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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가 쌓이면 글은 자연스럽게 흘러나온다

‘공장이 떠난 도시’ 쓴 조윤영 기자가 ‘르포 기자’ 선배에게 묻다
등록 2019-09-03 02:43 수정 2020-05-02 19:29
현대중공업 작업복을 입고 배달 아르바이트를 하는노동자. 류우종 기자

현대중공업 작업복을 입고 배달 아르바이트를 하는노동자. 류우종 기자

최근 방준호 기자와 함께 제1269호 표지이야기 ‘공장이 떠난 도시’, 제1271호 표지이야기 ‘부서진 질서, 무너진 삶’에서 각각 원고지 180장, 200장에 이르는 긴 호흡의 르포 방식의 기사를 썼습니다. 하지만 ‘나는 르포를 이렇게 써왔다’고 말하기에는 경력이 짧고 깊이도 얕습니다. 대신 르포작가 지원 공모제에 참여할, 르포를 시작하는 여러분께 르포를 시작했던 저와 방 기자의 경험과 저희보다 먼저 르포를 써왔던 전·현직 기자들의 이야기를 함께 풀어보려 합니다.

무엇에 대한 이야기를 쓸 것인가

‘부서진 질서, 무너진 삶’을 쓸 때 6주 동안 울산 동구에 내려가 취재했지만, 그 뒤 새로 기획안을 짜서 기사를 쓰는 데는 6주의 시간이 더 필요했습니다. ‘무엇에 대한 이야기를 쓸 것인가’라는 근본적인 물음에 스스로 답을 찾는 긴 시간이었습니다. 그만큼 제게 르포는 현재진행형 실험이었습니다. 기사의 주제를 미리 정하고 시간에 쫓겨 몇몇 전문가에게 전화를 걸거나 현장 취재를 하던 관성에서 벗어나 “미리 판단하지 말고, 직접 뛰어들어, 천천히”라는 류이근 편집장의 말을 찬찬히 곱씹어봤습니다.

이슈에 접근하는 입체적인 방식, 중편소설 분량의 단일 기사 등 내용과 형식을 고려하더라도 르포는 언론의 기존 기사와 다른 ‘비효율적’인 취재였습니다. 전북 군산에 내려간 방 기자 역시 평소라면 고려하지 않았을 몸짓, 어투, 표정을 묻고 살피느라 긴 취재 시간을 들였습니다. “동네 사람들과 술 먹고 놀러 다니느라 취재 시간을 허비하기도 했고 하릴없이 혼자 도시와 공단 골목골목을 유랑했던 밤도 숱해요. 그 사이사이 미처 생각하지도 못했던 이야기와 풍경이 엿보이면 곧장 기록하고 다른 생각들과 이어보며 긴 시간을 지냈죠.”(방 기자)

현지 취재를 하면서도 돌아서면 르포와 관련된 글쓰기 책들을 들여다보고 사전을 뒤적거렸습니다. “주관을 곁들이지 않고 사회 현실을 객관적으로 서술한 문학 또는 기록문학”이라는 한 줄의 사전적 설명만으로 르포를 이해하기도, 실전에 적용하기는 더욱 어려웠습니다. 풍경, 소리, 냄새, 촉감 등을 통해 현장을 명확하게 그려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종종 특정 장면을 너무 자세하게 묘사하다가 정작 취재원들이 느꼈을 정서적 경험을 쉬이 지나치기도 했습니다.

르포는 하나의 글쓰기 방식을 뛰어넘어 어떤 사안에 다가가는 태도였습니다. 소외된 이들을 톺아보는 취재와 사회에 대한 성찰을 통해 토요판과 등에서 다양한 형식과 주제의 기사와 르포, 소설을 써왔던 이문영 기자는 “짧은 기사로 전할 수 없는 이야기가 있다고 생각해요”라며 르포의 의미를 풀이하기도 했습니다. “단순히 ‘큰 사건’을 중심으로 의미의 우선순위를 판단하지 않으려는 태도이기도 해요. 주목할 만한 사건으로 대접받진 못해도 누군가의 삶에 무거운 의미를 지닐 수 있는 이야기들이 있잖아요.”(이 기자)

발품 팔수록 생동감 더해져

현장 취재를 마치고 초고의 문장들을 길어올릴 때는 문장과 문장 사이에 생긴 팩트(사실)의 빈틈을 상상력으로 메워 완성도를 높이고 싶다는 충동도 들었습니다. 하지만 결국 글의 밀도를 높이는 방법은 현장이었습니다. 등장인물을 짜깁기하고 사실과 관련된 정보를 함부로 다룰 수는 없었습니다. 대신 더 오래 취재하고 더 많은 사람을 만났습니다.

길게는 며칠, 짧게는 반나절씩 누군가의 삶과 일상을 쫓을수록 빈틈이 촘촘히 메워졌습니다. 욕심이 생기자 아침저녁으로 하루에 두 명씩 동행 취재를 하던 날들도 있었습니다. 카페에 마주 앉아 인터뷰하는 대신 취재원의 일상을 동행하게 해달라 청했습니다. 취재원이 많아지면서 전문가들의 말과 연구 논문의 통계 자료보다 더 구체적이고 생생한 평범한 노동자, 주민 개개인의 말들이 쌓여갔습니다. 그 안에서 더 많은 일화를 발굴하고 이야기 안에 뭔가 더 큰 뜻을 담아낼 갖가지 견해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글쓰기는 취재한 결과에서 자연스레 흘러나왔습니다. 현장이라고 항상 정답은 아닐 수 있습니다. 다만 발품을 팔수록 이야기는 재밌어졌고 지어낸 이야기가 아닌 실재하는 이야기로 생동감 있게 바뀌었습니다. “어떤 이슈와 상황을 최대한 구체적이고 생생하게 재구성하려 해요. 독자들이 현장에 있다고 느끼게 할 만큼 해당 사안에 최대한 깊게 녹아들죠. 중요한 팩트 위주 서술 속에서 빠져나가는 맥락과 정보를 최대한 촘촘히 길어내려는 고민이 에요.”(이 기자)

기자로 일하다 2017년 12월부터 실화를 소재로 한 웹소설 기획사인 한겨레 자회사 팩트스토리의 대표가 된 고나무씨는 르포를 시작한 여러분에게 책(마크 크레이머·웬디 콜 엮음, 최서현 옮김, 니먼재단 기획, 알렙 펴냄)와 (잭 하트 지음, 정세라 옮김, 유유 펴냄)를 권했습니다. 고 대표는 기자 시절 세 권의 전기, 르포를 펴낼 때 ‘미국식 르포 전기를 흉내 내겠다’라는 생각이 컸다고 합니다. “한국 신문이 허용하는 르포 주제와 형식이 좁다는 고민을 많이 했어요. 제 갈증을 채워준 건 주간지였고 미국과 일본 논픽션 등을 종종 참고했어요.”(고 대표)

“다음에 누굴 만나야 하나요?”

책 에서 베트남전쟁 보도로 퓰리처상을 받은 데이비드 핼버스탬 기자가 쓴 글을 인용하는 것으로 마지막을 갈음할까 합니다. “기자가 취재원에게 건네는 최고의 질문을 알려주겠다고 하면 학생들은 처음으로 귀를 쫑긋 세우고 받아 적을 준비를 한다. 잠시 뜸을 들였다가 말을 꺼낸다. ‘인터뷰 마지막에 항상 묻습니다. 다음에 누굴 만나야 하나요?’” 이는 르포를 시작하는 여러분이 르포작가 지원 공모제를 준비하면서 자주 던질 질문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조윤영 기자 jy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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