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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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떡밥 회수의 기술

[네 남자의 만화방]각종 복선과 단서로 독자가 이야기 매력을 덥석 물게 하다가
초압축과 세계 종말 등 급격한 마무리로 떡밥 가져간 작가들
등록 2012-08-04 06:04 수정 2020-05-02 19:26

떡밥은 낚시를 할 때 걸어놓는 미끼다. 그런데 이 용어를 대중서사 장르에 적용할 때는, 각종 복선(으로 보이는) 모든 스토리상 요소와 세계관의 단서들을 통칭하곤 한다. 독자가 떡밥을 덥석 물어, 이야기의 매력이라는 바늘에 코가 꿰어 작품 진행 내내 매달려 따라가도록 유도한다는 의미다. 떡밥이 많고 정교할수록 이야기는 독자에게 추론과 상상으로 참여할 기회를 주어 몰입감을 높인다.

잦은 장기 휴재로 인해 연재 진도가 쓰러지게 느린 작품들, 예를 들어 1986년 월간지에 연재를 시작했지만 단행본 12권에서 전개가 멈춘 마모루 나가노의 가 팬들의 원성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 팬들의 기대와 인기를 모으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풍부한 떡밥이다. 우주적 스케일을 자랑하는 디테일 풍부한 타임라인이 연재 초기에 미리 공개돼 있고, 작품은 그 거대한 틀 안에서 확인 가능한 떡밥과 새로운 떡밥을 던지며 하염없이 이어진다.

그런데 복선은 정교하게 뿌리는 것 이상으로 잘 해결하는 것이 중요한데, 이를 ‘떡밥을 회수한다’고 흔히 칭한다. 체호프의 총(제시한 복선은 사람들이 잊을 때 즈음 다시 나와 활용돼야 함)과 맥거핀(중요한 복선으로 포장한 뒤, 그것을 해소하지 않거나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밝혀 충격을 주는 것) 사이의 줄타기는 물론이다. 그런데 연재물의 경우, 잔뜩 설정을 키워놓고 온갖 복선을 던져놨는데 매체의 폐간이나 작가의 경질 등 물리적 환경에 의해 작품을 급작스럽게 끝내야 하는 순간이 발생하곤 한다. 이럴 때 어떻게 떡밥을 회수할까. 한 가지 흔한 방법은 초압축 최종화다. 의 한 에피소드에서 따온 ‘소드마스터 야마토 엔딩’이라는 속칭으로도 불리는데, 마지막 연재분의 좁은 지면 안에 최대한 많은 떡밥을 급박하게 회수하는 것이다. 하나씩 물리쳐야 할 악의 4대천왕은 한 칸에 끝내고, 숨겨진 여동생과 납치당한 스승 같은 세부 캐릭터들은 별 상관 없다고 넘기거나 이미 풀려났다. 손에 땀을 쥐는 최종 결전은 적당한 희망을 남기는 오픈 엔딩으로 처리하고, 독자에게 감사의 메시지를 주고 끝난다.

또 하나의 흔한 떡밥 급회수 기법은 이세계 엔딩이다. 알고 보니 모든 것이 꿈속 이야기였다거나, 다른 평행우주에서 벌어진 일이었다거나 하는 식이다(이 또한 속칭이 있는데, 바로 ‘아시발쿰’이다). 주인공이 이야기 전체가 펼쳐진 일탈적 세계가 아닌 원래의 세계로 돌아왔으니 남은 복선이 무엇이었든지 간에 그건 다른 세상 일일 뿐이다. 다만 뭔가 아련하게 그 세계가 거짓이 아니었다는 식의 단서가 살짝 남으면 금상첨화(아니, 식상함으로 보자면 설상가상)다. 이현세의 연재 당시 엔딩이 문명의 기원과 우주의 탄생이 담긴 엄청난 스토리를 벌여놓다가 결국 그런 식으로 끝낸 악명이 높다. 이외에도 딱히 2부의 계획도 기약도 없음에도 ‘1부 완결’을 선언한다든지, 작품 속 모든 세계가 소멸하는 몰살 엔딩이라든지 여러 극단적인 떡밥 회수 방법이 즐비하다.

당연하게도 이런 급격한 떡밥 회수는 그저 작가 자신만 보전할 뿐 그간 작품 전체의 완성도는 완전히 깎아먹는, 마무리를 위한 마무리다. 적당한 봉합으로 생색만 낼 뿐, 중요한 내용은 상당 부분 그냥 방치되고, 작품의 개선 여지 또한 막아버린다. 따라서 웬만큼 특이한 취향이거나 조롱을 위한 것이라면 모를까, 일반적으로 독자가 좋아하기란 무척 힘들다. 현실 세계에서 워낙 지긋지긋하게 늘 보는 패턴이라서 더욱 그럴지도 모르겠다. 사찰 게이트부터 측근 비리, 대규모 편법 증여 같은 권력형 정치·경제 사건을 다루는 검찰 수사라든지 말이다.

김낙호 만화연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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