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트콘(Retroactive continuity의 줄임말)은 어떤 작품의 설정을 바꾸는 방식 중 하나다. 작품 속에서 그간 벌어졌던 과거의 일을 현재의 필요성에 따라 수정하고 다시금 현재를 끼워맞추는 식이다. 작품을 다른 매체로 각색하며 설정을 수정하는 것은 흔한 일이지만, 연속된 하나의 작품 또는 연작 안에서 그렇게 할 때 칭하는 용어다.
예를 들어 슈퍼맨은 어떻게 초인적인 능력을 구사할 수 있게 되었을까. 1930년대에 처음 연재되었을 당시에는 슈퍼맨의 모성인 크립톤별의 주민들은 원래 진화한 종족이라서 누구나 초능력자였다. 하지만 그런 지나치게 편리한 설명으로는 재미가 떨어지자, 1940년대의 새로운 설정에서는 지구의 낮은 중력과 태양광선이라는 유사과학적 설명으로 수정되었다. 크립톤과 비슷한 환경에서는 힘이 줄어들고 말이다. 1986년 이후에는 태양에 관한 본격적인 설정이 확장되어, 지구에서 자라나며 ‘노란 태양’의 힘을 오랫동안 쐬지 못하면 힘이 점점 줄어드는, 태양열 전지 같은 히어로가 되었다. 그런데 단순히 설명만 바뀐 것이 아니라, 캐릭터의 과거도 바뀌었다. 슈퍼맨은 지구에서 자라나며 햇빛을 흡수해 점차 초능력을 키워나간 것으로 재설정되었다. 1930년대부터 계속 슈퍼맨 만화 연재를 본 사람이라면, 이미 나왔던 과거의 내용과 새로 나오는 과거 내용이 서로 충돌하는 것에 혼란을 느낄 수도 있다. 그리고 그런 모순을 극복하려고, 출판사는 시공간을 넘나들고 평행우주 개념까지 동원하는 경지에 이른 지 오래다.
레트콘을 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계속 이어지는 시리즈의 인기를 오랜 세월 유지하려고 당대의 독자들이 공감할 수 있는 맥락을 계속 넣는 것이다. 특히 만화는 주인공이 늙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늘 오늘날을 배경으로 에피소드를 무한히 연장하고 싶다면 그렇게 할 수 있다. 다만 현재를 오늘날에 새롭게 맞추기 때문에, 과거 또한 바뀌어야 하는 것이다. 1980년대에 30대 주인공이 10년 전을 회상하면 1970년대의 모습이 되어야 하지만, 같은 주인공이 같은 연령으로 계속 나오는 시리즈가 2000년대까지 계속되면 그 10년 전이란 1990년대가 된다. 그리고 시대 배경에 따라 과거 환경과 그에 따른 에피소드도 달라진다. 특히 미국 만화의 주류 슈퍼히어로 장르에서는 작가보다 대형 출판사가 작품의 내용에 대한 전권을 쥐고 제작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현재적 필요- 즉 출판사가 생각하는 오늘날 독자들의 취향- 에 따라 얼마든지 레트콘을 실시할 수 있다. 실제로 배트맨·슈퍼맨 등의 작품으로 유명한 DC코믹스는 최근 자사 슈퍼히어로 연재물들을 한꺼번에 새 설정으로 재시작하는 대규모 프로젝트 ‘뉴 52’를 감행한 바 있다(얼마나 파격적인가 하면, 슈퍼맨의 팬티가 푸른색이 되었다).
어떤 면에서 보자면, 레트콘은 오랫동안 시리즈를 우려먹으려는 억지다. 작품을 작품이 만들어진 당대의 맥락에서 보면 될 텐데, 자꾸 가상의 현재로 중간에 슬그머니 재해석하는 것은 작품 내적 통일성이라는 완성도로 생각할 때는 끔찍한 일이다. TV 연속극의 무리한 연장 방영 따위와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다. 하지만 달리 생각하면, 레트콘이야말로 우리가 역사를 다루는 기본 방식과도 같다. 각자의 개인적 기억을 넘어선 영역에서는, 역사란 기록으로 구성된 설정으로만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필요에 따라 과거를 자꾸 재해석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미약한 단서로 심히 창대한 이야기를 새로 꾸며내기도 한다. 바이칼호까지 달렸다는 환국의 전설이든, 조선의 국모를 자처하고 우국충정으로 넘쳤다는 명성황후 전설이든 마찬가지다. 아니면 좀더 미묘하게, 원래 복합적인 요소들이 섞여 있기 마련인 과거에 대해 특정 부분을 부각시키거나 삭제함으로써 새로운 설정을 연상하도록 유도한다. 국부 이승만, 근대화의 기수 박정희처럼 말이다. 오늘날 세상에서도 민족의 탈을 쓴 권위주의의 억지 줄거리를 어떻게든 계속 이어가고 싶은 이들일수록, 역사 레트콘을 시도하고자 하는 유혹이 클 것이다.
김낙호 만화연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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