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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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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마장 신문팔이 낌

등록 2015-04-04 07:44 수정 2020-05-02 19:27

낌은 얼마 전 경마장에 취업했다. 주말마다 경마장 신문팔이를 시작한 것이다. 새벽에 경마장 내의 지점장에 가서 신문을 배급받고 마장이 시작되기 전 마권을 고민하는 고객들에게 경마신문을 파는 일이다. 아이스크림처럼 생긴 커다란 통에 신문을 담아 낌은 경기장 안팎을 돌아다니며 신문팔이를 한다. 경마신문은 지난주 하이라이트 경기 중계부터 경주마의 품종까지 말에 의한 말을 위한 말로 이루어진 정보신문이다. 말에게 돈과 승부를 걸고 욕망을 믿는 세상이 담겨 있다. 경마장에 오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신념이 하나 있다. 살다보니 사람보다 말이 더 믿을 만하다는 거다.

한겨레 이정아 기자

한겨레 이정아 기자

마권을 구입한 사람들이 자리에 앉아 있으면 낌은 옆을 지나가면서 호객을 한다. “자! 제9경주 국산 4세. 진검승부 놓치면 안 됩니다. 수말과 거세마 찾으시는 분, 신문 있습니다. 1200m 총상금 3억원!” “국내 최정상 스프린터 ‘광교비상’ ‘쾌지나칭칭’ 찾는 분! 오늘 단거리, 중장거리 정보 알찹니다.” 낌도 어느새 나라 안팎의 뉴스보다 경마 세계에 더 익숙해져간다. 출전 등록마의 정보를 달달 외워야 하고 대중이 열광할 만한 박빙의 경주를 꼼꼼하게 챙겨두어야 한다. 목요일이나 금요일이 되면 경주마의 건강 상태에 따라 출전 여부가 달라지기 때문에 단골 고객들은 신문보다 자신의 정보원을 두는 사람이 더 많다. 최근엔 ‘광개토대왕’이 강력한 적수로 부상하고 있다.

한때 낌의 꿈은 기수가 되는 것이었다. 제주에서 자라나 개인마주였던 아버지의 사업으로 인해 어릴 적부터 조랑말과 친했던 낌은 초등학교에 올라가자 아버지의 권유로 기수가 되기 위한 수업을 받았다. 하지만 외산마들이 수입돼 몰려들어왔고, 지역선거 출마에 연거푸 아버지가 낙마한 뒤 낌의 집안도 풀을 뜯기 시작했다. 낌은 기수학교에 진학했지만 기복이 심했고 자주 부상에 시달렸다. 스무 살까지 몇 번 시험에 낙마한 뒤 포기했다. 낌은 야생마가 되어 술과 경마장을 전전했다. 아버지는 역습을 준비하기 위해 우즈베키스탄으로 가진 말을 모두 팔고 떠나신 지 10년이 넘도록 소식이 없다. 아버지는 한마디를 남기셨다.

“꼭 1등이 아니어도 된다. 단거리가 아니라 장거리에 적응할 수 있는 복병이 되거라.”

아버지의 도주력을 감당하기 위해 어머니는 흑기사 되어 지금까지 기사식당에서 일한다. 어릴 적 낌의 기수학교 동기 중 몇은 근사한 경주마 기수가 되어 고급 스포츠카를 몰고 다닌다. 낌은 한 번 기수의 애인을 태우고 스포츠카 대리운전을 해주며 외곽으로 달려본 적이 있다. 약속대로 동기의 카섹스 보안을 봐주고 10만원짜리 수표를 한 장 받았다. 버스를 타고 돌아오는 길에 멀미가 올라와 낌은 바닥에 토했다.

경마신문은 경주가 시작되면 당일 신문은 무용지물이 되어버린다. 휴지가 되어버린 마권을 들고 와서 신문에 속았다고 낌의 싸다귀를 날린 사람도 있다. 낌의 하루 일당은 이것저것 떼어주고 나면 5만원 정도 된다. 그것도 200부 이상은 팔아야 돌아온다. 최선의 전력을 발휘하며 마장을 뛰어다녀도 신문팔이는 한계가 있다. 낌에게 돌아오는 배당은 낮다. 경주가 시작되고 게이트가 열리면 경마장은 숨죽일 듯 고요하다. 경마 중계가 시작되면 낌도 구석에 앉는다. 광교비상과 남해와 백기사와 한라봉이 스프린터 대결을 펼친다. 1400m는 말에게 꽤 숨이 차오르는 경기다. 보는 이들에겐 침 한 번 삼킬 틈 없는 시간이다. 차령산맥이 선두로 치달린다. 쾌지나칭칭이 바짝 뒤쫓는다. 코너를 돌 때마다 관객과 낌의 가슴은 흥분으로 도가니다. 결승선 직선주로에 도달하는 말들은 난타전을 방불한다. 경마장이 다 식은 구석에서 낌은 주머니에서 오래된 마권 한 장을 꺼내본다. 101전 최다연패 ‘차밍걸’, 일명 똥말, 한 번도 이기지 못했고 한 번도 포기하지 않았던 말. 아버지가 처음 사주신 마권이다. 낌은 자신의 영업용 택시로 돌아온다. 한 주가 시작되면 낌은 영업용 택시 운전을 하면서 도시를 달린다. 경주가 시작되면 기수는 뛰는 말의 등에 앉을 틈이 없다. 혼전은 피할 수 없다.

시인·극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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