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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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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형성’을 넘어 ‘전형’으로

우리는 이런 르포를 원한다…

르포가 가진 ‘치열함’을 실험하는 장이 되길
등록 2019-08-13 16:22 수정 2020-05-02 19:29
참여관찰과 인터뷰를 포함한 상당수의 글은 ‘르포의 싹’을 갖고 있다. 시각을 달리해서 본 한 대형 교회의 모습. 한겨레 이정아 기자

참여관찰과 인터뷰를 포함한 상당수의 글은 ‘르포의 싹’을 갖고 있다. 시각을 달리해서 본 한 대형 교회의 모습. 한겨레 이정아 기자

이 르포작가 지원 공모제를 시작합니다. 은 최근 ‘공장이 떠난 도시’ 군산 편과 울산 동구 편을 통해 원고지 180장, 200장에 이르는 긴 호흡의 ‘르포 기사’를 선보였습니다. 포털 뉴스 제목만으로 세상사를 알아가는 시대에 은 긴 기사를 찾아나섭니다. 선악이 불명확한 시대이기 때문입니다. 쉽게 타올랐다 사라지고 마는 일들의 내막을 자세하게 들여다봐야 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을 깊이, 사건을 천천히 바라보는 눈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기자 시선의 한계도 절감했습니다. 김순천 작가는 10여 년 전에 이런 말을 했습니다. “언론사 간의 경쟁이나 시간의 제약, 취재기자들의 인식상의 한계로 대중매체가 전달하는 정보와 이미지는 서로 동질화되거나 현실의 본모습에 깊게 다가가기 어렵다.” 이런 상황은 세계화의 급속한 진전과 함께 가속화했습니다. 기자의 직업적 시선을 벗어난, 좀더 가난한, 좀더 사소한 풍경을 포착할 눈을 찾습니다.
무엇보다 은 르포를 쓰고 싶지만 생활 형편이 어려운 이들의 곤경을 덜어주는 방법을 고민했습니다. 지원 공모제는 ‘지속가능한’ 석 달간 지원금을 지급하는 방식입니다. 나아가 출판사와 연계해 책 출간으로 이어지는 선순환을 공모제 속에 마련했습니다. 3개월의 지원금은 액수는 적지만 당신이 시작하고 꿈을 꿀 숨통을 틔워주는 계기가 되리라고 확신합니다.
완성작은 500장 이상의 원고량을 목표로 합니다. 새로운 가치관과 시선을 담은, 발로 뛰어 숨 막히는 현장을 담은, 더불어 세계에 존재한 모든 르포의 기준을 무너뜨리는 기획을 담아 보내주십시오. 르포작가 지원 공모제는 10월에 공모할 픽션 중심 손바닥문학상의 다른 한 축으로, 의 ‘발바닥’을 담당하게 될 것입니다. 역량 있는 분들의 많은 지원 바랍니다.

모든 글은 기본으로 갖춰야 할 요건이 있다. 기사는 팩트를, 시는 직관을, 칼럼은 통찰을, 소설은 이야기를 갖춰야 한다. 이 핵심 요소를 중심으로 방계 요소들이 모여 글의 뼈대를 이룬다. 핵심과 방계의 요소들이 잘 짜인 글을 다른 말로 ‘전형’(典型)이라고도 한다.

‘고발’에서 ‘공감’

초심자들은 전형에 도달하는 방법을 배운다. 모범 답안을 스스로 써낼 수 있을 때 전문가가 된다. 그러나 전형에 매달리는 것은 형식주의적 사고이기도 하다. 정해진 트랙을 벗어나지 않고 결승선에 이르는 것이다. 이 트랙의 감각에 익숙해지면 피로를 느끼고 ‘너머’를 사유하는 힘을 잃어버린다. 다르게 보고 느끼고, 더 깊이 파거나 날아오르고 싶을 때 우리 안의 전형은 갈등으로 들끓는다.

한국 사회에서 ‘르포’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고발’이다. 사회의 치부, 감춰진 것, 나쁜 세력의 실체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게 바로 고발이다. 텔레비전 뉴스에서 ‘르포’라는 단어를 자주 쓰기도 했고, 일본 잡지 연재물 형태의 탐정 르포, 사건 르포가 영향을 미친 측면도 커 보인다. 르포에 대한 이런 인식은 칼날이 되는 팩트를 집요하게 추구하는 저널리즘을 만들어왔다. 한국을 대표하는 몇몇 시사지의 종교단체나 대형 비리 추적 기사가 르포의 대명사로 기억되고 있다. 이런 식의 고발 르포는 사회적 파급력이 대단한데 보도 이후 검경이 움직이기도 하고 몇 달 동안 사회 전체가 이 일로 들썩이기도 한다. 이는 ‘자본’과 ‘권력’이라는 성역을 흔들고, 나아가 힘 있는 자의 약탈로부터 사회를 지켜내는 전투적 저널리즘으로서 자리매김해왔다.

최근 들어 르포 저널리즘은 그 범위를 ‘고발’에서 ‘공감’으로 옮겨가고 있다. 사회 전반적으로 인권 감수성이 높아지면서 우리 안의 타자나 소수자의 삶의 실태를 보고하는 르포가 기획되는 것이다. 외국인 노동자와 파견직 노동자, 성소수자, 노숙자, 원양어선 선원, 희소병 환자, 홀몸노인 등의 몸과 마음을 살핌으로써 사회를 보는 시야를 확장해놓는다. ‘고발 르포’에서 리포터와 취재 대상은 명확한 대결 구도를 형성하며 선과 악의 한판 대결이라는 플롯(구성)으로 박진감을 만들어낸다. 반대로 ‘공감 르포’에서는 리포터가 ‘가진 자’의 일원으로서 ‘못 가진 자’인 취재 대상과 거리를 좁히는 데 정성을 쏟는다.

문제는 이런 방식이 너무 전형적이라는 것이다. 전형성은 앞서 말했듯 피로감을 자아내고 ‘지당한’ 결론에 이르기 쉽다. 가뜩이나 대중과 접촉면이 적은 소재라 르포로서 전통적인 미덕과 혁신적인 관점이 더더욱 필요하지만 리포터라는 명확한 정체성, 제한된 시간과 편폭, 취재 비용, 전문성을 쌓지 못하고 역량을 분산시키는 환경으로 인해 쉽지 않다.

자아인가 타자인가

그래서인지 모르겠지만, 최근 들어 르포는 저널리즘 영역을 벗어나 생산 주체가 다양화하고 있다. 몇 년 전 대리기사와 대학강사의 이중생활 체험을 담은 (김민섭 지음)가 큰 반향을 얻었고, 소설가가 공모제의 문제점을 통해 한국 사회를 분석한 (장강명 지음)도 최근 반응을 얻고 있다. 일종의 르포라고 할 수 있는 이런 책들을 통해 독자는 기존 저널리즘에서 보지 못했던 글쓰기로 새로운 감성을 획득한다. 문제는 이런 책들이 전체의 0.001%도 안 되는 극소수라는 점이다.

출판사엔 놀라울 정도로 하루에도 십수 편씩 원고가 들어온다. 확실히 쓰기의 주체들이 부상하긴 했다. 이들 투고를 유형별로 나눠보면 50%가 경제·실용·자기계발에 속한다. 명확한 목표에 따라 대중적 판매를 위해 쓰인 글들이다. 그다음 10%가 자서전인데 글쓴이의 연령대가 높고 삶을 반추하거나 자기 자랑이 대부분이다. 그다음 10%는 소소한 일상을 담은 에세이, 여행서다. 그다음 10%는 소설이다. 역사소설, 기업소설, 판타지소설, 철학소설 등등. 나머지 10%는 외국책 번역으로 어려운 학술서가 많다.

이들 투고를 ‘자아’와 ‘타자’로 구분해보는 방법도 있다. 즉, 표현하려는 것이 ‘자아’인가 ‘타자’인가, 자아의 이익에 복무하는가 타자의 이익에 복무하는가로 살펴볼 때 80%가 전자에 속하는 듯하다. 나머지 20% 중에서도 ‘르포’나 ‘보고문학’에 속하는 원고는 거의 없고 한국 사회에 필요한 외국책의 번역이 대부분을 이룬다.

그렇게 볼 때 아직 한국 사회에서 ‘르포’는 자발성을 끌어내는 장르가 아님을 알 수 있다. 공적인 목적에 자발적으로 복무할 여유가 없어서이기도 하지만, 르포문학을 소화할 출판시장이 형성되지 않았다는 것도 이유다.

개인적으로 상당수 글이 ‘르포의 싹’을 감추고 있다고 생각한다. 요사이 글항아리에 들어온 원고 몇 편도 그랬다. 하나는 한국 대형 교회가 어떻게 서울이라는 도시를 형성했는지를 다루고 있다. 글쓴이가 오랜 시간 참여관찰과 인터뷰를 한 것이 바탕이 되었다. 다른 하나는 낙태를 경험한 여성을 위해 아이의 천도재를 지내주는 사찰을 다니며 여성들을 인터뷰한 구술사 책이다. 이 원고에서 화자는 낙태 여성의 1인칭 관점에서 주관을 섞어 글을 재구성했는데, 이는 팩트(사실)에 얽매이는 저널리즘에서는 쉽게 시도될 수 없는 파격이란 점에서 신선하게 다가왔다. 그렇지만 두 원고 모두 대학의 석·박사 논문이 기반이 되었다. 자본의 보상을 고려하지 않은 상태에서 중요한 사회문제를 다룰 여건이 갖춰졌던 셈이다.

리얼리즘 그리고 존재의 처연함

이들이 ‘르포’는 아니지만 르포라는 플롯에 충분히 실을 수 있는 소재와 주제다. 그래서 다시 ‘전형’의 중요성이 떠오른다. 르포라는 장르가 가진 치열함, 밑바닥의 리얼리즘, 극적인 전개, 강약 조절, 페르소나(가면을 쓴 인격) 활용, 궁극적으로는 날것의 삶이 그 존재의 처연함을 드러내 보일 수 있는 글쓴이의 문학적인 종합으로 그 싹을 이끌어주는 훈련이 필요한 것이다. 이번 과 오월의봄, 한겨레출판, 글항아리가 함께 시작하는 르포 공모제가 그런 치열한 실험의 장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은혜 글항아리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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