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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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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밥이 아니라 ‘금밥’이더라

‘흥선대원군’급 이탈리아인에게도 침투한 케이푸드 덕에 김치·라면 구하기 쉬워져
등록 2021-11-07 05:35 수정 2021-11-08 03:01
이탈리아 밀라노의 한식당에서 파는 불고기비 빔밥.

이탈리아 밀라노의 한식당에서 파는 불고기비 빔밥.

대학 시절 미국으로 연주 여행을 떠났다. “미국에 가면 먹을 게 천지인데 음식을 왜 싸가냐”는 나의 항변에도 이미 유럽에서 교환학생 경험이 있던 한 벗이 부득이 인스턴트 밥, 밑반찬과 컵라면 등을 챙겨주며 “가면 분명히 이게 도움이 될 거”라고 큰소리쳤다. 미국의 큰 공항 두어 곳을 거쳐 도착한, 그 흔하디흔한 중국음식점이나 아시안 상점도 없는 사막 같은 곳에서 이튿날 밤 고추참치를 얹은 흰쌀밥을 씹으며 고마운 벗에게 감사의 전자우편을 썼다. 고작 이틀 만에 목젖까지 차오른 느글느글함은 얼큰한 컵라면 국물과 함께 씻겨 내려갔다.

깍두기를 담그니 낫토가 되고 백설기는 흰 벽돌이 되고

그 뒤 몇 해가 흘러 미국에서의 기억은 희미해졌다. 이탈리아에 유학을 나올 때 대단한 용기와 각오로 꽉 찬 짐가방에 “한식이 그리우면 어떡하지?”라는 시시한 마음 따위는 한쪽도 내주지 않았다. 이탈리아 공항에 마중 나온 친구는 한국에서 갓 도착한 내 이민 가방에서 단 한 조각의 한국 음식도 나오지 않음에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사실 밀라노에는 나름 한식당과 한인 슈퍼마켓이 적게나마 있으니 ‘정 먹고 싶으면 사 먹으면 되잖아?’ ‘타국에서 살기로 결정했으면 감내해야 할 부분 아닌가?’라는 건방지기 짝이 없는 생각을 했더랬다.

어깨에 가득 차올랐던 패기는 초보 유학생이 겪는 크고 작은 고난에 바람이 빠져 내려오기 시작했다. 베갯잇을 적시는 눈물 양에 비례해 한국에 대한 그리움은 커졌다. 그것을 위로해주는 가장 빠른 길은 한국 음식이었다.

불과 몇 줄 앞에 쓴 ‘사 먹으면 되잖아?’는 주머니 가벼운 유학생에게는 안 통하는 소리다. 바쁠 때 후딱 사 먹던 김밥 한 줄은 당시 높았던 환율도 한몫해 2만원이 훌쩍 넘었다. 김밥이 아니라 ‘금밥’이더라.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고 곱게 자란 공주님, 왕자님 같은 아이들일지라도 소매를 걷어붙여 김치를 담그고 요리를 시작하게 된다. 한국에 있을 때 잘 배워올걸 하고 후회도 했다. 깍두기가 먹고 싶던 어느 겨울 늘씬 길쭉한 단무지용 무를 몇 개 사다가 깍두기를 담갔다. 실온에 내놔도 잘 익지 않기에 잠깐 라디에이터 위에 올려놓는 기함할 짓을 했다. 깍두기를 담갔는데 낫토가 됐다. 실이 죽죽 늘어지는, 신기하게 생긴 깍두기는 모두 버려야만 했다. 포슬포슬 백설기가 먹고 싶어서 쌀가루를 사다가 조몰락거려 밥솥에 넣어봤는데 달고 흰 벽돌이 만들어지는 바람에 그 또한 쓰레기통행이 됐다.

한인 타운이 형성된 곳에서 타향살이하는 친구들이 부럽기도 했다. 식료품점부터 식당까지 한국에서 먹을 수 있는 건 거의 다 조달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여러 해 전 유행한 꿀버터 과자나 최근엔 무려 명랑한 핫도그까지 먹을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입이 떡 벌어졌다. 가을이면 아기 머리통만 한 한국산 배까지 어렵지 않게 식탁에 올라오니 말이다.

자우어크라우트 찌개에 탈출한 영혼이 돌아오다

한식 재료를 구하기 쉽지 않은 곳에 살면 이 없으면 잇몸으로 대체되는 것이 생겨나기 시작한다. 특히 김치 못 담그는 나 같은 사람은 김치찌개를 먹기 참 어려웠다. 이런 나에게 유학 선배들이 가르쳐준 것은 이름하여 짝퉁 김치찌개, ‘자우어크라우트’ 찌개다. 독일식 시큼하게 절인 양배추 통조림을 양념해 끓이는 찌개다. 한 달 이상 고춧가루 비슷하게 생긴 것도 구경 못하고 살다가 처음 그것을 한술 떴을 때의 감동이 아직 생생하다. 거기에 다진 마늘까지 한 큰술 넣었는지 알싸함이 혈관을 타고 퍼지는데 비로소 동공의 초점이 맞기 시작하고 탈출했던 영혼이 제자리를 찾은 것 같았다.

그때의 기억이 너무나 강렬했기에, 갓 유학 나온 친구들이나 여행차 들른 지인이 한식을 그리워할 때 자신 있게 자우어크라우트 찌개를 대령했으나 반응이 영 시원찮았다. ‘녀석들, 아직 배가 덜 고팠군’ 하는 꼰대 같은 생각도 스쳤으나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10년 전쯤 전세계가 이미 한류 열풍을 소리치고 있었으나 이탈리아에선 그 사실이 크게 피부로 와닿지 않았다. 하지만 최근 2~3년 사이는 굉장하다. 학생 시절 큰맘 먹고 간 한식당들(한인보다 조선족이 운영하는 한식당이 많았다)에는 한국인을 비롯해 중국인 등 동양인이 대부분이었으나, 요즘은 나 홀로 동양인이고 전부 이탈리아인으로 한식당이 가득 찬 진풍경도 흔히 펼쳐진다.

케이푸드(K-Food)는 이미 전세계 대유행 중 아닌가, 그게 뭐 대수냐고 할 수 있겠지만, 음식에서 보수적이기로는 흥선대원군 둘째가라는 이탈리아인의 입맛에 이 정도로 침투된 것은 상당한 진전이다. 그래서 나한테 무슨 이득이 있겠냐고? 몹시 있다. 일단은 김치와 라면 구하기가 쉬워졌다. 한인 식료품점은 드물지만, 밀라노에 등록된 인구만 따져도 한인 수보다 백배 가까이 많은 중국인 수만큼 그들이 운영하는 상점은 골목 곳곳에 포진해 있다.

매운 라면은 기본이고 아주 매운 불타는 닭볶음면까지 쉽게 살 수 있는 건 감동이었다. 한인 식료품점에 들어오는 한식 종류는 더욱 다양해져 가끔 방문하면 장난감가게에 들어간 어린이만큼이나 신이 난다. 냉동떡도 다양한 종류로 입고되기에 더는 희고 단 벽돌을 만들어낼 일이 없다. 한식 접근성이 이리 좋아진 덕에 빨갛고 화끈한 음식에 대한 갈망은 이전만 못한 듯하다.

3년 반 만에 한국행 비행기 티켓을 손에 쥐었을 때 설레는 마음으로 메모장을 켜고 ‘먹리스트’를 작성했다. 미식의 천국이라는 나라에 살면서도 채워지지 않던 만족감을 채워줄 절호의 기회였다. 15년간 군만두만 먹다가 갓 세상에 나온 올드보이처럼 산낙지부터 온갖 날생선을 해치우며 목록을 지워나갔다. 아무리 한식 접근성이 좋아졌다고는 하나 본토에서만 먹을 수 있는 것이 많으니 말이다. 위가 하나뿐이고 하루에 세끼만 먹는 것이 아쉬운 지경이었다.

한식 고집하던 친구들, 파스타가 그리워

함께 유학 생활을 하다가 한국으로 돌아간 친구들을 만나 회포도 푼다. 그들은 이탈리아 음식을 그리워하더라. 유학 시절에는 죽어라고 한식만 고집하던 친구들도 한국에 와서는 이런 넋두리를 한다. “내가 그 지긋지긋하던 피자, 파스타를 그리워할 줄이야.” “여기도 다~ 있는데, 그때 그 맛이 아니야!” “거기 있을 때 프로슈토(이탈리아식 생햄)랑 와인 많이 먹어둬라.” 아마도 가장 맛있는 것은 그리움의 맛인가보다.

한편 ‘먹리스트’와 함께한 폭주 기관차 같은 식생활 일주일 만에 내 위장은 탈이 나서 며칠 굶어야 했다. 빨빨거리며 온갖 산해진미를 찾아다녔을 때보다 오랫동안 공허했던 마음을 묵직하게 채워준 음식은 앓고 난 뒤 엄마가 끓여준 흰죽과 맑은 된장국이었다.

밀라노(이탈리아)=글·사진 박사라 스칼라극장 성악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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