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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조기 팬티의 그 여자

제2차 세계대전이 만화에 끼친 뜻밖의 변화… 여성 해방과 속박을 동시에 담은 모순적 캐릭터, 치마 입은 영웅 원더우먼이 등장하다
등록 2011-12-16 03:34 수정 2020-05-02 19:26

전쟁은 때론 뜻밖의 변화를 만들어낸다. 비상 상황이 되면서 기존 것은 흔들리게 되고, 이를 대체할 새로운 것이 가능성을 펼칠 기회를 얻기 때문이다. 그래서 문화에선 새로운 장르와 스타가 전쟁을 계기로 탄생하기도 한다.
유례없는 초대형 전쟁이던 제2차 세계대전은 특히 많은 변화를 만들어냈다. 이 전쟁은 미국 최고의 인기 스포츠 야구에도 직격탄을 날렸다. 프로야구 선수들이 대거 징집돼 메이저리그에 최대 위기가 온 것이다. 자본주의 종주국답게 미국은 대타 야구 영웅으로 여자 야구 리그를 만들어낸다. 톰 행크스와 마돈나가 나온 영화 가 바로 그 이야기다. 당시 구단들은 여성 선수에게 치마 유니폼을 입혔다. 여성이 새로운 영역에 도전하게 된 대신 성산업화 현상도 따라붙었던 것이다.
전쟁이 한창이던 1941년, 만화에서도 치마 입은 여성 영웅이 나타났다. 남성 영웅들이 판치던 미국 만화 역사상 최초의 여성 영웅이었다. 투명 비행기를 타고, 팔찌로 총알을 막고, 황금 밧줄로 적을 물리치는 여자, 한국의 40대 이상 세대들에겐 린다 카터가 나온 드라마로 각인된 ‘원더우먼’이다.
애초 소녀용 만화로 기획된 원더우먼은 여권운동의 이상을 담은 최초의 만화로 평가받는다. 물론 남성 독자가 압도적으로 많아지는 바람에 원더우먼의 치마는 더 짧은 팬티형으로 바뀌었지만.
원더우먼의 창조자는 심리학 박사면서 만화출판사 자문위원인 윌리엄 몰턴 마스턴이었다. 마스턴은 심리학자로서 거짓말탐지기의 전신인 혈압측정 장치를 개발한 것으로 유명한데, 이 장치는 그의 이론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는 여성이 남성보다 정직하다는 주장을 폈는데, 이를 구현하는 방법으로 만화에 주목했다. 당시 미국에선 남자들이 전장으로 간 사이 여성운동이 다시 한번 꿈틀거렸고, 마스턴은 여성이 해방된 사회가 가부장 사회보다 훨씬 사려 깊고 따뜻할 것임을 이 만화로 보여주려 했다. 그래서 아마조네스 여전사들의 고향인 금남의 섬 파라다이스 왕국의 다이애나 공주를 주인공으로 설정했다. “아프로디테만큼 사랑스럽고, 아테나처럼 지혜롭고, 헤라클레스만큼 강한” 이 공주는 여성을 도우려고 미국으로 가 ‘원더우먼’이 된다.
초기 원더우먼은 여성주의적 관점을 강하게 드러냈다. 악당을 박살내기보다는 물리친 다음 교화시키려 하고(원더우먼의 마법 밧줄에 묶이면 모든 속마음을 털어놓게 되므로), 심지어 사회 복귀까지 돕는 게 원더우먼의 특징이자 단순 무식한 남성 영웅들과의 차이였다. 물론 여성들에겐 “강해지세요”를 외쳐댔다.
그러면서도 마스턴은 심리학자의 전문성을 상업적으로 활용하는 걸 잊지 않았다. 원더우먼이 거의 매번 악당들에게 결박당하는 모습을 보여줬던 것이다. 페미니즘과 에로티시즘의 포트폴리오랄까.
원더우먼은 데뷔하자마자 인기를 누렸고, 이후 수많은 시리즈와 드라마와 패러디와 아류 여성 영웅을 낳으며 20세기 대중문화의 아이콘이 됐다. 한국의 소년 시청자에겐 “자기 나라 국기인 성조기로 팬티를 만들어 입는 비애국자”란 시시껄렁하지만 추억 어린 농담의 주인공으로 기억된다. 여성 해방과 여성 속박의 모순은 이 캐릭터의 영원한 운명일 수밖에 없는 듯하다.
구본준 기자 한겨레 책지성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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