이틀’을 하면서 1960년대 초·중반을 풍미했다.

요즘 말로 하면 키보이스는 ‘아이돌 그룹’이었다. 그렇지만 춤을 추면서 립싱크를 하는 요즘의 아이돌 그룹과 달리 연주와 노래에 모두 능한 멤버들로 구성되었다. 그래서 이들은 종종 ‘한국의 비틀스’라고 불렸다. 물론 비틀스와 달리 자작곡 중심으로 연주하지는 못했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차중락과 차도균이 솔로가수의 길을 걷는 등 키보이스의 원년 멤버가 하나둘 떠나면서 김홍탁도 그룹을 떠났고, 키보이스는 뒤에 전혀 다른 멤버들로 재결성되어 등을 히트시켰다. 물론 이 곡들도 자작곡은 아니었다. 김홍탁은 “키보이스는 그것으로 끝내는 것이 좋았을 것”이라고 말한다. “신중현 선배가 많은 자극이 되었다”는 고백도 이런 의미일 것이다.

1968년 초 한웅, 김용호, 유영춘, 조용남 등 당시의 신세대들이 김홍탁을 리더로 추대하여 그는 히화이브(He 5)라는 신예 그룹을 이끌게 된다. 히화이브는 1970년 서울시민회관(현 세종문화회관)에서 개최된 ‘보컬그룹 경연대회’에서 그랑프리를 차지하면서 당대 최고의 그룹으로 군림하게 된다. 멤버 변동 끝에 히식스(He 6)로 이름을 바꾼 뒤에도 ‘김홍탁의 그룹’은 “인기 정상을 달리는 여러분의 히식스”(히식스의 5집 음반에 표기된 문구다)라는 지위를 계속 누렸다.

싱어송라이터로 활약한 신세대의 리더

히식스의 주무대는 서울 명동의 오비스 캐빈과 동양방송(TBC) TV의 쇼 프로그램이었다. 오비스 캐빈은 ‘젊은이의 성지’라고 불리던 라이브 공연장(당시 용어로 ‘생음악 살롱’)의 대명사였고, TBC는 젊고 도회적인 방송의 대표적 매체였다(다름 아니라 서울과 부산밖에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1969년 라는 프로그램을 본 사람이라면 히화이브가 호스트로 나와서 연주하는 장면을 보았을 것이고, 그 뒤로도 1970년대 음악 프로그램의 대명사인 에서 오프닝과 엔딩을 담당하면서 연주하는 장면을 보았을 것이다.

히식스는 등 이른바 ‘초원 시리즈’의 히트곡을 남겼다. 그렇지만 그와 동시에 김홍탁은 김희갑, 정민섭, 김호 등 선배 작곡가의 곡을 받아서 연주하는 것을 탈피하여 직접 작곡을 시작했다. 그의 작품인 과 는 마치 당시의 스냅사진 같은 히트곡들이다. 또한 는 당시 히식스의 멤버였던 최헌이 1974~75년 그룹 ‘검은나비’에 들어가서 다시 한번 히트시킨 곡이기도 하다. 선우영아와 임성훈 등이 가수로 참여한 ‘김홍탁 작품집’도 이 시절 ‘작곡가 김홍탁’의 면모를 확인할 수 있는 자료다.

그렇지만 ‘기타리스트 김홍탁’의 진면목은 이런 가요들에서는 잘 표현되지 않는다. 오히려 같은 곡에서의 거칠고 무거운 기타 사운드를 들어보아야 한다. 하지만 이것도 어차피 외국 음악을 모방한 것 아닌가. 그렇지만 이라는 음반을 들어보면 이런 판단을 수정하게 된다. 이 음반에는 긴 길이를 가진 잼 세션 형식의 연주곡들이 들어 있고, 그 수준은 당시의 국제적 수준에 미달하지 않는다. 인기를 누리면서도 대중과 쉽게 타협하지 않으려는 음악인의 고집을 확인할 수 있다.
이렇게 마냥 잘나가는 것 같던 김홍탁은 1972년 갑자기 미국으로 떠난다(연예계 소식에 밝은 사람이라면 김홍탁의 후임이 가수 제이(J)의 아버지인 정희택이라는 사실을 알 것이다). 속내를 정확히 알 수는 없겠지만 ‘10월 유신’이 간접적 이유였던 것은 분명하다. 도미 뒤 김홍탁은 바보스 출신의 김선, 히화이브 출신의 한웅 등과 더불어 오리엔털 익스프레스(Oriental Express)라는 그룹을 결성하여 연주 경력을 이어가다 1980년 귀국한다. 귀국 뒤 그의 시도는 전성기 시절의 화려함과는 거리가 있다. ‘1960~70년대 그룹사운드’는 1980년대 대중문화계의 변화된 환경에 쉽게 적응하지 못했다.

유신시절 도미… 귀국 뒤 후학 길러내

중년의 한국인들에게 세월은 빨리 흘러가고 때로 병마도 찾아온다. 김홍탁도 예외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 와중에서도 그는 1997년 동숭동에 서울재즈아카데미를 창립한 뒤 그곳의 원장으로 취임하여 성공적인 비즈니스를 수행하고 있다. 그는 자신이 충분히 완성하지 못한 ‘창작 록음악’의 아쉬움을 후학들을 길러냄으로써 보상받으려고 하는 것 같다. 물론 그가 일선에서 물러나 교육만 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미 옛 동료들을 모아 2040이라는 그룹을 결성하여 두장의 음반을 발매한 바 있고, 데뷔 40주년인 올해 자신의 이름으로 나올 새 음반도 준비 중이다. 건강과 시간이 허락되길 바랄 뿐이다.
P.S. 키보이스의 데뷔 음반이 LP로 재발매된 데 이어 히화이브와 히식스 시기의 음반들, 그리고 김홍탁 작품집도 LP나 CD로 재발매될 예정이라고 한다.

신현준 | 대중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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