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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세’는 반드시 이루어진다

만화 속에선 엄포가 비현실적으로 화려할수록 반격에 대한 기대감이 높아지는데, 현실 정치인들은 단지 ‘허무개그’일 뿐
등록 2012-05-30 09:02 수정 2020-05-02 19:26
<블리치>는 허세 구도를 뻔뻔하게 남용해서 ‘허세치’라는 별칭으로 불리기도 한다.

<블리치>는 허세 구도를 뻔뻔하게 남용해서 ‘허세치’라는 별칭으로 불리기도 한다.

‘허세’라는 개념을 일상용어에서 쓸 때는, 작위적일 정도로 우아한 (정확히는 스스로 우아하다고 믿는 듯한) 취향이나 언변을 과도하게 내세우는 것을 연상하곤 한다. 하지만 대중 장르문화, 특히 만화에서 허세 코드는 약간 다른 뉘앙스를 지닌다. 하나의 극적 하이라이트로서, 주요 캐릭터가 그간 진행된 내용에서 드러났던 능력 이상의 무언가를 자부하는 것이다. 일종의 근거 없는 자신감인데, 이후 줄거리를 위한 좋은 디딤돌이 되어주곤 한다.

허세 코드가 장르의 핵심 특성에 가까운 것은 소년 독자를 대상으로 하는 ‘배틀물’, 즉 등장인물들 사이의 반복되는 대결 과정이 내용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작품들이다. 주인공이든 그와 싸우는 라이벌이든, 밀리고 있는 쪽이 갑자기 씨익 미소를 지으며 아직 내 힘의 43.4%만 발휘한 것이라고 고백하거나, 네놈이 이렇게 강해 보여도 나는 굴하지 않는 뭔가 쿨하고 멋진 상징이 깃든 정신으로 결국 승리를 얻어낼 것이라고 당당하게 선포한다. 그리고 그 뒤에 나오는 것은 십중팔구, 정말로 위기를 뒤집을 만한 길고 화려한 이름의 새로운 필살기를 펼치거나, 아니면 그냥 한 페이지를 가득 채우는 강렬한 기합을 넣으며 놀라운 반격을 날리는 것이다. 허세가 강력할수록, 즉 위기가 처참하고 엄포는 비현실적으로 화려할수록 이후의 반격에 대한 기대감이 높아진다. 인기 소년만화 는 이런 허세 구도를 워낙 뻔뻔할 정도로 남용해서, 아예 팬들에게 ‘허세치’라는 별칭으로 불리기도 한다.

순정물에서 허세는 약간 다른 방식으로 활용되기는 하지만 애용되기는 매한가지다. 대결 구도에서의 반전 도구보다는, 어떤 인물이 보기에 별 볼일 없어도 사실은 엄청난 배경을 지녔다든지 대단한 재능이나 꿈을 가졌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한 중간 다리로 쓰이곤 한다. 천계영의 같은 작품에서 적당히 모여 밴드에 스카우트된 주인공들의 근거 없어 보이는 자신감은, 바로 직후에 그들의 천재적 음악 재능을 소개하기 위한 잠깐의 전주곡인 것이다.

허세 코드의 정점은 자기 자신에게까지 허세를 부리는 것인데, 속칭 ‘중2병’이라고 부르는 행동 가운데 상당 부분이 여기에 해당된다. 세상은 타락하고 하찮은 곳인데, 나만은 그것을 알고 있고 어쩌면 뒤틀어 바꿔놓을 만한 우월한 감성과 능력을 지니고 있다. 다만 그 사실은 나만 알고 있고, 아직 발현할 계기가 없었을 뿐이다. 이름을 아는 사람은 원하는 방식으로 살해할 수 있는 저승의 살생부를 손에 넣고 “나는 신세계의 신이 되겠어”를 선언하는 주인공이 나오는 같은 작품이 ‘중2병’ 허세를 아주 모범적으로(즉 따로 읽으면 손발이 오그라들도록 민망하지만, 작품 전개 안에서는 무척 재미있는) 오락 코드로 활용한다.

이런 서사 장치로서의 허세는 지금 눈으로 보이는 현재 상태 이상의 것을 약속해주고, 그것이 실제로 실현되기 때문에 유효하다. 다시 말해, 허세로 보이지만 사실은 허세가 아닌 것으로 드러날 것을 알기에 재미있다는 말이다. 그렇듯 일반적 주류 만화작품에서 허세는 깨트리기 위해 존재하고, 깨질 것을 독자도 미리 충분히 기대하곤 한다.

다만 오히려 이것을 역이용하는 반전 효과도 있는데, 바로 허무개그를 만드는 경우다. 허세를 떨고, 허세가 진실로 드러나야 할 법한 순간에 그냥 공허한 허세로 판명돼 허탈한 웃음만 남기는 것이다. 사회 진보의 이상을 잔뜩 멋지게 입에 올려놓은 정당인들이, 바로 다음 순간에 민주제의 기본도 무시하는 패악질을 펼치는 패턴이라면 무척 훌륭한 사회파 블랙코미디가 돼줄 것으로 본다.

김낙호 만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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