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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성인격정치’ 진영 일대기

2004년 국회의원 당선 뒤 박근혜 대표 비서실장 기용, ‘탈박’ 선언 뒤 ‘친이’ 좌장, 장관 임명 뒤 ‘극존칭’ 업무 보고, 최근 장관직 사퇴
등록 2013-10-08 11:01 수정 2020-05-02 19:27
한겨레 김경호

한겨레 김경호

기초연금과 관련한 복지 공약 후퇴를 비판하는 여론이 커지자 보건복지부 장관직을 사퇴한 진영(63·사진) 새누리당 의원에 대해, 새누리당에서 ‘사표 전문가’라는 조롱이 나왔다. “총애받던 ‘황태자’가 대통령과 당을 배신했다”는 비판이었다.

연원을 보자. 지난해 5월9일 원내지도부 경선에서 진 의원은 이한구 의원의 러닝메이트로 나서 정책위원회 의장에 당선됐다. 그러나 7월11일 정두언 의원에 대한 체포동의안이 국회 본회의에서 부결되자, ‘국회 쇄신을 보이지 못한 책임’을 들어 사퇴를 선언한 이한구 원내대표와 함께 자리를 내놨다. 이틀 뒤 박근혜 의원은 “어렵게 국회를 열었고 (총선에서) 국민께 약속드린 게 많다”며 사퇴한 이들의 복귀를 에둘러 종용했다. 당은 이 ‘지시’를 받들어, 사흘 뒤 이한구 원내대표를 기어이 돌아오게 했다. 다만 진 의원은 “상황을 뒤집을 아무런 이유가 없다”며 복귀를 고사했다. 그 무렵 불붙었던 대선 경선이 모두 끝난 8월27일, 진 의원은 캠프의 공약기구인 국민행복추진위원회 부위원장에 임명되며 동시에 정책위 의장으로 복귀했다. 복귀 신고식이던 8월31일 연찬회장에서 그는 “짐 싸서 나간 다음에 다시 서니 쑥스럽다”고 했다.

진 의원은 2004년 국회의원에 처음 당선되자마자 곧장 박근혜 대표 비서실장에 기용되며 신임을 얻었지만, 2007년 한나라당 대선 후보 경선에서 ‘박근혜 캠프’ 참여는 거부했다. 현직 의원으로서 ‘줄 서기’는 부적절하다는 이유였다. 1.5%포인트 차로 경선에서 진 친박근혜계는 서운함이 컸다. 2010년 6·2 지방선거에서 진 의원이 공천심사위원장 물망에 오르자, 친박 의원들은 “무늬만 친박”이라며 폄하·반발했고, 결국 없던 일이 됐다. 진 의원은 “마음의 상처가 컸다”고 말한다. 그는 박근혜 대통령이 당시 반대하던 세종시법 수정안에 찬성표를 던졌고, 박 대통령과 대척점에 있는 이재오 의원의 2011년 보궐선거 유세를 도왔다. 갖은 비판 속에 “이젠 친박이 아닌 중립으로 불러달라. 친박의 배타성에 지쳤다”고 ‘탈박’을 선언하더니 ‘친이’ 모임 좌장도 맡았다. “박근혜 전 대표와는 신뢰가 있지만, 친박은 절대 안 한다”라던 그는, 지난해 원내지도부 경선 전날 박 대통령이 그의 지역구에서 봉사활동을 하며 힘을 실어주면서 ‘친박 인증’을 다시 받았다.

판사 생활 1년 뒤 1981년에 바로 변호사로 개업한 진 의원은 1987년 젊은 변호사들과 함께 ‘경쟁력 강화를 위한 변호사 모임’을 만들었다. 1995년 이 모임은 총리직에서 물러나 있던 이회창 변호사를 고문으로 초빙했고, 1996년 이회창 변호사는 신한국당에 입당해 총선을 승리로 이끈 뒤 이듬해 대선까지 질주했다. 진 의원은 그를 위한 ‘법조후원회’를 결성하며 정계에 발을 들였다. 당시 진 의원은 이회창 총재가 김영삼 대통령과 결별하는 데 반대했다. 무릎 꿇고 “안 된다”고 간언도 했고, “참을 수가 없습니다. 총재가 저러면 대통령 (당선) 안 됩니다. 저는 갈랍니다” 하고는 한동안 사라지기도 했다 한다. 이회창 총재는 그가 괘씸하다며 씩씩댄 것으로 전해진다.

진 의원은 지난해 대선을 두어 달 앞둔 어느 날 “나라도 나서서 (박근혜) 후보한테 쓴소리를 해야 되나 싶다가도, 안 그래도 기운 없을 텐데 나까지 그러면 되겠나, 나는 내 할 일이나 열심히 잘하자 생각하고…”라고 푸념한 적이 있다. 지난 3월 장관 첫 업무보고에선 “대통령님께 장관으로서 업무보고를 드리게 된 데 대해 표현할 수 없는 가슴 벅찬 감동을 느낀다”는 극존칭이 논란이 됐다. 장관직에서 물러난 진 의원은 곧 국회의원 활동을 재개한다. 새누리당의 표정에 눈길이 모아진다.

김외현 기자 oscar@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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