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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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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빈의 자격

이례적이었던 대통령 임기 첫해 유럽 순방
버킹엄궁의 박 대통령은 무슨 생각 했을까
등록 2013-11-20 05:46 수정 2020-05-02 19:27
영국을 국빈 방문한 박근혜 대통령이 11월5일 엘리자베스 2세 여왕과 함께 왕실 마차를 타고 버킹엄궁으로 가고 있다.청와대사진기자단

영국을 국빈 방문한 박근혜 대통령이 11월5일 엘리자베스 2세 여왕과 함께 왕실 마차를 타고 버킹엄궁으로 가고 있다.청와대사진기자단

박근혜 대통령은 11월5~7일 영국을 국빈 방문했다. 해마다 세계 많은 나라의 정상들이 영국을 찾지만, 국빈 방문(State Visit)은 흔치 않다. 국빈 방문은 대영제국의 전통으로 ‘지상 최고의 의전’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붙고, 1년에 두 차례로 횟수를 제한하고 있다. 심지어 영국과 ‘특수관계자’인 미국도 국빈 방문은 불과 10년 전인 2003년 11월 조지 부시 대통령 때가 처음이었다.

당시 미국 기자들은 영국 국빈 방문의 조건이 뭔지, 일반적인 공식 방문(Official Visit)과는 어떻게 다른지 궁금해했다. 영국을 방문한 미국 대통령은 1952년 해리 트루먼 대통령 이래 부시가 11명째인데, ‘국빈’은 처음이라 하니 말이다.

엘리자베스 2세 여왕과의 식사일까? 아니었다. 1961년 존 F. 케네디 대통령은 여왕과 저녁을, 1969년 리처드 닉슨 대통령은 점심을, 1989년 조지 부시(아버지) 대통령도 점심을 함께 한 적이 있다. 아들 부시도 2001년 점심 경험이 이미 있었다. 당시 버킹엄궁 대변인은 이렇게 설명했다. “어려운 질문인데, 딱 떨어지는 차이는 없지만, 여왕과 공식 만찬(Banquet)을 하면 국빈 방문인 것 같다. 물론 만찬도 다양하지만, 공식 만찬엔 마차를 타고 오는 순서가 있다. 한층 의전을 갖춘 형태다. 그리고 왕궁에서 묵는다.”

그럼 ‘왕국 숙박’일까? 그것도 아니었다. 1918년 우드로 윌슨 대통령도 버킹엄궁에서 묵은 적이 있다. 여왕의 할아버지 조지 5세 시절이었다. 1959년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대통령도 밸모럴궁에서 묵으며 여왕을 만난 적이 있다. 1982년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 부부는 윈저궁에서 여왕 부부와 함께 묵었다. 만찬도 했고, 같이 승마도 했다. 영국 왕실 홈페이지엔 ‘비공식 방문’(아이젠하워), ‘공식 방문’(레이건)이라고 표기돼 있다. 궁금증이 가시지 않은 미국 기자들에게, 영국 외무성은 “확연히 구분짓긴 힘들지만, 국빈 방문의 의전 내용이 좀더 높다”고 했다. 무슨 의전일까? 부시 대통령은 마차도 타지 않았다.

처음으로 영국을 국빈 방문한 우리나라 정상은 2004년 12월 노무현 대통령이었다. 1999년 4월 여왕이 한국을 국빈 방문한 데 대한 답방 성격으로 김대중 정부 때 추진했으나, 순번이 왔을 땐 이미 차기 노무현 정부가 들어섰다. 당시 노 대통령은 영국 동포간담회에서 뒷이야기를 털어놨다.

“저는 격식을 잘 모르고 그렇게 대단한 일인 줄 모른 채 국빈 방문을 하자길래, 격식과 절차가 까다롭고 골치 아픈 것을 왜 하자냐고 했더니 외교장관(반기문)이 눈이 동그래가지고 봅디다. (반 장관)은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는 거지요. (반 장관 얘기는) 김대중 전 대통령이 그리 애를 써 맞춰놓은 것인데 (김 전 대통령) 임기 중엔 기회를 못 얻고 우리가 이번에 기회를 만들었으며, 대통령 개인뿐 아니라 세계 속에서 국가 위신과 위치를 확인하는 의미가 있는 기회인데 안 간다니 말이 되느냐고 해, 아무 말도 못하고 ‘갑시다’ 하며 왔습니다.”

이번 박근혜 대통령의 유럽 순방에 대해 김행 청와대 대변인은 “영국 여왕의 국빈 초청에서 시작됐다”고 말했다. 일각에선 영국 국빈 방문 기회가 임기 중에 다시없을 거란 판단에, 이례적임에도 ‘임기 첫해 유럽 순방’을 추진했을 거란 관측도 나온다.

아! 그러고 보니 영국 국빈 방문의 가장 기본 조건을 빼먹었다. 상대국 정상이어야 한다. 일본이나 타이, 사우디아라비아처럼 왕이 있으면 왕이 가야 한다. 총리는 안 된다. 공주도 안 된다. 박근혜 대통령은 대통령이라서 간 거다. 공주라서가 아니다.

김외현 기자 oscar@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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