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하나뿐인 시인에게 묻겠습니다

시 ‘나는 참아주었네’와 ‘바셀린 심포니’에서 찾은 인내과 사랑의 목록… 김언희 시집 <요즘 우울하십니까?>
등록 2011-05-20 02:25 수정 2020-05-02 19:26

하나뿐인 사람들은 대단합니다. 예술가의 단독성을 존경합니다. 시인 김언희는 하나였습니다. 김언희라는 시는 유일했습니다. 지금은 후배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첫 15년은 혼자였습니다. 지독히 직시하는 타입이었습니다. 진실에 도달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이념이나 문화 속에 있지 않았습니다. 섹스와 똥오줌과 시체에 있었습니다. 그런 것들을 노래했습니다. 시에서 소리가 들렸습니다. 교성인 줄 알았는데 괴성이었습니다. 곡성인 줄 알았는데 환성이었습니다. 적나라하고 처절했습니다. 동시에 경쾌하고 번뜩였습니다. 100살 마녀처럼 지혜롭고 꼬마숙녀처럼 용감합니다. 여자 시인인데도 대단하다? 어떤 남자 시인도 이렇게 못 씁니다. 최근에 네 번째 시집을 냈습니다. 제목이 입니다. 어떤 시인을 이해하려면 물어야 합니다. 그가 견디는 것과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나는 참아주었네, 아침에 맡는 입 냄새를, 뜻밖의 감촉을 참아주었네, 페미니즘을 참아주고, 휴머니즘을 참아주고, 불가분의 관계를 참아주었네, 나는 참아주었네 오늘의 좋은 시를, 죽을 필요도 살 필요도 없는 오늘을, 참아주었네, 미리 써놓은 십년치의 일기를, 미리 써놓은 백년치의 가계부를, 참아주었네 한밤중의 수수료 인상을, 대낮의 심야 할증을 참아주었네 나는, 금요일 철야기도 삼십년을, 금요일 철야 섹스 삼십년을, 주인 없는 개처럼 참아주었네, 뒷거래도 밑 거래도 신문지를 깔고 덮고 참아주었네, 오로지 썩는 것이 전부인 생을, 내 고기 썩는 냄새를, 나는 참아주었네, 녹슨 철근에 엉겨붙은 시멘트 덩어리를, 이 모양 이 꼴을 참아주었네, 노상 방뇨를 참아주었네, 면상 방뇨를 참아주었네, 참는 나를 참아주었네, 늘 새로운 거짓말로 시작되는 새로운 아침을, 봄바람에 갈라터지는 늙은 말 좆을,”(‘나는 참아주었네’ 전문)

견뎌온 것들의 목록입니다. 따져 읽지 않아도 그냥 그대로 좋습니다. 말들이 춤을 춥니다. 리듬이 살아 있습니다. 이미지가 싱싱합니다. 그래도 짐작해보겠습니다, 그녀가 무엇을 견디는지. “아침의 입 냄새”는 남편입니까. “뜻밖의 감촉”은 성추행입니까. 한쪽에서 페미니즘을 말하면 다른 쪽에서는 휴머니즘을 말합니다. 이 평행선이 피곤합니까. “십년치의 일기”를 미리 썼답니다. 그만큼 빤한 일상입니까. “백년치의 가계부”를 미리 썼답니다. 가정경제가 쳇바퀴입니까. “수수료”와 “심야할증”이야 말해 뭐합니까. 기도는 허망하고 섹스는 지루합니까. “뒷거래”는 위선적이고 “밑 거래”는 폭력적입니까. 그렇습니까? 이 모든 것이 그렇습니다. 이런 것들을 참아왔습니다. 참으면 새 아침이 옵니까? 삶은 살 만한 것이라는, 늘 새로운 거짓말만 옵니다. 그래서 허무합니다. 인간은 고기 덩어리, 인생은 곧 썩는 과정입니다.

“내가 사랑하는 것은/ 북두칠성의 여덟 번째 별// 내가 사랑하는 것은/ 혓바닥에 구멍을 내고야 마는 추파춥스// 내가 사랑하는 것은/ 아침 새를 잡아서 발기발기 뜯고 있는 고양이// 내가 사랑하는 것은/ 발광하는 입술과 피를 빠는 우주// 내가 사랑하는 것은/ 지금 막 방귀를 뀌려고 하는 오달리스크// 내가 사랑하는 것은/ 직장(直腸)에 집어넣은 탐스러운 폭탄// 내가 사랑하는 것은/ 벼락 맞을 대추나무에 열린 벼락 맞을 대추// 내가 사랑하는 것은/ 금방 뱀에 물린 당신의 얼굴”(‘바셀린 심포니’ 전문. 시집 원문에는 제목과 8행이 이탤릭체로 표시돼 있다. 다른 데서 차용한 표현이라는 뜻이다. 참고로 적자면, 시의 제목은 다다이즘의 수장이던 트리스탄 차라의 작품 제목에서, 8행의 ‘발광하는 입술’과 ‘피를 빠는 우주’는 사사키 히로히사 감독의 영화 제목에서 온 것이다.)

사랑하는 것들의 목록입니다. 역시 따져 읽지 않아도 좋습니다. 그래도 짐작해보겠습니다, 그녀가 무엇을 사랑하는지. “북두칠성의 여덟 번째 별”은 미지입니까. 미지의 것을 사랑합니다. “추파춥스”는 달콤한 고통입니까. 어떤 고통은 달콤합니다. 새를 뜯는 고양이는 어떻습니까. 우아(優雅)보다는 야생(野生)을 사랑합니다. 10년 전 영화, 미친 영화입니다. 과 를 꼭 보십시오. 르누아르가 그린 오달리스크(Odalisque)의 모습을 보고 바스키아는 말했습니다. “저 여자, 곧 방귀를 뀌려는 거 같아!” 이 발상을, 이 천진함을, 그러므로 이 진정한 예술가스러움을 사랑합니다. 항문에 폭탄을 집어넣는 상상, 벼락 맞을 녀석이 벼락을 맞는 상상은 즐겁습니다. 이런 시인의 모습을 본 지금 당신의 표정이 궁금합니다. 금방 뱀에 물린 사람의 표정입니까? 독자의 그런 표정을, 이 시인은 사랑합니다. 그리고 하나뿐인 이 시인을, 저는 사랑합니다.

문학평론가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